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파워(Christpower)
막6:14-16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였다.]
∙ 생명은 거룩하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장마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무더위가 찾아왔습니다. 몸도 마음도 두루 건강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참 감동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태국의 북부 탐 루앙(Tham Luang) 동굴에 고립되어 있던 ‘야생 멧돼지‘(Wild Boars) 축구단에 속한 12명의 소년들과 코치 등 13명이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기적적인 생환입니다. 구조대의 신중한 판단과 신속한 조치, 언론의 협조, 전 세계인들의 기도가 어우러져 그 소중한 생명들을 산 자의 땅으로 불러올렸습니다. 그 힘겨운 구조 현장에서 구조대가 보인 헌신적인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를 우리는 모두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코치인 엑까뽄 찬따웡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임도 드러났습니다. 미얀마 출신의 난민인 그는 소년들에게 우리는 원 팀이라는 의식을 심어주었고, 얼마 안 되는 과자를 적절히 배분했고, 자기 몫의 먹을 것을 다른 소년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폐쇄 공포증이 몰려오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것임을 알았기에 수도승으로 지내던 때에 익혔던 명상법을 가르침으로 소년들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들이 피신해 있던 곳에 도착한 의료진과 구조대는 구조 순서를 적절하게 결정했고, 먼저 구조된 소년들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모들의 입장을 고려한 조치였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이번 구조작업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아픔과 죽어간 이들에 대한 산 자로서의 죄책감이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마도 이 사건을 보면서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둘째는 갇혀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구출을 염원하면서, 왜 지금 벼랑 끝에 서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심하거나 폭력적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전쟁과 테러가 일상이 된 땅을 벗어나 살 길을 모색하려는 이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도를 넘고 있으니 말입니다.
태국의 축구단 소년들의 구조 이야기는 깊은 잠에 빠진 인류의 양심을 깨운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생명은 그렇게 존중되어야 합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합니다.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기를 원하는 생명인 것처럼, 지금 위기에 몰린 이들도 간절히 살기를 원하는 생명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그리고 예수님은 민족, 피부색, 종교, 이데올로기의 차이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고 나누고 차별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팔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속에 하나님을 모실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한다면 더 이상 가르고 나누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가르고 나누는 일이 더 많습니다. 특정한 사람들을 가두거나 배제할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냅니다. 이스라엘은 정착촌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분리의 장벽을 세웠습니다. 미국 역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웠습니다. 무역 장벽 또한 심각한 지경입니다. 보이지 않는 장벽 또한 많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삶을 장벽 철폐라는 말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등을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습속을 온몸으로 돌파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증언이야말로 예수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오롯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 질서를 교란하는 자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자기들의 안위를 뒤흔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불온시 됩니다. 감시와 처벌이 뒤따릅니다. 출애굽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던 예언자들이야말로 가장 불온한 이들이었습니다. 수난이 예기되는 그 시간 예수님은 예언자들과 서기관, 지혜자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고난을 떠올립니다(마23:34). 힘 있는 이들은 자유를 꿈꾸는 이들을 추격하고, 채찍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명분은 언제나 질서를 세운다 혹은 지킨다는 것입니다. 질서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유가 억압되는 질서, 다소의 혼란을 허용하지 않는 질서는 무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사분란, 총화단결이라는 말은 다름과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닫힌 사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예언자들은 질서를 뒤흔드는 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질서라는 명분으로 백성들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력에 결연히 맞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역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질서를 교란하고, 뒤흔듭니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양심을 습격하는 자입니다. 개인적 행복만 추구하는 우리들의 평온을 깨뜨리고, 공적인 삶의 자리에서 책임적인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서시대의 거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던 사람, 포근한 잠자리와 부드러운 음식과 결별한 사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야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를 받기 위해 자기에게 나아오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삶의 열매는 맺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품고 살던 이들에게 도끼가 이미 뿌리에 놓였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아시다시피 헤롯 안티파스가 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준엄하게 꾸짖다가 체포되었고 처형당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준엄하게 꾸짖은 것은 헤롯 안티파스의 불륜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가 일종의 권력 중독에 빠졌음을 알았고, 그 권력이 민중들의 삶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칠지를 내다보았습니다.
