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이 되지 말라
고전8:7-13
(2018/01/28, 주현 후 4주)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면서 먹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 암울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길 빕니다. 밀양 세종병원 화재로 많은 노인들이 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과 유가족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시기를 빕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나날입니다. 대형사고가 빈발하면서 더욱 절실해지는 것은 생명 중심의 사고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비용의 문제로 치환되면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 아직 개화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문장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입니다. 가끔 저는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어떤 유령이 우리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이들을 가리켜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엡2:2)을 따라 산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진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뭔가 악한 영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거친 말이 난무하고, 그 말들이 빚어낸 혼돈의 미세먼지가 사람들의 호흡을 가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막말들의 진원지가 정치계와 종교계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조롱하고, 냉소하고, 경멸하고, 무너뜨리려는 말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업’(業, karma)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에 상응하는 결과 혹은 그 잠재력을 이르는 말입니다. 불교는 세 가지의 업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입니다. 산목숨 죽이는 살생殺生, 남이 주지 않은 것을 가지려는 투도偸盜, 음란한 짓인 사음邪淫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마음으로 짓는 의업意業입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탐진치貪瞋痴가 그것입니다. 욕심 부리는 것, 화내는 것, 어리석은 것 말입니다. 셋째는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입니다. 거짓말인 망어妄語, 이간질인 양설兩舌, 교묘하게 꾸미거나 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험담과 욕지거리를 뜻하는 악구惡口가 그것입니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마치 구업 짓기 경진대회에 나온 것처럼 말들을 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괜히 구정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불쾌해집니다.
언어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데 있습니다. 최초의 사람이 발화한 문장이 감탄이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자기 앞에 있는 낯선 존재를 보고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를 것이다”(창2:23) 발화된 이 문장은 둘의 마음을 묶어주는 든든한 끈이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는 순간 말은 사람들을 가르는 칼날이 되었습니다. 언어를 장악하는 자가 세상을 장악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말해주는 바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숲길Holzwege>라는 책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Ort)라는 말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그 말씀은 에너지로 가득 차 어떤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빛이 생겨라’ 하면 빛이 생겼고,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창1:3, 6) 하면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듭니다.
• 기독교인다운 태도
말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 우리가 사는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자기들이 머무는 곳을 생명의 온기가 감도는 곳,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이 드러나는 곳으로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맡은 이들입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돈 출애굽 공동체는 힘에 의한 지배와 독점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하나의 징표였습니다.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신자들은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그런 세상이 시나브로 자라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흠결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인 것은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함을 지향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습도 생각도 습관도 다른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의 생각은 제가끔 다릅니다. 교회 안에 갈등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각자의 성격적 특질이 맞부딪칠 때면 불꽃이 튕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소명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순례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염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지향점을 향해 힘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조금씩 탈바꿈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윤리를 정초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유기체입니다. 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다정하게 대하고, 서로 받아들일 때 교회는 건강해집니다. 이런 일치와 사랑의 분위기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에 이런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의 두 가지 윤리를 가르칩니다.
첫째는 특권의 포기입니다. 내가 누릴 것 다 누리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교회를 아름답게 섬길 수는 없습니다. 가족 관계에서도 그렇지 않던가요? 상속 문제라든지 다른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들 때 가족 관계는 소원해지게 마련입니다. 이전에 많이 무르던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의 2절 가사가 떠오릅니다. 아름답고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의 염원을 고백한 후에 노래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이게 적나라한 우리 영혼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기의 특권을 내려놓을 때 복잡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립니다. 특권을 내려놓을 때 놀랍게도 영적인 자유의 공간이 넓어지는 법입니다.
