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더 큰 사람이 되라는 부름

천국생활 2018. 3. 1. 08:38

더 큰 사람이 되라는 부름
창 17:1-7, 15-16
 

[아브람이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 ……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부르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 기간을 순례자로 살아보자고 다짐했지만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사로잡는 일들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들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일들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평화의 제전인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에도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의 동쪽 반군 지역인 동(東)구타 지역은 정부군의 공습과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무고한 아이들과 여성들이 수없이 죽고 있습니다.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염원이 무색해지는 나날입니다. 이 참담한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을 허락하십니까?” 하고 불평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여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일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꿈을 끈질기게 붙들어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채움 같이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 찰 때 비로소 세상은 살육과 전쟁이 없는 땅이 될 것입니다.

사순절 순례 기간 중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하여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절절히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순례자는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투덜거리기보다는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Turistas manden, Peregrinos agradecen)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순례자는 걷고 또 걸으며 성스러운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일상의 순례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성스러운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길은 대개 낮은 곳을 향해 나있습니다. 홀로 서기 어려운 사람들 곁에 다가서고, 그들 편에 서고, 부당한 힘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순례입니다.

아브라함도 순례자였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 하는 주님의 명령을 들은 후 그는 줄곧 길 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애굽에서 네겝으로, 네겝에서 헤브론으로 계속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익숙한 세계를 떠난다고 하는 것, 실향민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고단한 일입니다. 미국에 살고 계신 어느 선배님이 자조적으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는 해외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운다면서 그 이름은 ‘이민자’라고 했습니다. 그 말 속에 담긴 고단함과 서러움을 저는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낯선 땅에 가면 괜히 주눅이 듭니다. 언어도 익숙하지 않고, 나를 보호하거나 대변해 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산다는 것처럼 서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가 나그네 생활을 시작한지 24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17:1)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예속에서 해방하시는 분인 동시에, 가물거리는 생명의 심지에 불을 붙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순종과 흠없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나에게 순종하며“라는 구절을 영어 성경은 대개 ‘walk before m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좁장한 우리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이웃들을 대하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흠 없는 삶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흠 없이 살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향입니다. 가끔 곁길로 나갈 수도 있지만, 정신을 차려 기어코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흠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십니다.

새로운 이름
순종과 흠 없는 삶의 요구 그리고 복의 약속,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입니다. 언약의 징표로 주님은 그의 이름을 새롭게 정해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17:5).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사래는 사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약속의 자손이 태어나고 또 그를 통해 그의 후손들이 많이 불어나 도처에서 위대한 삶을 살 것이라는 뜻일 겁니다. 히브리서는 사라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히11:11-12)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들이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창세기가 들려주는 성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의 변화를 단순히 이런 혈통의 보존에 대한 것만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름 바꾸기는 그들의 정체성의 변화를 상징합니다. 이름 바꾸기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자기 경계와 울타리를 넘어 타자들을 복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세상에 복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그의 유랑 생활에서 찾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돌았기에 그는 떠도는 이들,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사는 이들의 곤고함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정착민들이 느낄 수 없는 삶의 불안을 온몸으로 체험했기에 그는 강자들의 횡포에 짓눌린 사람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아내를 빼앗길뻔 한 적도 있고, 곳곳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사회의 밑바닥에 처한 이들이 어떻게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지, 곤고함 속에서도 삶의 기쁨을 누리는지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세계에만 갇혀 살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넓은 세계를 그는 두루 경험했습니다. 그 유랑의 경험을 통해 그는 원시적이고 부족적인 신앙(tribal faith)을 넘어, 세상의 아픔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만났을 것입니다.

감리교 선교사였던 나애시덕(羅愛施德, Esther J. Laird, 1901-1968)을 사람들은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고 부릅니다. 그는 1926년에 미 감리교단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온 이래 근 40년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미망인, 전쟁 고아, 어린이, 결핵환자 등 국가가 배려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쳤습니다. 그 분의 일화 하나가 제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감리교 목사가 자기 교인 한 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해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와서, 독실한 감리교인이니 꼭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나애시덕은 불교신자였던 환자를 먼저 입원시켰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감리교 목사는 몹시 화가 나서 “당신은 감리교에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때 나애시덕 선생이 한 말이 이러합니다.

“요양원에 누가 먼저 입원해야 하느냐는 흉부 엑스레이가 보여주는 병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엑스레이 사진에는 감리교인, 비교인(非敎人)의 표시가 없지요!”(최종수, ‘나애시덕-가난한 민중의 어머니’, 신앙과지성사에서 곧 출간할 예정인 책의 원고 중에서)

조금 매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게 어쩌면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이의 태도일 것입니다. 편협한 패거리 의식에서 벗어나, 세상의 아픔을 보듬어 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유랑을 통해 그런 마음에 당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경계선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접촉과 저항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정현경은 이슬람권을 여행한 후에 쓴 책에서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구화 현상에 주목합니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정보는 거리나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이리저리 흘러 다닙니다. 좋은 세상 같기도 하고, 무서운 세상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구화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카우보이 모형이고, 다른 하나는 신드바드 모형입니다.

"미국의 카우보이는 가는 곳마다 원주민과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다. 그들은 원주민을 무언가 가치 있고 배울 것이 있는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카우보이들은 원주민을 없애버리고 그 위에 자신들의 '새로운 개척지'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슬람 구전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신드바드는 세계를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원주민들에게서 소중한 것을 배워 고향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문화 통역자이다. 카우보이들이 총칼의 힘으로 세상과 만난다면 신드바드는 가슴과 글의 힘으로 세상과 만난다. 신드바드를 지금의 문화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글로벌 노마드 Global Nomad'이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웅진지식하우스, 2011년 11월 25일, p.147)

신드바드는 이웃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신기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워서 체화하고 결국에는 그들의 친구가 됩니다. 그에게 있어 ‘다름’이란 혐오와 공포 혹은 제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창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브라함도 글로벌 노마드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이집트 문명권을 두루 떠돌아다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신드바드와 아브라함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뭔가를 배우고 그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의 문화나 종교에 동화되기보다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살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그를 불러주신 길,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은 그저 아브람에 머물 수도 있었습니다. 사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찌 보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들을 불러 복의 매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배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삶으로 증언함으로 그들을 복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길, 사라의 길입니다.

언약 위에 세운 인생
물론 절망의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함으로 그 절망의 시간을 희망이 움터 나오는 통로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실현해가는 것인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꿰뚫어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야말로 아브라함을 이끌어간 힘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뢰할 만합니다. 신뢰는 맡김입니다. 맡긴 후에는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15:6)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자손이 되는 징표로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십니다(17:10). 할례 그 자체가 어떤 효력을 갖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각자의 몸과 마음에 새겨 넣는 일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결혼하는 이들이 약속의 징표로 반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야 이야기합니다만 학자들은 창세기 17장이 제사장 문서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상황에서 형성된 텍스트라는 말입니다. 민족적으로 보면 가장 비극적이고 암담한 상황 속에서 제사장들은 동족들에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자고 말하는 셈입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영락한 처지에 있지만, 결국 우리는 세상을 복되게 하는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시절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언약을 든든히 붙들어야 합니다. 언약은 우리를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리는 든든한 동아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욕망의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자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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