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숨을 쉰다
사57:14-21
["내가 말한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이제 내가 말로 평화를 창조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 평화가 있어라." 주님께서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고쳐 주마." 그러나 악인들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서 고요히 쉬지 못하니, 성난 바다는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아 올릴 뿐이다. 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 동행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교회 마당에 나가 있다가 거리를 걷는 이들을 보면 문득 뭉클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걸음의 끝에는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만남은 그들의 영혼에 어떤 무늬를 만들어낼 겁니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새겨지는 무늬가 그 사람의 영혼의 풍경을 만들 것입니다. 저는 무심코 각자가 걸어가는 그 길의 끝에서 아름다움과 만나게 해달라고 화살기도를 올립니다. 세상에는 다른 이들 앞에 걸림돌을 만들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치우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길 없는 곳에 길을 내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길이 되셨습니다. 사람을 가르고 나누어 소통하지 못하도록 하는 온갖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장벽들을 당신의 몸으로 무너뜨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말한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14) 그 백성이 걷는 길은 본토로 귀향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들은 한때 우상에게 팔렸던 이들입니다. 자기들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이 신들의 노여움 때문이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하고, 도무지 열리지 않는 인생의 문을 열어줄까 싶어 우상 앞에 절하며 살던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우상은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순간 사람은 이웃으로부터도 멀어집니다. 이중적 소외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한 고통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왕정으로의 복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의 돌아감을 통해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을 없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 광활한 우주 가운데서 티끌만도 못한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분입니다. 우주는 얼마나 큰 것입니까? 최근에 지구와 기후 조건이 가장 유사한 행성 하나를 발견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 행성은 지구로부터 1400광년이나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걸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로 바꾸면 1경 1천 2백 54조km가 됩니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숫자입니다. 우리 각 개인은 우주의 먼지보다 더 작습니다. 우주의 역사에서 보자면 우리들의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15)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 크고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작다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무시하시기는커녕 세상에서 짓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 즉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과도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북돋우십니다. 또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십니다. 회개는 돌이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기 마음을 자꾸만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성 크리소스토모스는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구원의 약, 부상당한 이들의 치료제, 불의의 척결, 하느님을 향한 용기, 사탄에 대항하는 무기, 구원의 희망, 그리고 절망의 제거입니다. 회개는 하늘을 열어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해주고 사탄을 이기게 해줍니다."(요아니스 알렉시우 대사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정교회출판사, 2014년 4월 20일, p.46)
• 인간의 죄성
하지만 인간은 좀처럼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이 악에게 끌리는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이란 소유를 통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인간의 탐욕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탐욕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욕망입니다. 특히 탐욕을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경제질서 하에서 탐욕에 저항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을 가리켜 보이면서 추파를 던집니다. 그 멋진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돈의 유혹에 빠지면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구는 자원이 되고, 우리의 시간은 '노동'이 되고, 우리의 관계는 이용해야 할 '연줄'이 됩니다."(데이비드 로이,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불광출판사, 2012년 2월 28일, p.49)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확장의 욕망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공에의 집착입니다. 사람들이 성공에 집착하는 것은 우선은 남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싶은 숨은 욕망 때문입니다. 적당히 커지는 것은 복이지만 지나치게 커지는 것은 화입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요즘 우리는 성서학당을 통해서 에스겔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두로와 애굽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두로의 죄는 무엇입니까? "너는 무역을 해도 큰 지혜를 가지고 하였으므로, 네 재산을 늘렸다. 그래서 네 재산 때문에 네 마음이 교만해졌다."(겔28:5) 그들은 재산이 늘어나면서 스스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거렸다는 것입니다. 돈은 인간에게 '유사 전능성'를 부여합니다. 돈이 많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영화를 더럽히고 그들을 구덩이에 던지겠다고 말입니다.
애굽의 죄는 무엇입니까? 에스겔은 애굽을 나무에 빗대 설명합니다. 애굽은 마치 물가에 심겨 높게 자란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키가 커지고,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뻗치면서, 키가 커졌다고 해서, 그 나무의 마음이 교만해졌다"(겔31:10)고 말씀하십니다. '커짐'이 '교만'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무를 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겔31:10-11).
