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깊이
롬8:26-30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유한한 인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인 동시에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존 웨슬리 회심 28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24 절기로는 소만에서 망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차오르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생명의 기운이 차오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다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언에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얼떨떨한 중에 떠오른 단어가 ‘평화에 이르는 먼 길’이었습니다. 평화는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나 분단 상황을 통해 이익을 얻는 미국의 네오콘들이나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하는 일본, 이 땅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은 중국,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상황을 지속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남북정상의 만남을 통해 평화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할 길이 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슬아슬한 평화를 안정된 평화로 키우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울면서라도 평화를 파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겁니다.
평화는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납니다. 카메라는 강화도 교동의 시장거리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알콩달콩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이 정겨웠습니다. 제비도 부지런히 처마 밑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제비가 여기에 집을 짓는 게 싫지 않으세요?”
“왜요, 좋지요.”
“똥도 싸고 그러면 귀찮지 않나요?“
“제비집 밑에 나무 받침대만 대주면 문제 없어요.”
별 것도 아닌 그 일상적인 풍경이 제게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할머니는 비록 미물이라 해도 함께 살아갈 이웃, 적적한 인생에 찾아온 손님으로 대했습니다. 제비가 흥부에게 물어다 준 박씨 따위는 그분의 관심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다큐를 보면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결국 저 마음 하나 얻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배웠다 하면서도 생명의 존엄을 알지 못하는 이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무정한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학식이 더 나은 사람됨과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사람은 만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삶이 각박합니다.
노르웨이의 시인 울라브 하우게는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라는 시에서 눈이 춤추며 내리는 날 나무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눈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나무가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이 다가오자 시인은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가지에 쌓인 눈을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주었습니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온몸에 눈을 맞“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인간 본연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마음을 많이 잊고 삽니다.
∙ 성령의 간구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낯선 사람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욕망의 범람을 통제하지 못하고, 감정 또한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알량한 지식도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앎도 욕망과 이해관계에 따라 뒤틀려 있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이것을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9)라는 수사 의문문을 통해 드러낸 바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똑같은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7:15)
이런 정직한 자기 인식 혹은 자기 응시야말로 우리를 은총의 세계로 이끌어줍니다.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잘 활용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기획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번번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곤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예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럭저럭 사는 일에 익숙하게 됩니다. 지향해야 할 목표가 보이지 않을 때 삶은 무기력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도 보지만 정작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방향을 잃은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8:26)
삶이 권태롭다고 느낄 때 또는 삶이 너무 힘겨워 살아갈 용기를 잃을 때, 느닷없이 닥쳐온 시련으로 인해 망연자실할 때, 성령은 이미 우리 속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의 어둠 속에 서성이다가도 어느 순간 희망의 빛을 향해 몸을 일으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있다가도 몸을 일으켜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서 간구하고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 덕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드리는 성령님의 그런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창4:10). 광야로 쫓겨난 하갈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창16:11). 또 소돔과 고모라에서 터져나오는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창18:20),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출2:24). 하나님의 들으심은 언제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이들을 심판하시고, 연약한 이들은 구원하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잇대어 있는 희망의 뿌리입니다.
∙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신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성서에서 일관되게 증언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낱낱이 살피시는 분”(시7:9)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생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심장과 콩팥입니다. 옛 사람들은 심장이 인간의 생각과 결단을 관장하고, 콩팥은 감정과 양심을 주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기 하나 하나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마음을 헤아리시는“ 분(잠24:12)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대신 강구하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가끔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잔인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습니다. 뜻하지 않은 운명의 타격으로 비틀거리는 이들을 보면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설명할 수 없는 일로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생의 잔인함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고도 살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가끔은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탄식시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 마주치는 단어들은 ‘어찌하여’와 ’언제까지’입니다. 이성적 판단이 정지되고, 경험이 더 이상 우리 삶을 지탱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받침대조차 없는 생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허청거릴 때 주님은 우리를 포근히 감싸 안으십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이 확신 위에 확고히 설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8:28)
이 말은 아무런 시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책상머리에서 떠오른 생각을 그럴싸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시련과 박해를 감내한 사람의 말입니다. ‘모든 일’ 속에는 좋은 일도 있지만, 쓰린 일, 불쾌한 일, 낙심되는 일,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 다 내포됩니다. 사실 잊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잊었다 생각해도 아픔의 흔적조차 지워지지는 않기에 우리는 내면에 피를 흘리며 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경험을 부둥켜안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을 부정적인 경험으로만 자꾸 셈하면 삶이 무거워집니다. 차라리 그것을 더 나은 삶을 향한 디딤돌로 삼아야 합니다. 이슬람의 신비주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여인숙’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생은 여인숙(旅人宿)
날마다 새 손님을 맞는다.
기쁨, 낙심, 무료함,
찰나에 있다가 사라지는 깨달음들이
예약도 않고 찾아온다.
그들 모두를 환영하고 잘 대접해라!
그들이 비록 네 집을 거칠게 휩쓸어
방안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슬픔의 무리라 해도, 조용히
정중하게, 그들 각자를 손님으로 모셔라.
그가 너를 말끔히 닦아
새 빛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어두운 생각, 수치(羞恥)와 악의(惡意)가
찾아오거든 문간에서 웃으며
맞아들여라.
누가 오든지 고맙게 여겨라.
그들 모두 저 너머에서 보내어진
안내원(案內員)들이니.
(루미, [루미 詩抄],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선우, 1999년 6월 1일, p.19-20)
평범한 사람들이 모든 일을 고맙게 여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경험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용광로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실 주님의 은총을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때, 하나님은 그 나쁜 재료를 가지고 선한 것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구원의 신비
바울은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그들을 의롭게 하시고,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언어 속에 담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롬8:29)
성령은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고, 하나님은 그 생각을 헤아리시면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시는 동시에 그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예수적 삶의 길로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적 삶이란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불어넣어주셔야 합니다. 예수의 형상이 되라고 부름 받은 이들은 세상에서 생명을 풍부하게 하는 일과 평화를 일구는 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영화로움이란 사람들 가운데 높임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사는 이들은 이미 영화로움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늘 우리 안에 내주하여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을 꿰뚫어보시며 우리를 보살피시고, 예수 그리스도적 삶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부르심과 이끄심에 기꺼이 응답할 때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로 살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회심 체험은 바로 그런 은총에 눈을 뜨는 일이었습니다. 은총에 눈을 뜨면 비록 무거운 삶이라 해도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가끔 고된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점차 생장하며 충만해지는 소만 절기에, 우리의 마음 또한 믿음으로 든든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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