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삿6:11-16
[주님의 천사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땅 오브라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다. 그 때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기드온이 그에게 되물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기드온이 주님께 아뢰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반복되는 역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인 오늘은 동시에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이기도 합니다. 긴긴 세월 동안 우리는 분단체제 가운데서 살아왔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세월의 두 배에 해당합니다. 여전히 통일의 길은 멀기만 하고, 남북 상호간의 신뢰 구축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갈등 속에서 대화를 포기한 사이 주변정세는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중국은 초강대국으로 거듭나서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높여가고 있고, 일본은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반 국가가 되기 위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품고 오늘의 본문과 만나보겠습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영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위해 분투하던 시대의 기록입니다.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그들은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각자 생존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지파 동맹체가 뭉치기는 했지만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없기 때문에 강력한 국가로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하시고 당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백성들을 돌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사士師 혹은 판관判官이라 일컫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외부의 침입을 받았을 때 사람들을 모아 물리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화시에 사람들 사이에 분쟁과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사사 시대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갈리지 않았던 아주 흥미로운 시대입니다. 국가가 세워지려면 상비군과 관료제도가 필수인데 사사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터키 땅인 고대의 이오니아 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실험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지배계급이 없이 시민들의 협의에 의해 사회를 운영했던 그 정치제도를 이소노미아(isonomia)라고 말합니다. '무지배'라고 옮길 수 있는 말입니다. 사사기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소노미아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의 이야기 구조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민들의 문화나 종교에 동화되어 야훼 신앙을 버리려 할 때면 하나님은 매를 들어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 고통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구원자를 일으켜 세워 그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평화가 정착되어 여러 해가 지나가면 백성들은 또 죄 속에 빠져듭니다. 일종의 악순환입니다. 오늘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은 기드온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자 하나님은 일곱 해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유목민이었던 미디안 사람들에게 그들은 만만한 먹잇감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무엇보다도 생존의 위협을 크게 받던 이들인지라 가족들과 더불어 살아남기 위해 하는 '약탈'을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그들을 피하려고 산에 있는 동굴과 요새에 도피처를 마련해두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가축까지 몰고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존의 터전을 유린하곤 했습니다. 온 땅의 소산물을 망쳐놓고 곡식은 물론이고 가축까지도 다 약탈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예언자 한 사람을 보내셔서 백성들의 죄가 무엇인지 소상하게 밝혀주셨습니다.
• 회의에 빠진 용사
이제는 기드온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어느 날 주님의 천사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땅 오브라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습니다. 상수리나무는 종교학에 등장하는 '신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인들은 땅에 뿌리를 박은 채 하늘로 줄기를 뻗는 나무를 하늘과 땅의 소통의 통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무 가운데 특히 장대한 나무를 신성하게 여겼고, 신의 뜻을 묻는 장소로 삼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다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때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포도주 틀은 대개 지층보다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을 건넵니다.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12). '힘센 장사'라고 옮겨졌지만 그건 부분적인 번역일 뿐이고 내용적으로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겁니다. 숨어서 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용감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가슴에 품고 있던 생각을 드러냅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13)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장엄한 역사를 이루신 것은 그저 과거의 이야기일 뿐, 지금은 작은 기적조차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압박을 받으며 사는 오늘의 현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은 늘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하나님이 내게 이런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셨냐고 대들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자기가 겪는 고통과 아픔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공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 소명
"주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14)
무심히 들으셨겠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가지 변화를 봅니다. 지금까지 기드온에게 말을 건넨 것은 주님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14절부터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제1성서(구약)에서 주님의 천사와 주님은 구별없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에게 소명을 주시는 분이 주님으로 표상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친히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소명 부여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는 대목입니다. 강렬한 바라봄입니다. 새로운 빛을 기드온의 가슴에 불어넣어주는 눈빛입니다. 눈과 눈의 마주침이야말로 신뢰의 통로입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주마. 너를 눈여겨 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시32:8) 하신 말씀에 강렬하게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의 바라보심은 '보호'에 대한 약속이고, '힘을 불어넣으심'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눈길에 부딪힌 사람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해맑은 빛이 흐르고/내 가슴 지나는 바람 모두 따스한 향기 머금게 하소서"(김창남 작사, 문승현 작곡,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그 눈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20:22) 하고 말씀하실 때의 그 숨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숨을 받은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용서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세상을 새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일 겁니다. 아픔을 느끼는 바로 네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속에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기 위해 주시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라 이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있는 것을 요구하시지 없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믿는다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이지혜 옮김, IVP CLF, 2011년 1월 17일, p.78-79). 옳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십시오. 택배 기사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아파트 경비원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이들을 진심으로 아끼며 지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기드온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에게 속한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다만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 뿐입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드온은 여전히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는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미약한 가문에 속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아무것도 아닌 이들을 택하셔서 제 잘난 맛에 사는 이들을 없애시는 분인 걸 압니다(고전1:27-28). 그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세상에 보내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힘입니다.
• 바알의 제단을 허물다
이제 기드온의 마음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새끼 염소를 잡아 요리를 하고, 빵도 구워 상수리 나무 아래에 있는 천사에게 가져갑니다. 그러자 천사는 고기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을 그 위에 부으라고 이릅니다. 주님의 천사가 지팡이 끝을 그 음식에 대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서 모든 것을 태워버렸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의 천사는 그의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기드온은 마침내 자신이 주님의 천사와 대면하였음을 깨닫고 두려워합니다. 기드온은 거기에서 주님께 제단을 쌓아바치고는 그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가져다 주실 하나님이 자기 곁에 현존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 밤에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아버지의 집에 있던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 그곳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잘라낸 아세라 목상을 불쏘시개로 삼아 번제를 바쳤습니다. 이것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상징합니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갈2:20)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과거의 인력을 끊는 데서 시작됩니다. 기드온은 그러한 철저한 단절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사막 부족들이 자기들의 지경을 침입하자 그는 떨쳐 일어나 이스라엘을 지켜냈습니다. 포도주 틀 속에 숨어 밀이삭을 타작하던 사람이 '힘센 장사'라는 칭호에 걸맞은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지금 기드온과 같은 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분단의 질곡에 더하여 물신주의와 소비주의의 망령이 사람들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귀신이 들어간 돼지떼처럼 비탈길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70년 전 일제 식민지로부터는 벗어났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광복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의 본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조상에게 바쳐야 할 당연한 예라고 이야기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듭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말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단 한번 만이라도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에 찾아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정신의 식민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고도 또 멉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라'고 이르십니다. 분단을 영속화시킴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물신주의의 망령을 자꾸만 일깨우는 사람들과 싸우라고 이르십니다. 우리 힘은 미약하지만 그 힘이 하나님께 봉헌될 때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루어내시리라 믿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한 길 위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처방 (0) | 2015.08.19 |
---|---|
나는 내 숨을 쉰다 (0) | 2015.08.19 |
삶의 모호함을 견디라 (0) | 2015.08.19 |
주님 안에서 남은 없습니다 (0) | 2015.07.29 |
이웃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 (0) | 2015.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