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실수도 하고 잘 챙기지 못하여 큰 실수도 한다.
황우석 박사의 경우도 고의성을 가진것은 아니다. 부인과 이혼할 정도로 일에 미친 사람이다. 이 사회는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 한탕주의가 위험하고 경계 대상이지 일메 미친 인재를 키워주어야 한다. 일을 위해 속인다면 속아줄줄도 알아야한다.
인사가 만사고 인재양성이 21C의 목표가 되어야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있고 자원은 없다.
남북 갈등, 동서 갈등, 좌우 갈등, 세대 갈등, 빈부 갈등.... 우상숭배, 점쟁이들의 난립,
수 많은 낙태, 아동 수출.....................말할수 없는 문제를 안고 하루를 보내는데 뉴스는 스트레스의 주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사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대접받기를 원하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
"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
자신있게 돌을 들어 칠 정도로 죄없는 사람이 있는가? 완전한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은 정죄할수있는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었지만 죄지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았고, 돌로치지 않았고 용서하였다. 야단법석인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용서와 사랑이 없이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수없다. 정치도 경제도 기술도 문화도 이 문제를 해결할수없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를 하되 7번정도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였다.
그 당시 유대의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예수 믿는 사람은 몇번 정도까지 용서하면 되는지 궁금했고
큰 마음으로 7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 대답은 70번식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예수님의 마음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하고 구하여야
하고 실천할수 있도록 노력하여야한다.
베드로가 7번정도면 엄청나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완전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베드로에게는
정말 큰 용서이었다. 베드로는 어부 출신이고 성격이 과격하고 화부터 먼저내는 사람들중 한사람이었고 고함을 치놓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7번 을 참고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말씀을 하셨다. 하루에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었다. 결국 회수에 관계없이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시다.
우리는 생각해볼때 불가능한 말씀이다.
우리는 소극적인 용서는 할수있었다.
즉 나는 너에게 보복은 하지 않겠다는 정도의 용서이고, 내가 용서하지만 너의 언행을 결코 잊지는 않을 것이다는 용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는 마치 잊어버린 사람처럼 없었던 일 처럼 여전히 친절하게 사랑으로 대해주는 그런 적극적인 용서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모세를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처음과 같은 십계명을 주셨다. 이후 십계명은
궤에 보관되어 이스라엘의 여정 길에 함께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관대하심은 지극히 크신 것이었다.
용서는 사랑의 핵심적인 요소로 우리의 필수적인 덕목이라 하겠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는 용서의 과정이듯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런데 용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용서한 후에는 처음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처음과 같이 다시 십계명을 주셨듯이 말이다. 그만큼 용서는 어떤 앙금도 남기지 않는 깨끗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처음과 같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온전한 용서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를 용서해야 행복해질것이다.
부모를 용서하고 자녀를 용서하고 형제자매를 용서하고 친족을 용서하고
친척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해야 행복해진다.
용서를 할려면 예수님 처럼 용서해야한다.
예수님의 용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든다.
예수님의 용서의 의도도 회개하게하는것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변함없이 사랑하고 친절히 대한다면 그 사람은 감동을 받아 회개할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거머리와 같다.
거머리는 옛날에 모심기 할때 다리에 붙어 피를 빨아 먹는것을
시골 출신은 모두 경험하였다.
한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고 자꾸 파고들어간다.
미움과 분노도 거머리 같이 한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래두면 생명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깊이 파고든다.
만약에 잡아땅기면 박힌 머리는 그대로 있어 독이 된다.
그래서 저절로 빠져나가게 해야한다. 그 좋은 방법은 불로 때어낼수있다.
그리고 특수한 풀물로 목욕하면 가능하다.
그냥하는 경우 성공율은 15%정도라고 한다.
소금으로 하면 50%정도 성공율이 있다고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성령의 뜨거움으로, 충만으로 때어낼수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에 목욕하는 수밖에 없다.
결혼 80쌍중에 40쌍이 이혼하는 현실과 자살율 증가 현실과 가정폭력 현실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할때 옳은 잔소리
정도로 듣고 자기 생각데로 행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십자가는 가는곳마다 눈에 보인다. 그러나 용서의 십자가를 알지못함으로
더욱 그러하다. 용서의 복음이 이 사회에 충만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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