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
엡4:1-6
(2018/01/21, 주현 후 제3주)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 거룩한 삶이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미세먼지로 인해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머리는 무겁고 목은 따가웠습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미세먼지는 마스크를 써도 피부를 통해 인체에 들어와 각종 질환을 일으킨다고 하니 그 심각성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부옇게 보이고 사물들의 윤곽조차 흐릿하게 보일 때면 마음의 창에도 그늘이 생깁니다. 맑고 푸른 하늘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만 갑니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마5: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문득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시선을 차단하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미세먼지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믿음의 목표는 사는 동안 몸과 마음에 배어 든 죄의 습성들을 자꾸 닦아내 맑은 사람이 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말씀의 거울에 우리 모습을 비춰보며 더러움을 닦아내고, 주님의 마음을 기준음 삼아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간곡한 마음으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4:1)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일까요? 주님은 욕망의 진창에 빠져 허덕이는 우리를 더 크고 맑고 높은 세계, 곧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서로를 귀히 여기는 세상, 가장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세상,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은 관념이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구현할 수 있는 현실임을 삶으로 증언하셨습니다.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 힘을 다해 받드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그대로 살아갈 때 사람은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삶이란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현장입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겠다고 다짐해 보아도 세상은 그런 우리의 선의를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선한 이들이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이들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설사 율법 조문을 따라 산다 해도 그것을 곧 거룩한 삶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경건의 외양을 하고 있으나 불경건한 이들이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일에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서 영적인 위선을 보셨습니다. ‘나는 저 죄인들과 다르다‘는 헛된 자부심은 영적 타락의 징후입니다.
• 표지로 서다
주님은 거룩함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들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그들의 짐을 함께 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사랑으로 호출하는 사람입니다. 이웃들의 곤경을 모른 체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거룩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맑은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대기 저 너머에 맑고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 세상이 아무리 욕망의 진창처럼 보여도 맑디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읽어내고, 하나님의 은총을 세상에 매개하는 존재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지난 주중에 한희철 목사의 글에 추천서를 쓰기 위해 원고를 읽다가 ‘어느 날의 기도‘라는 기도문과 만났습니다. 그는 세월의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표지판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볕이 쬐면 볕을
비가 오면 비를
눈이 날리면 눈을 맞으며
자리를 지킵니다.
실핏줄처럼 금이 가고
푸른 이끼 멍처럼 돋아도
몸에 새긴 글씨
지켜내게 하소서.
폭풍 속 흔들려도
꺾이지 않게 하시고
외발로 선 시간
막막하지 않게 하소서.
머무는 이 없어도 좋습니다.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갈림길 끝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가야 할 곳 제대로 가리키는
바른 표지판이게 하소서.
표지판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하고, 몸에 새긴 글씨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길을 찾는 이에게 가야 할 곳을 제대로 가리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표지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 영적 목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려는 이들은 몇 가지 영적인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관용이라 말합니다. 겸손(humility, lowliness)은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교만 혹은 오만에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그러한 도덕적 자질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기를 바라고, 또 그 일에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 겸손이라 가르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허물과 나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그렇기에 남의 허물을 들추고, 비평하고, 조롱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있는 곳에 평화가 깃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온유함(meekness)은 온화함과 유순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래 이 말은 호메로스 이후의 헬라어에서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을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뜻이 더 잘 드러납니다. 제어되지 않는 격분, 까칠한 태도, 잔혹함, 자만에 찬 말과 행동은 온유함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중용을 가르쳤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함’을 무정함과 과도한 열정 사이에 있는 사회적 가치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헬라어에서 ‘온유함’은 또한 길들여진 말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그렇기에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위협을 들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말이 무엇이던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4:19-20) 온유한 사람은 그저 유순하고 따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비하심에 의지하고, 하나님이 열어주실 삶의 가능성을 감사함으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합니다.
오래 참음(longsuffering)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는 가치입니다. 헬라어로는 마크로티미아(makrothymia)인데, 이 단어 속에 들어 있는 티미아(thymos의 변형)는 ‘분노‘ 혹은 ‘화‘라는 뜻입니다. 오래 참음은 그러니까 분노를 당장 터뜨리지 않고 지연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무리하게 도모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때를 견고하게 기다리는 태도라는 말입니다. 히브리 지혜자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그의 영광”(잠19:11)이라고 말합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오래 참음을 저는 끈질긴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을 줄 것이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겠다”(히6:14) 하신 말씀을 오래 참은 끝에 성취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마18:21-22)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끈질김, 희망의 끈질김이 있을 때 공동체는 든든히 서가는 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서로 용납(forbearing, tolerance, ecclesiastical judge)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환대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말이나 표정 혹은 행동으로 누군가를 밀쳐내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낯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됩니다. 다름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차이를 존중할 때, 우리가 암암리에 설정한 경계를 넘어 타자들의 세계로 다가갈 때 우리는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세계와 접속하게 됩니다.
• 어떤 ‘하나’인가?
국제사회가 자국 중심주의를 강화해가는 추세로 인해 세계는 여러모로 찢겨 있습니다. ‘이익’의 원리가 ‘의’의 원리를 압도할 때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전장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러한 경향에 저항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르고 나누는 세상이지만, 교회는 서로 손을 잡게 해야 하고, 갈라진 것들을 꿰매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교회는 그러한 가름에 앞장서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정죄하고, 악마화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탄은 나누고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스포츠가 된 세상입니다. 이제 교회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3). 주님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셨습니다(엡2:14). 부름받은 이들은 이 아름다운 일치를 늘 지향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고, 성령도 하나고,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고, 주님도 한 분이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고, 하나님도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라는 단어의 반복적 사용은 작은 차이로 인해 분열되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움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모든 하나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것, 약한 이들을 거칠게 동화시키려는 태도는 폭력입니다. 전체주의 사회는 차이와 다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독재자는 ‘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을 통해 차이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를 심판하셨습니다. 동양의 현인들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세상이야말로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조화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것의(of)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above)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through) 계시고 모든 것 안에(in) 계시는 분”(4:6)이라고 말합니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니 계시는 곳이 없는 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접하는 사람들과 자연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텍스트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통해 혹은 낯선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꾸짖으십니다.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거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십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 노을, 사막의 고요, 새 소리, 시냇물 소리, 흘러가는 구름조차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입니다.
이 신비에 눈을 뜰 때 지금 우리를 가르고 있는 작은 차이들은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지체‘가 되라고 불러주신 형제자매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낼 눈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함의 문지방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되고,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용납하려는 마음을 굳게 붙들 때, 하나 됨의 기쁨을 한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찢기고 분열된 세상을 믿음과 사랑으로 기우라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며칠 전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신년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서로 인사를 나누자면서 이상한 구호를 제안했습니다. ‘우하하‘. 무슨 뜻인가 했더니 ‘우리는 하늘 아래서 하나다’의 약자랍니다. 그러면서 옆 사람의 얼굴을 보며 우하하하하 하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라 했습니다. 뒤에 붙은 ‘하하’는 ‘하나다 하나다’라는 소리의 메아리라고 했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우리의 확장된 몸과 마음입니다. 이 속에서 경험한 하나 됨의 기쁨을 안고 세상에 나가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인정의 황무지로 변한 세상을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곳으로 바꾸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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