둘째는 모든 일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말하고 행동할 때 교회는 차가운 곳으로 변하고 맙니다.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여부였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좋은 고기는 대개 신들에게 봉헌되었다가 시장으로 나온 것이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금과옥조로 지키는 이들은 그런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그런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 두 행동을 놓고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 사도는 우상은 본디 허무한 것, 다시 말해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그런 고기를 먹는 것이 자기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자유로운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거나,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모방하면서 께름칙한 생각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평생이라도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자유의 한계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누군가에게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 부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나치즘에 동조했던 까닭을 분석하면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썼습니다. 산업화를 통해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권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종교나 관습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유는 얻었지만 그걸 누릴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자유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뭔가를 선택하고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습니다. 무력감과 불안, 그리고 고립감이 증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의존함으로써 불안감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입니다. 베토벤과 괴테 같은 위대한 정신을 낳았던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나치즘을 추종한 것은 자유가 주는 공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4차 산업혁명을 운위하는 요즘도 이단 종파에 빠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센 척하는 이들과 자기를 합일화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자유인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유약한 이들입니다. 자유가 주는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기에 그들은 자기 망각의 길을 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증상은 중독으로 나타납니다. 일중독,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스마트 폰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섹스 중독 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둘째, 주어진 자유와 자발성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불확실함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용감하게 인생과 대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 좋은 예입니다. 주님은 형식화된 유대교 세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품고 사셨습니다. 지향이 분명했기에 어떠한 저항에도 당황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주님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바울도 그런 길을 맹렬하게 추구한 사람입니다. 그 길은 홀로 만족하고 자족하는 길이 아니라, 함께 행복한 세상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좋은 세상은 내 옆에 있는 이를 존중하고 아끼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복의 통로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런 세상의 기초입니다.
문제는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이야 어떻든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10:23-24)
남의 유익을 추구하는 길,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나 누군가의 ‘걸림돌‘(stumblingblock)이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8:1b-2). 누군가의 디딤돌은 되지 못할망정 걸림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세상 모든 일은 상대가 있기에 아무리 조심해도 그런 일은 벌어집니다. 아프지만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때 우리는 더욱 남의 마음을 헤아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 배려, 인간다움의 징표
인간다움의 가장 큰 특징은 배려(Fursorge)가 아닐까요? 하이데거는 배려를 현존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취하는 태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이데거의 개념으로는 상대와 협력하는 것도 배려이고, 반목하는 것도 배려입니다. 하지만 저는 배려라는 말을 이웃에 대한 ‘마음 씀‘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에게 편안하게 머물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독일한인교회협의회에 초대를 받아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사흘 동안의 뜨거웠던 모임을 마치고 사람들은 각자 떠나왔던 도시로 다 돌아갔습니다. 저는 뒤셀도르프로 가는 일행과 함께 마틴 루터가 머물렀던 도시들을 방문한 후에 늦은 시각에 두이스부르크라는 도시에 들어갔습니다. 동행했던 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네덜란드 국경 가까운 지역에 사는 분이 일찌감치 찾아와 담소를 나눴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간밤 늦은 시간에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탁에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더랍니다. 식탁 위에 놓인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집회는 좋았나요? 먼 길 다녀와 피곤하지요? 음식 해 먹기 귀찮을 것 같아 조금 장만해봤어요. 맛있게 드시고 잘 쉬어요.“ 바로 이웃집 독일인 친구 부부의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여러 날 집을 비울 때마다 두 집은 우편물 수거, 강아지 돌보기, 화분에 물 주기 등을 서로 부탁하곤 했답니다. 그런데 음식까지 차려 놓았던 것이지요.
이런 배려의 마음이 세상의 냉랭함을 녹입니다. 우리가 서로 배려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만나는 이들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불퉁거렸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 대답은 명백합니다. “그렇다“. 우리는 형제자매를 돌보고 지키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누가 형제자매냐고 묻지 마십시오.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이에게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에 “네 생각에는 누가 그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돌보아야 할 사람들의 범주를 결정하려는 태도는 불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제자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살 때 우리는 적어도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우리 영혼에 그늘이 짙어졌습니다. 사랑과 배려는 그러한 어둔 그늘을 흰 그늘로 바꾸는 묘약입니다. 이 추운 날, 우리의 있음이 누군가에게 봄소식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큰 사람이 되라는 부름 (0) | 2018.03.01 |
---|---|
에벤에셀 (0) | 2018.02.12 |
애써 주님을 알자 (0) | 2018.02.12 |
주님 평화를 주소서 (0) | 2018.02.12 |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 지는것 (0) | 2018.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