사실 헤롯 안티파스가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은 조금 맥락이 복잡합니다. 헤롯 가문은 순수 유대인이 아닙니다. 헤롯 대왕은 이두메 출신인데, 이두메는 유다의 남부 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두메인들은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과 그 어름에 살고 있던 유대 여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무시했습니다. 순수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 대왕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성전을 수리했던 것도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손녀입니다. 헤롯 대왕은 하스몬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네1세와 결혼했습니다. 신분 세탁을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 사이에 헤롯 아리스토불루스가 태어났고 헤로디아는 그의 딸입니다. 헤로디아도 알고 보면 참 불행한 여인입니다. 헤로디아는 처음에 삼촌인 헤롯2세와 결혼했지만 그가 반역 음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죽임을 당하면서 혼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삼촌인 헤롯 빌립보1세와 재혼했는데, 성경은 그를 빌립이라 일컫습니다. 골란 고원 일대와 베다니를 다스리던 사람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로디아는 그와 이혼한 후에 갈릴리의 영주인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했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하는 식의 낭만적인 행태로 보기 어렵습니다. 안티파스는 하스몬 왕가의 피가 흐르는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계산에 따라 움직였고, 헤로디아는 아버지처럼 대왕이 되고 싶어했던 야심가 헤롯 안티파스의 야망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 허약한 영혼들
세례자 요한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의 사다리 끝단에 오르려는 권력의 악마적 속성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런 권력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백성들의 울타리가 되기보다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자기 배만 불릴 따름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권력의 속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불의한 권력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숨죽인 채 지내는 백성들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배를 띄우던 물이 어느 순간 배를 뒤엎기도 하는 법입니다(水即載舟 水即覆舟). 우리는 젊은 시절부터 불의한 권력이 국민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제공하는 달콤한 세 가지 유혹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소위 3S라는 것 말입니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온통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권력은 안전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거기에 몰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잠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그 혼곤한 마비상태에서 깨어나도록 애씁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신이 아테네에 보낸 등에라고 생각했습니다. 등에는 작지만 소의 등이나 배에 붙어 소를 괴롭힙니다. 소크라테스는 부와 명예와 명성을 차지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참 진리와 지혜 찾는 일을 소홀히 하는 아테네인들을 깨우는 것을 자기의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등에를 예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등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제거한 후에 한숨을 돌렸을 겁니다. 그 귀찮은 등에를 제거했으니, 무지하고 나태한 백성들은 또 다시 혼곤한 잠에 빠지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그에게까지 들려왔습니다. 갈릴리 일대에 있는 어부들과 농부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바람처럼 빠르게 번져가고 있고, 많은 사람이 그를 메시야로 여긴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세례자 요한의 화신이라고 말했습니다. 메시야 시대를 열어줄 예언자 엘리야의 재림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증언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했던 대답과 일치합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헤롯 안티파스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불의와 공모하는 권력은 이렇게 허약합니다. 그의 속에 잠재되어 있던 가책과 두려움이 이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혼,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을 유지하고 있는 영혼은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요일4:18). 예수님은 유한성의 운명 속에 있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두려움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死卽生 生卽死, 죽으려고 나아가면 살고, 살려고 발버둥치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누군가에게 내주는 능력입니다. 자기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늘 자기를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가장 강한 척하지만 헤롯 안티파스는 허약한 영혼의 사람일 뿐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뭔가에 쫓기듯 살고 있지 않습니까?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뭔가를 맹렬하게 추구하지만 정작 만족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유력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늘 무력합니다. 돈을 벌고, 인맥을 쌓고, 스펙을 마련하기 위해 진력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무기력증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미국 성공회 소속인 스퐁 감독에게 저는 ‘Christpower’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예수의 신성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가 주시는 자유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그의 권능과 기적들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주는 그의 무한한 능력, 존재의 용기, 삶에 대한 열정, 전염성 강한 그의 사랑에 주목하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리켜 ‘그리스도파워‘라 말합니다(John Shelby Spong, Christpower, St. Johann Press, 2007, p.1). 우리에게 이런 그리스도파워가 있습니까? 그 힘이 우리에게 공급되는 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과 발입니다. 놀라운 은총입니다. 주눅 들지 말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걸으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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