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요 11:45-53
(2018/03/25. 종려주일)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
고난주일이며 종려주일인 오늘 아침,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온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은 춘분이었습니다. 춘분,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절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춘분은 자연계에 있어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절기로 동양과 서양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춘분을 중요한 날로 여겨왔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어느새 녹고 그 위로 새싹들이 쑥쑥 올라옵니다. 저 안에 무슨 생명력이 남아 있을까 싶어 보였던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도 새순이 돋고 꽃들이 활짝활짝 피어납니다. 생명의 기적,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는 절기가 바로 춘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 절기와,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춘분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회에도 그런 참되고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소망해 봅니다.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절로 그 어느 때보다도 예루살렘이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해의 예루살렘은 유난히 붐비고 뜨거웠습니다. 이스라엘 대중 사이에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 바 있었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되면 대중의 지지를 힘입어 이스라엘 전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라 믿었고, 그 변화는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지위를 크게 높여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지요.
예수님께서 성서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예법으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태복음 21장 10절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떴다’(마 21:8-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결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던 것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열렬히 외치는 ‘호산나‘ 소리가 곧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소리로 바뀔 것까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영광이 기다리는 자리 같았으나 죽음이 기다리던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그 중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헤롯에 의해 46년에 걸쳐 크고 웅장하게 지어진 성전, 비록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주던 곳,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여 제사를 통해 민족공동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곳.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제물을 비싼 값에 팔았고 성전세금을 거두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그 돈의 상당부분을 자기들의 비호세력인 식민지배자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대제사장 무리는 이스라엘 최고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자리를 옳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하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갈취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가 부여한 세금과 부역 이외에도 성전에 제물을 바쳐야만 했고 종교세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2중 3중의 고난으로 허리가 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 바로 성전에 가셔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와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과 사람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불의하고 부패한 성전체제가 뒤집어져야 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권력자 중에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그냥 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제사장 무리는 그 순간부터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19:47, 막 11:18)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도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당신이 당할 고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기도 했겠지만, 예수님 스스로에게도 고난을 준비하게 함은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말함으로써 자신을 확신시켜나가기도 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소위 말하는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 몇 명과 함께 예루살렘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마가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막14:33,34)
‘매우 괴로워하다’.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라는 표현은 왠지 예수님이 사용하시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무 연약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그 고통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세 번이나 기도하셨던 것이구요.
기도 후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찾아오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붙잡혀 의회 앞에 끌려가 고난을 겪게 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걸까요? 굳이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셨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그들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갈릴리와 이방 땅으로 가셔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좀 더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더 좋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학교를 세워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저술 작업에 힘쓰시는 게 더 나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다 해도 1,2년 더 미룰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왜 꼭 그 때여야만 했던 것일까요?
양을 살리기 위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전해주지 않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길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1장에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에게 좀 특별한 마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11:5)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곳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반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도 예수님은 끝내 베다니로 가셨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모든 기적의 결과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긴급대책회의(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을 받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 논의의 결론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를 죽이자’(11:53)였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 자기들이 속한 집단을 사회 전체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되는 사고방식인데 무척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요, 자기의 손해는 공동체 전체의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자는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하는 불순분자로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절대’가 되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회공동체의 여러 부분 중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무너짐이 오히려 공동체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의 잘못된 생각은 자기들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그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강요된 희생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는 구조는 폭력적인 구조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구조는 악한 구조입니다. 또한, 그것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는 악마적 구조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인 구조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폭력적인 구조가 반대자를 처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시점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 이후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성전정화 사건이 이 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신 목적이 나사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든 나사로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작정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두 곳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대책 없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간 목자, 늑대와 같은 들짐승들이 자기에게 달려들 수도 있는 그 위험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오직 잃어버린 한 마리만을 생각하며 온 땅을 헤매던 목자, 또 그 양 한 마리를 찾은 게 뭔 큰일이라고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던 목자에 대한 예화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라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베다니가 있는 예루살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순간 그 예화와 그 말씀은 육신이 되었습니다.
한 생명을 살리고자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의 방향성과 예수님의 방향성.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나님, 민족, 성전, 대중, 로마를 동원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동원한 하나님, 민족, 성전은 물론 올바른 하나님, 민족, 성전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높고 숭고한 가치들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고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권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무기들로 중무장하고 예수를 죽이러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중무장한 무리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권력화된 하나님도, 으리으리한 성전도, 민족을 대표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고 물 위로 올라올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참 좋아한다’라고 말씀해주신 하나님, 내 몸 하나를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으로 삼고 산다는 정신, 이스라엘 곳곳에서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따르는 가난한 민초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연어가 강 상류에 새 생명을 낳기 위해 거칠고 험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베다니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결국, 대제사장 무리는 한 생명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고, 예수님은 한 생명을 살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일체의 것을 뒤로하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실상은 대제사장 무리를 따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얼마 전 <영재발굴단>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9살 최주원이라는 어린이가 소개되었습니다. 주원이는 아인슈타인을 좋아합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을 좋아합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속도가 빛보다 빨라지면 시간이 느려진다는 이론이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바가 있는 이론입니다. 주원이는 블랙홀과 웜홀에도 관심이 많은데 웜홀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나온 바 있죠. 두 시공간이나 한 시공간의 두 곳을 잇는 좁은 통로를 의미합니다. 그 좁은 통로를 이동하는 비행체가 소위 말하는 타임머신이죠. 주원이는 이 타임머신에 엄청 관심이 많습니다. 9살짜리 주원이는 이 쉽지 않은 이론들을 줄줄 꿰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위해 찾아간 피디와 카메라 촬영기사를 앞에 세워두고 긴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원이는 더 공부하고자 틈만 나면 책을 보고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영어논문들까지 보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방송국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뭘하고 싶어요?” 주원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세월호 침몰할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로 돌아가 형, 누나들에게 저 배는 침몰하니까 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주원이가 5살 때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그때부터 주원이는 세월호 관련 뉴스를 보면서 굉장히 마음 아파했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월호의 형, 누나들을 구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순수하면서도 바보 같아 보이는 열심, 한 생명을 살리고자 자기의 전부를 쏟아붓는 모습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주간,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서계십니다. ‘너 이곳에 올 수 있니?’, ‘너 또한 이곳에 서야 하지 않겠니?’ 물으시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사로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자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혼자 감당할 수 아픔 속에서 절규하는 한 생명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사로들의 울음소리를 주님의 울음소리로 알아듣고 그들 곁으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품어 안아 줄 때, 그 아픔과 고난은 우리를 참된 생명에 이르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메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일 것입니다. 이 변화의 춘분 절기와 고난과 부활의 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삶에 그런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색시간 (0) | 2018.05.20 |
---|---|
안개와 어둠의 세월을 넘어 (0) | 2018.05.20 |
가없는 사랑 (0) | 2018.03.29 |
애써 주님을 알자 (0) | 2018.03.01 |
더 큰 사람이 되라는 부름 (0) | 2018.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