삶의 모호함을 견디라
전8:9-17
[나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다가,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다." 이 세상에서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을 때에, 그리고 땅 위에서 밤낮 쉬지도 않고 수고하는 사람의 수고를 살펴보았을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 전도된 현실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입추와 처서 사이를 지나면서 날이 한결 견딜 만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인지 매미의 울음소리가 더욱 처연하게 들립니다. 저는 부질없는 집착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질 때면 전도서를 읽곤 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전1:2) 이 말은 자칫 잘못 이해하면 세상사 다 부질없으니 대충대충 살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실은 우리가 오늘 애집하고 있는 일들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전도서가 가르치는 '헛됨'을 불교가 가르치는 '공空(sunyata)과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전도서의 저자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지혜, 즐거움, 수고, 우정, 승진, 부유함, 권력 등이 다 무상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세월과 함께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대충대충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나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다가"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는 염세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보지 않습니다. 그는 복잡다단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을 꿰뚫어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9). 이 말은 세상이 그러하니 억울하다고 불퉁거리지 말고 팔자려니 하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뭔가 잘못된 것은 분명한데 현실은 그렇게 도착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를 칭찬합니다. 평소에 그가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말입니다. 그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허탈하다고 말합니다. 악인은 악인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가 권세가 있을 때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해도 죽어서까지 칭송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칭찬합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분별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세상은 고장난 세상 혹은 병든 세상입니다. 문제는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마음에 자기 마음을 조율해가는 데서 발생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와 착각으로 손상되지 않는 절대무의 지점, 순수한 진리의 지점, 우리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면서 이 순수한 지점을 "하나님이 홀로 꿰뚫고 들어오시는, 정신에 있는 최종적이며 나뉘지 않는 비밀스러운 중심점"이라고 말합니다(신시아 부조, <희망의 신비>, 김형욱 번역, 비아, 2015년 8월 4일, p.51-53). 쉽게 말하면 인간 속에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걸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들은 납작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전도자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 세상사, 허망하구나
그런 삶의 기준이 흔들리면 사람들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서슴지 않고 죄를 저지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등 돌림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하던 뱀에게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기 한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스스로 전능해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죄의 뿌리입니다. 죄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죄는 독점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만 정향된 사람은 이웃의 절실한 아픔도 사소한 에피소드로 취급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짓는 까닭은 벌이 바로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심판과 보응이 따른다면 누가 감히 쉽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가끔 우리도 악인들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소망은 행위에 따른 공정한 보상이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적절한 보상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실패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자는 그러한 통념은 작동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정직하게 말합니다. 그러한 통념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적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편 시인도 그런 마음을 담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악인이 당하는 보복을 목격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악인의 피로 그 발을 씻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이 '과연, 의인이 열매를 맺는구나! 과연,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말하게 해주십시오."(시58:10-11)
그런데 현실은 악인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고,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일제 시대에 적극적으로 친일행적을 벌인 이들의 후손은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여전히 곤궁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악인들이 형통함을 보고 히브리의 다른 시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시73:4-5)
이쯤 되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분명코 봄이로구나/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다"('사철가' 중에서) 하고 노래할 때의 존재론적 쓸쓸함이 아니라 전도된 인간 현실이 빚어내는 씁쓸함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탄식을 해보아도 현실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꾸만 지치고 맙니다. 여전히 악인들이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불의와 싸우다가 실패해도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이 사실을 굳건히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명랑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한껏 즐길 수 있습니다.
•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의 모든 일을 깊이 살펴본 지혜자는 사람들에게 생을 즐기라고 권합니다.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사 어찌 되었건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정말 복잡한 세상사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즐기라는 말일까요? 악인들이 번성하는 세상에 질끈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듯 자기 쾌락에만 몰두하며 살라는 말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그런 싸움에 지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악인들이 번성한다고 하여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조급증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고, 급기야는 자기 파멸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잘 싸우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잘 돌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삶의 나날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이 지금도 우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지금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에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악인들이 벌 받고 선인들이 복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상식은 자꾸만 무너집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할 때 중요한 것은 '지금'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질문>은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만나고 있는 상대에게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어찌 보면 시시한 교훈입니다. 하지만 이 속에 심오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전체적인 전망이 불투명할 때 사람들은 자꾸 비틀거립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오롯이 현재에 충실해야 합니다. 현재는 우리 인생 전체에서 보면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영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시해보이는 현재야말로 영원의 섬광과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 영원한 지금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년-1965년)는 그것을 일러 '영원한 지금'이라 일컬었습니다. 영원한 지금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과거에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미래를 향하여 도피하기 때문에 현재에서 휴식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우리에게 현재의 축복을 주는 영원한 휴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폴 틸리히, <永遠한 지금>, 대한기독교서회, 현대신서46, 김경수 번역, 1976년 3월 15일, p.140)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특색은 '지금'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기쁨을 유보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살면서도 과거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삶에 대한 후회, 누군가에 대한 원망,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힌 이들은 지금 이곳에서 주어지는 기쁨을 누릴 능력이 없습니다. 행복을 미래로 유보해놓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만 들어가면, 넓은 집을 장만하면, 노후 생활을 위해 10억원만 모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자기를 채근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즉 생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전도서의 기자는 그 모호한 생에 사로잡혀 불퉁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지금을 한껏 살아내라고 가르칩니다.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주저없이 행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영원의 빛 가운데서 지금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서 보화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이웃의 얼굴에서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발견하기 어렵거든 여러분 자신이 누군가의 보화가 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b)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3:13) 하고 권고했습니다. 인생은 오늘의 점철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 인생 전체가 보이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늘 기뻐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내 숨을 쉰다 (0) | 2015.08.19 |
---|---|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0) | 2015.08.19 |
주님 안에서 남은 없습니다 (0) | 2015.07.29 |
이웃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 (0) | 2015.07.29 |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입니다 (0) | 2015.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