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다

천국생활 2018. 6. 20. 16:22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다
마8:23-2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고서 말하였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 예수를 따라 걷는 길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방 선거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거기에 쏠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한 주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敬天愛人하는 사람들이 선출되고, 평화의 새 시대가 우리 앞에 열리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농부들은 조용히 들에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세상사이지만, 세상이 그런대로 유지되는 것은 늘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이들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늘 비상한 일에 관심이 많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야말로 우리 삶의 근본입니다. 생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라는 게 있습니다. 신체 내부의 체온이나 화학적 성분 등이 평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항상성이 깨지면 몸에 문제가 생깁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 하고, 쉬고, 친교하는 우리 일상의 일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가끔 그런 리듬이 깨질 때도 있지만, 결국은 다시 그 리듬 속으로 들어가야 삶이 건강해집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도 실은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기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야 사람은 자기의 본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세상에 사느라 거칠어졌던 우리 호흡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지런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이 위치한 맥락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산상수훈에는 예수 운동의 특징인 비폭력적 저항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와 그 체제에 부역하는 이들이 다스리는 현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체제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들을 수단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현실의 어둠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른 세계를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부드럽고 온유하지만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그들이 세상을 밑바닥부터 바꿉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급진적입니다.

산상수훈에 이어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다양한 치유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며 엎드린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고,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셨고,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마을에 있는 온갖 병자들이 주님을 통해 나음을 입었습니다. 생명의 온전함이 회복된 이 사건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인 동시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표징이었습니다. 마태는 그 치유 사건들을 소개한 후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8:17)

이 치유 이야기에 이어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자발적으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심으로 그 길이 고달픈 길일 수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제자에게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의욕이 앞선 사람은 조금 눌러주고, 자꾸 뒤로 물러서는 사람에게는 결단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 큰 풍랑
오늘의 본문은 주님을 따라 나선 이들이 겪게 될 시련을 암시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 일행이 바다를 건너려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고단하셔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뒤덮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물론 갈릴리 호수를 일컫는 말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며 살아야 할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은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큰 풍랑은 제자들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큰 시련을 뜻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세상을 떠돌며 복음을 전하던 이들이 어떤 위험과 맞닥뜨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이들을 가리켜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행17:6)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these men who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이라고 옮겼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온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이 체포되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혔을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사주를 받은 변호사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며 하는 이야기도 전형적입니다.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행24:5).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바울은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어떠합니까? 세상 질서에 순응할 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뿐 박해를 받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당연지사로 여기는 일과 가치들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남과 경쟁해서 어떻게든 이기려 하고, 호사스러움과 편리함을 추구하고, 자식들에게 부를 대물림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수를 피하여 달아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신다고 믿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땅, 그리고 이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대하고 아껴야 합니다. 미세 먼지로 흐린 하늘, 농약과 제초제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땅, 흐르지 못해 녹색으로 변한 강, 비닐이 널려있는 들판, 산처럼 쌓이는 쓰레기, 병들어 죽어가는 동물들, 생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 하셨던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세상을 새롭게 빚으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쉽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풍요로움을 말할 때 절제를 말하는 사람들, 세상이 혐오감을 드러내고 수치심을 안겨주려는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려 하는 이들, 창조세계를 보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큰 풍랑 앞에 선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게 마련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당황할 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 주님을 깨우다
제자들은 무기력했습니다. 추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컸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던 그들의 꿈은 위태롭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큰 풍랑 앞에서는 바다에서 삶을 이어온 경험 많은 어부들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잠들어 계신 주님을 깨웁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 정직한 부르짖음이 그들을 살게 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위급한 순간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교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그 그림이 있습니다. ‘갈릴리 풍랑 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파도가 어찌나 심한지 뱃머리가 높이 들려 있습니다. 뱃머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배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돛을 붙잡은 이도 있고, 돛과 돛대를 지탱하는 줄을 잡은 이도 있습니다. 배의 중앙에는 몸을 웅크린 채 숨을 곳을 찾는 사람과 불안한 듯 밖을 조심스레 살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옆에는 푸른 옷을 입은 사람도 보이는 데 그는 오른손으로 돛 줄을 잡고 왼손으로는 모자를 덮어 누르고 있습니다. 위급한 순간에도 자기 것을 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그린 것인데, 그 얼굴은 바로 렘브란트 자신의 얼굴입니다. 이물에는 겁에 질린 사람과 배 멀미를 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예수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 그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배의 후미에서 키를 잡고 있는 사람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님만이 평온을 누리십니다. 이건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풍경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인물들 가운데 어떤 사람입니까?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먼저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이어서 주님은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가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일어나다’와 ‘꾸짖다’가 그것입니다. 일어나다(egeiro)는 대개 어떤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일어서는 동작을 의미하지만, 아주 드물게는 부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꾸짖다(epitimao)라는 단어는 귀신 축출 이야기에 자주 등장합니다. 일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오직 거룩한 영, 깨끗한 영만이 악한 영을 꾸짖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연약한 이들을 삼키려 드는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합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긴 했지만 사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강력한 증언입니다. 제1성서에서 하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분으로 자주 소개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 107편과 65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107:28-30)
“주님께서는 바다의 노호와 파도 소리를 그치게 하시며, 민족들의 소요를 가라앉히셨습니다.”(시65:7)

곤경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을 구하시는 하나님, 폭풍과 물결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분이 누구이기에…‘라는 표현은 바로 시편의 이 구절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우리 가운데 큰 풍랑 앞에서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까? 마치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 듯 헤어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인생의 어둔 시기를 지나는 이들이 있습니까?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혼돈 속에 빠져 낙심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 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속에 잠들어 계신 주님을 깨우십시오. 주님께 우리 속에 일고 있는 절망의 바람을 잠재워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일어나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셨던 주님이 우리를 새로운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 봐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세상과 불화하며 사는 게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일부러 불편한 삶을 선택하고, 절제하며 사는 것이 부질없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 씨를 심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L.A 연합감리교회의 이창민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다가 영어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You may do that.”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목사님은 1955년 미국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에서 벌어진 일을 소개합니다.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로자 팍스(Rosa Parks)라는 아프리카계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몹시 지쳐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운전기사가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로자가 그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자 운전기사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때 로자가 한 말이 “You may do that“입니다. 결국 로자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덱스터 침례교회의 담임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중심이 되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이면서 흑인 민권 운동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창민 목사님은 그 현장에 다녀온 소감을 전하면서 이렇게 글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하고 살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던져질 때도,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질 때도,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때도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이 고백의 중심에는 어떤 형편에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부당함에 맞서는 사람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굴복되지 않는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이들, 고난과 박해를 받아들이면서도 끝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믿음의 눈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이들을 통해 조금씩 발전합니다. 절망의 큰 풍랑이 우리를 휩쓸지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능히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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