하나님은 탐욕에 사로잡혀 자기 본분을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치시고,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채 제 마음 내키는대로 살았습니다. 미욱한 인간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돌이킬 줄 모릅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살면서 깊은 허무의식에 사로잡힌 히브리의 한 시인은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시73:13) 하고 탄식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간 후에 비로소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시73:21-22). 깨달음이 없으면 우리는 교만에 사로잡히거나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 의지
그러나 새 삶의 가능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드신 피조물을 아끼시는 분입니다.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16)
하나님은 당신의 작품인 사람을 아끼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아끼심 덕분에 존속됩니다. 우리는 요나 이야기를 잘 압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채 달아나던 그는 결국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니느웨로 가서 외칩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참회했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런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해서 불퉁거립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고는 성읍을 빠져나가 성읍 동쪽에 머무르면서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의 운명을 지켜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박 넝쿨 하나를 자라게 해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게 해주십니다. 요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벌레 한 마리가 나뭇잎을 갉아먹자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습니다. 찌는 듯한 동풍이 불고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자 그는 또 다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즉각 대답합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점잖게 책망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 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4:10-11)
요나서의 핵심은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끼심'이 우리 생명의 근거입니다. 호세아는 그런 주님께로 돌아가자며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호6:1).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잘 아시지만 하나님은 "나는 그들을 고쳐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18)고 다짐하십니다. 이 사랑이, 이 약속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에게 실패자라는 찌지를 붙여도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가끔은 하나님을 등지고 어둠 가운데로 가기도 하는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아주 포기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이 평화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꾸만 돌이켜 그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 악인들의 운명
하지만 악인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려 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잘못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 확장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한자로 '악惡'이라는 글자는 무덤을 그린 '아亞' 자와 마음 '심心'이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은 누군가를 무덤으로 이끌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지만, 죄의 악순환 속에 빠진 이들은 그 형상을 다 잃어버린 채 세상을 떠돌게 마련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들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서 고요히 쉬지 못하니, 성난 바다는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아 올릴 뿐이다."(20)
악인은 고요히 쉬지 못합니다. 뒤집어 보면 고요히 쉬지 못하는 이들이 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안식을 명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자기를 맡기려 하지 않을 때 우리 속에서 거친 것이 나옵니다. 안식이란 자기 숨을 쉬는 것입니다. 평화노래꾼인 홍순관 집사의 노래 가운데 '나는 내 숨을 쉰다'가 있습니다. "숨 쉰다 숨을 쉰다/꽃은 꽃 숨을 쉬고/나무는 나무 숨을 쉰다//숨 쉰다 숨을 쉰다/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숨 쉰다 숨을 쉰다/별은 별 숨을 쉬고/해는 해 숨을 쉰다//숨 쉰다 숨을 쉰다/바람은 지나가는 숨을 쉬고/신은 침묵의 숨을 쉰다/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 그는 '제 숨'을 쉬며 사는 생명이 평화라고 말합니다. "종교의 숨이 거짓이 되면 세상은 깊은 상처를 받고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된다. 신자의 숨이 가식이 되면 이웃은 멀어지고 하나님은 세상에 통로를 그만큼 잃어버리게 된다." "숨죽이게 하는 세상에 내 숨을 떳떳하고 고요하게 쉬는 것은 아름다운 저항이다"(홍순관, 미간행 저서 원고 중에서).
여러분은 지금 자기 숨을 잘 쉬고 계십니까? 현실은 우리 숨을 가쁘게 만들지만, 가끔은 내가 자기 숨을 잘 쉬고 있는지 자꾸만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끝없이 우리와 다투지 않으시는 분에게 우리 마음을 집중할 때 우리 숨은 가지런해질 것입니다. 무더위가 절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부는 하늘의 서늘한 바람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 이야기 (0) | 2015.08.19 |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처방 (0) | 2015.08.19 |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0) | 2015.08.19 |
삶의 모호함을 견디라 (0) | 2015.08.19 |
주님 안에서 남은 없습니다 (0) | 2015.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