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없는 사랑
눅22:31-34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겨울바람이 어느덧 봄바람으로 바뀌고,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봄이 왔다고 가만히 외치고 있습니다. 삐죽 고개를 드는 새싹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생명의 기운을 지렛대로 삼아 대지를 들어 올린 것입니다. 벌써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속에도 예수라는 꽃이 조금쯤 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굳어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녹이고, 남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욕망 주위만 맴돌던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시던 주님은 당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순례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그곳을 사람들은 ‘평화의 도성‘이라 불렀지만, 사실 그곳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리모델링한 성전은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도살되는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 경건을 가장한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며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하고 찬탄했을 때 주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2). 제자들은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주님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꿰뚫어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인 Titus에 의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병들고 찢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절망의 어둠 속에 있던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뭔가에 짓눌린 채 살아가던 사람들을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외형은 성전이었지만 실제로는 강도의 소굴, 곧 신의 무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이들, 소위 종교 전문가들로 인해 모독당하고 계셨습니다.
오늘의 교회 현실도 그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에 절망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싸늘합니다. 어느 기독교 대학 교수님이 자기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 가운데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이들은 10%에 불과하다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학생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교회 다닌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편협하고, 열광주의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참담한 현실입니다. 교회는 영영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객관적으로 타당한 대답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가치입니다. 루쉰은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어 다니는 동안 형성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희망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살아내려는 이들을 통해서만 현실이 됩니다. 지금 우리 모습이 추하다고 해서 쉽게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우리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 나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주님의 외로움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일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저녁 식사 후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찢긴 빵은 머지않아 찢기실 주님의 몸을 상징했고, 나누어 마신 포도주는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눈을 가렸던 비늘이 제자들의 눈도 가리고 있었습니다.
3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 했지만 그들은 예수의 길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장밋빛 미래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히 외로우십니다. 지상에서의 삶의 종착역이 저만치 보이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사순절 특별 기도회 광경이 떠오릅니다. 별 기대도 없이 참석한 예배였는데, 4학년 선배가 홀로 부른 찬송가가 제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습니다. 청아하지만 쓸쓸한 목소리에 담긴 가사가 심장을 파고 들었습니다.
“1. 감람산 깊은 밤중에 별빛은 희미하여라/주 예수 고민하시며 외로이 기도하시네
2. 주 홀로 깊은 밤중에 고민에 싸여 계시나/그 사랑 받던 제자들 스승의 괴롬 모르네
3. 한 밤중 피 땀 흘리며 인간의 죄를 지신 주/무릎을 꿇고 애쓸 때 성부는 힘을 주시네
4. 한 밤중 하늘로부터 천사의 노래 들리네/인간은 듣지 못하나 주 예수 위로 받도다”
이 아름다운 찬송가가 지금 찬송가에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주님의 외로우심‘이라는 이미지에 확고히 사로잡혔습니다. 주님을 외롭게 해드리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주님을 외롭게 해드리고 있지만,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은 외로우셨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섭섭함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음이 황폐해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티끌에 불과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히브리 시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103:13-14). 그 마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혼돈과 아픔과 절망까지도 자기 안으로 끌어안으십니다. 하지만 쓸쓸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31)
이게 현실입니다. 고난의 태풍 앞에서 시몬의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릴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말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33) 나는 이 마음에 조금의 거짓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정말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이성적인 판단이나 결심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그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저는 ‘죽을 각오로‘ 혹은 ‘목숨을 걸고’라고 말하는 이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 말은 진실한 말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4)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말일 겁니다. 누가복음 본문만 보더라도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련성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이들에 맞서 베드로가 한 말에 우리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란 말이오.”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베드로는 이렇게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베드로의 삶을 포도에 비유하자면 그는 이제 으깨진 포도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라고 믿어왔던 그 자기 정체성이 무너진 겁니다.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해도 그는 자기에 대한 혐오와 절망감을 품고 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희망의 뿌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미 그의 약함과 배신까지 품어 안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32)
한번 넘어지면 그걸로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넘어진 자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면 희망이 없지만, 기어코 몸을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패자 부활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한번 루저는 영원한 루저로 취급당합니다. 흙수저들은 금수저가 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게 악한 세상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넘어짐도 삶의 일부분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멸감이나 자기혐오에 사로잡히면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혹은 그럴 가능성이 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아니었다면 베드로는 베드로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소명
물론 베드로가 위기 속에서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고, 신념대로 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무너졌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양심의 시험대 앞에 세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시련의 시간을 면제해주지 않으십니다. 일전에 서양의 엄마들과 한국 엄마들을 피실험자로 한 실험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가 제시됩니다. 아이들은 고심을 거듭하지만 쉽게 대답을 찾지 못합니다. 서양 엄마들은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시행착오를 용납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 한국 엄마들은 좀 달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아이들이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가 내린 후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아파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사람이라야 지금 자기에게 절망한 이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으깨진 포도처럼 생의 밑바닥을 맛본 사람이라야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돌아올 때’라는 구절에 감동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베드로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말씀은 영혼의 어둔 밤에 사로잡힌 그의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등을 돌릴 베드로에게 격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배신할 것을 내다보셨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시몬이라는 갈릴리의 어부 속에서 베드로 곧 반석을 보셨던 주님의 그 가없는 사랑과 신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랑과 신뢰가 베드로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형제를 굳세게 하라 이르십니다. 새로운 소명입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완벽하지 못하고, 신앙적으로도 담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실패를 계속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실패를 디딤돌 삼아 더 나은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패입니다. 어느 축구팀이 연전연패를 거듭할 때 해설자가 하는 말이 제게 크게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저 팀은 패배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어요.“ 패배에 익숙해졌다는 말처럼 슬픈 말이 없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도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가끔 아무리 외쳐보아도 세상은 달라질 리 없다는 절망감이 저를 사로잡을 때도 있습니다. 물질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외치는 이들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몸과 마음을 곧추 세우는 까닭은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신 주님이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값싼 위안이나 구하라고 택함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넘어졌더라도 그 자리를 딛고 일어나 형제를 굳세게 하라는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비록 으깨진 포도 같은 우리라 해도,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신뢰할 때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우리를 바칠 때 우리는 성찬의 포도주처럼 거룩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들을 통해 이 척박한 땅에 사랑과 생명의 씨를 심으려 하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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