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요나는 도처에 있다

천국생활 2018. 6. 25. 08:26

요나는 도처에 있다
욘4:5-11
 

[요나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 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큰 성읍 니느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의 거울이 되어줄 인물은 요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싫어했던 문제적 인물 요나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나가 말씀을 선포해야 했던 니느웨는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큰 성읍’이라 일컫습니다. ‘크다‘는 표현은 일차적으로는 도시의 규모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큰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규모가 크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이들의 욕망이 다양하다는 말일 것이고, 욕망이 다양하다는 말은 사람들이 갈등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고,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개입할 때가 많다는 말일 겁니다. 옛 사람들은 ‘和而不同’을 좋은 사회의 표지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다양성은 질서를 깨뜨리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고, 따라서 힘이 있는 이들은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이들을 폭력적으로 동화시키는 길을 택하곤 했습니다. ‘同而不和‘의 상황인 셈입니다. 니느웨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억압과 착취가 일상이 된 니느웨를 차마 두고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보내 경고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적대국가인 아시리아에 가서 말씀을 전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나라는 망해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망할 나라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가 그들이 회개하기라도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징계를 철회하실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요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 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알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부분에 지나지 않는 자기의 앎을 전부인양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우매함입니다. 일단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부재하는 장소가 있을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그는 그 도피가 주는 쓰라림과 두려움을 화피하기 위해 배 밑창에서 잠을 청합니다. 하지만 큰 풍랑이 일었고, 배는 파선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뱃사람들이 자기들의 경험을 다 동원하여 배를 구해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는 바다에 던져졌고, 물고기에 삼켜졌으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살아나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둘러보는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성읍이었는데, 그는 겨우 하룻길을 걸으며 외쳤습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어떤 열정도 아픔도 분노도 보이지 않는 맨숭맨숭하고 차가운 선포였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쩌면 외치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이 아무도 자기 말에 주목하기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어떤 일을 이루십니다. 그 열정이 없는 말이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즉시 그 말에 반응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 소문이 왕에게 들어가자 왕도 의자에서 일어나 임금의 옷을 벗고 베옷으로 갈아입은 채 잿더미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무 것도 먹지 말 것이며, 다 베옷을 걸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 그릇된 선민 의식
어떻게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국가적인 회개가 이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다면 세상은 이미 천국으로 변했을 겁니다. 우리는 사람이 조금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고래 힘줄보다 질긴 자아를 극복하는 데도 평생이 걸리는데, 참회가 이렇게 쉽게 일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나서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니느웨의 이러한 회개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적 인물인 요나를 통해 우리의 실상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멸망의 벼랑 끝에 있던 니느웨가 기사회생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잘 됐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자기가 다시스로 달아나려 했던 것은 이런 결과를 예측했기 때문이라면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고 불퉁거립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청소년 시기에 아이들이 부모를 괴롭히기 위해 주로 사용하던 언사가 이런 것 아닙니까? 요나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자입니다.

요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요? 요나가 느낀 불쾌함의 뿌리는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도 구원하여 주신다는 사실에 닿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민인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선민으로서의 자기들의 특권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는 흥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 편이셔야 한다는 생각은 편협한 믿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옹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닿아 있음을 믿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 혹은 우리만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요나는 부족적 신앙(tribal faith)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요나는 그 사랑과 자비와 인내가 민족적 울타리 안에서만 작동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요나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라며 요나의 좁은 생각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음으로 자기 속에 들끓고 있는 분노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성읍의 동쪽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립니다.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일인 시위인 셈입니다. 집요하고 완고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의 모습을 보고 대노하실 법도 하건만 유머러스하게 대해주십니다. 박 넝쿨이 자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서늘한 그늘이 그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하나님은 벌레 한 마리를 보내셔서 그 박 넝쿨을 쏠아 버리게 하셨습니다. 해가 떠오르자 동풍까지 보내셨습니다. 요나는 또 다시 불퉁거립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요나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못 마땅하여 화를 내다가도, 박 넝쿨이 드리워주는 그늘 때문에 좋아하고, 상황이 바뀌자 또 성을 냅니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
예언자는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자기 분에 못 이겨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릇된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합니다. 요나서는 이런 질문으로 끝납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0-11)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들의 수고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존재의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아끼는 분이십니다. ‘아끼다’라고 번역된 ‘후스’는 ‘~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직접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낭비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믿는 이들이라면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한 채 살아야 합니다. 자기와 관련된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 아끼면서, 자기와 무관하다 싶으면 고개를 돌리고 마는 것처럼 하나님을 속상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3년 전 우리는 시리아 난민 아기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 때문에 울었습니다. 터키의 바닷가에서 마치 잠이 든 듯 엎드린 채 죽어간 아이의 사진은 전 세계인들의 양심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2018년 멕시코 국경에서 검문 당하는 엄마를 보면서 울고 있는 한 아기의 사진 또한 우리에게 인류의 양심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불법 체류자라 하여 부모와 아이들을 분리 수용하려던 미국의 선택은 수많은 이들의 저항에 부딪혀 취소되었다 합니다.

∙ 난민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지금 제주도에는 예멘을 떠나온 난민들 500여 명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을 정치적 난민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습니다만, 그들의 존재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낯선 이들에 대해 배타적입니다. 게다가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하면 안 된다는 청와대 청원에 응답하는 이들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라고 합니다. 표면적 이유는 그들이 난민이라기보다는 취업을 위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면적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대개 무슬림입니다. 그리고 이슬람은 서방 언론에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졌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테러에 가담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슬람 세계 출신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슬람 자체가 악마적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어떤 종교이든 근본주의자들은 다 위험합니다. 나만 옳다는 생각 그 자체 속에 폭력이 배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힌두교 근본주의자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물론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 위험합니다.

참된 종교는 증오를 부추기지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품이 넓어야 합니다. 신문 기사를 통해 제주에서 공존의 싹을 틔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국악을 전공한 30대 여성은 예멘 난민들이 잠잘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슴없이 자기 연습실을 열어 그분들을 받아들였고 또 자비를 들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지인들이 조금씩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찾아오면서 그곳은 따뜻한 환대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자기집에 큰 방이 비어 있다면서 예멘인 대가족을 맞아준 분도 계십니다. 언제까지 그들이 거기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그들은 그곳에서 받았던 환대의 경험을 감사함으로 추억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학자인 김현경 선생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들어오게 하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국경을 넘어온 이주자들을―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6년 1월 12일, p.192)

비용을 따지고, 그들이 초래할지도 모를 혼란을 미리 예단하며 그들을 배척하는 것은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그래선 안 됩니다. 김현경 선생은 환대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로부터 달아났든, 가난으로부터 달아났든, 조국과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는 이들은 약자들입니다. 그들을 품어 안기 위해 팔을 벌릴 때 우리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의지가지없는 신세의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한 것이 당신께 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라는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은 ‘오늘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낌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동산 위에 앉아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리는 요나가 세상 도처에 있습니다. 신앙의 보람은 요나의 그 작은 마음을 넘어 하나님의 큰마음에 접속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의 약자들을 향해 따뜻하게 열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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