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못자리 교회

천국생활 2018. 5. 20. 07:53

못자리 교회
롬15:1-6
(2018/05/06, 교회설립기념주일)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 탈-향 현존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교회 설립 11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법 긴 세월을 우리는 풍상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교회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친히 그 구원의 능력으로 임재하시고,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며, 죄인을 거룩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모든 사람을 이끌어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십니다(레슬리 뉴비긴, [교회란 무엇인가?], 홍병룡 옮김, Ivp, 2010년 9월 20일, p.58).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러주셨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앞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던 이들의 헌신 덕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요4:3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또 그것을 누리고 있으니 삶은 고마움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두어 누리는 사람의 의무는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뭔가를 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심고 있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것은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안병무 박사님은 기독교인의 삶을 ‘탈-향 현존’이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탈脫은 벗어남이고 향向은 지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낯익은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나아가라 이르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 신음하고 있던 이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향’의 삶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공간적으로는 예속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유의 새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실존적으로는 욕망에 매여 살던 타락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사는 본래적 존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마음 쓰며 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바꿔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붙들고 살고 있는지요? 괴테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장미꽃으로 촘촘히 둘러싸인 십자가가 서 있다.
누가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였는가?
그 험한 십자가를 사방으로 부드럽게 둘러싸기 위하여
花環은 부풀어지고 있다.”
(J.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79년 1월 30일, p.42에서 재인용)

우리는 피가 뜨거운 서른 세 살의 젊은이가 졌던 그 고통의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여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교회의 중심은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것은 남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 사랑의 표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길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 약점 돌보아 주기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를 세세히 가르쳤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늘 분별하며 살아야 하고, 믿음의 분수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늘 정신을 차리고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살아야 합니다.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도 말아야 하고, 그들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런 삶을 위해 구체적 지침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15:1)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제1의 원리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적 뿌리가 없기에 율법이나 전통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활달하게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율법 조문에 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리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것이 진리의 세계에 텀벙 뛰어드는 일을 망설이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유대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신자들의 그런 흔쾌하지 못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일을 통해 세워집니다. ‘자기에게 좋을 대로‘ 처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더뎌도 괜찮습니다. 내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올리신 기도는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요17:11, 17)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과만 살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들에 따르면 가끔 공동체에 회의를 느끼는 것은 그 집단이 지향하는 가치관이 달라서가 아니라, 사소한 생활의 습관 때문이라 합니다. 치약을 짜는 방식에서부터, 양말을 벗어놓는 방식까지 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람들이 모여 이룩한 꽃밭과 같습니다. 이런 조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 아가페적 공동체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실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공동체적 사귐 속에서 하나이십니다.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가운데 ‘에로스‘는 대상이 가진 아름다움 때문에 그 대상과 합일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보통 ‘~ 때문에 하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조건인 ‘무엇 무엇’, 즉 아름다움, 귀여움, 젊음, 기백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가페적 사랑은 “서로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됨’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흔히 이것을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김용규 선생은 아가페적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컨대, 아가페는─마치 여러 가지 악기들이 서로 다른 각각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polyphony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 내는 교향악symphony처럼─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입니다.”(김용규, [신], Ivp, 2018년 3월 28일, p.799)

자기 소리를 높이는 순간 교향악의 조화가 무너지듯이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떠한 강제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본문 말씀은 더욱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2). 이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제2의 원리입니다. 몇 해 전, 작곡가인 이건용 선생님이 쓰셨던 ‘알토들의 존재감’이라는 칼럼(중앙일보, ‘삶의 향기’ 꼭지, 2015년 8월 25일)을 읽다가 저는 눈이 확 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합창에서 알토 파트의 존재감은 약하다. 다른 파트들에 비하면 확실히 그렇다. 소프라노의 존재감은 분명하다. 우선 합창의 네 파트 중에서 제일 높은 성부를 부른다. 잘 들린다. 또 소프라노는 거의 항상 주선율을 맡는다(중략). 소프라노는 음악을 리드하는 역할을 맡으며 그 음악의 표정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베이스는 합창에서 화음의 기초이자 기둥이다. 소프라노가 선율로서 합창을 리드한다면 베이스는 화성으로 음악의 틀을 만들어 준다. 다른 파트와는 움직이는 원리가 다소 다르다. 그래서인지 저음이지만 잘 들린다.“

소프라노와 베이스는 합창 전체의 윤곽을 만들기 때문에 이 두 성부를 외성(外聲)이라고 하고, 그 윤곽의 내부를 채우는 테너와 알토 두 성부를 내성(內聲)이라고 한답니다. 테너는 고음이기 때문에 잘 들립니다. 물론 어려움도 있습니다. 높은 소리를 작게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음이 떨어져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이들에 비하면 알토는 이도 저도 아닙니다.

“선율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화성 진행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여성의 저음이어서 소리가 약하다. 다른 파트들에 묻혀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아마추어들이 소프라노가 되고 싶어합니다. 존재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용 선생은 알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알토는 우선 합창에 볼륨감을 준다. 스스로의 소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전체의 합창 소리를 풍부하게 만든다. 알토는 협력자다. 소프라노와 협력하여 이중의 선율선을 만들기도 하고 테너와 협력하여 화성을 완성한다. 만일 색채감이 많은 화성을 사용하고 싶다면 내성, 특히 알토의 협력이 절실하다.”

음악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만 제게는 이게 바로 교회의 구성 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토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사람들, 협력하는 사람들,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는 이들 덕분에 교회는 날마다 든든히 섭니다. 그들은 공동체에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3)기 때문입니다.

∙ 은혜 안에서 살다
인간은 저마다 우주의 중심인데, 어떻게 이렇게 남 좋을 대로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접속될 때 우리는 자아의 한계를 돌파하여 다른 이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셨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가 한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늘 모시고 살 때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을 성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시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은 4월 초순부터 못자리를 시작합니다. 저는 농사 경험이 없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눈여겨본지라 그 광경을 눈에 그릴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좋은 흙을 퍼 와 잘게 부순 후, 커다란 체를 세워놓고 흙을 흩뿌려 고운 흙을 얻습니다. 그 흙에 거름을 뿌려 섞은 후 며칠 전부터 물에 담가놓아 발아시킨 볍씨를 모판에 뿌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짚을 얇게 깔아주기도 합니다. 그런 후에 못자리에 옮겨놓았다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논에 옮겨 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농부들의 고된 노동 속에 담긴 그 정성이 제게는 예배처럼 느껴집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못자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팔려 거칠어진 우리 마음을 하나님 사랑의 체로 걸러내고, 성도들과의 친밀한 사귐이라는 거름을 섞어주고, 발아된 말씀의 씨를 그 마음 밭에 뿌리고, 때가 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 옮겨 심는 것이야말로 이 땅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완성됩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의 꽃을 피우며 살아야 합니다. 설립 110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가 생명의 못자리, 평화의 못자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다  (0) 2018.06.20
은총의 깊이  (0) 2018.05.31
황색시간  (0) 2018.05.20
안개와 어둠의 세월을 넘어  (0) 2018.05.20
사랑으로  (0) 2018.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