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근본에 충실한 사람들

천국생활 2017. 11. 6. 08:43

근본에 충실한 사람들
출20:1-7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 근본을 붙들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마틴 루터가 시작한 대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에도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작은 섬 크레타입니다. 그곳에 가 자유를 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았던 한 사람의 무덤 앞에 서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입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것은 그의 책 <토다 라바>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이 문장이 발설된 맥락은 이러합니다.

"배를 타고 가던 한 힌두교도가 큰 폭포 쪽으로 그 배를 밀어내는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웠다. 그 위대한 투사는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노를 걸쳐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 내 인생이 이 노래처럼 되게 하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물살과 더불어 싸웠지만 물살을 이길 수 없음이 분명해질 때 그는 노를 걸쳐 놓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의 노래가 장엄합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에 그는 홀가분하게 죽음 앞에 섭니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에서 매이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범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상이 느껴집니다. 인류의 역사를 자유를 행한 대장정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겠다는 염원 하나를 품고 광야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들은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그 황량한 땅을 낮에는 불볕더위, 밤에는 추위와 싸우며 40년 동안 배회해야 했습니다. 강철처럼 단단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노예로 근근이 살기보다는 자유인으로 살다가 죽겠다는 굳은 결의를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신앙이란 자유를 향한 긴 여정입니다. 욕망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는 세상의 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무거운 것,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고 가벼워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박해하는 사람에서 박해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정신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고,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추구했던 것보다 더 근본적인 자유를 누렸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지만, 다른 이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종이 되기를 자처하는 자유, 오직 하나님께만 매인 해방,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참 자유였습니다. 우리는 그 자유를 향해 부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여전히 욕망의 거리를 바장이며, 가야 할 길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당 정문에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게시했다는 사실은 다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 1조는 95개조 논제 전체의 서론 격입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 하신 것은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복 있는 사람, 2017년 9월 6일, p.93에서 재인용)

회개란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는 것입니다. 머뭇머뭇 이전에 걷던 길을 걷는다면 아직 우리는 회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회개란 근본적 변화, 즉 세상의 인력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인력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 의회에 출두한 루터는 그가 쓴 모든 책과 주장을 철회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철회하거나 거스를 수 없습니다. 지금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불편하거니와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앞의 책, p.123에서 재인용)

근본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근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때 그는 비로소 중세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될 수 있었습니다.

• 해방자 하나님
욕망의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십계명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해방자, 곧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일체의 억압을 제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종교든, 정치든, 이념이든, 문화적 습속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체제에 의해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위계사회의 맨 밑바닥에 머물면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억눌린 신음과 강제 노역에 시달리느라 밤이면 끙끙 앓는 사람들의 소리를 하나님은 모른 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인종의 이름이 아니라, 고대 근동 사회를 떠돌며 살던 유민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잘난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천대받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첫 번째 계명은 다신론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신들마다 특정한 기능을 감당하면서 특정한 장소에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 귀착적입니다. 특정한 공간에 있다는 말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고대 세계의 신들은 대개 사람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왕들과 귀족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 '다른 신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들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들을 비인간화하거나 이등 시민 취급하는 체제나 종교는 성경의 하나님과 무관합니다.

우상을 만들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에덴 이후 인간의 삶은 형제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면서, 인간은 불안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불안, 그것은 안식과 평화가 없는 상태입니다. 삶은 위태롭고, 우리는 늘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붙들어줄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신상을 만들어 집안에 모시거나, 부적을 붙여 액운을 몰아내려 하기도 합니다.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우상숭배는 문명 이전의 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돈, 권력, 명예와 같은 불안의 대용물을 맹렬히 추구합니다. 그 길 위를 질주할 때 다른 이들과 연대하거나, 다른 이들을 환대하며 살 가능성은 점점 줄어듭니다. 어느 신학자는 현대인의 우상은 출세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억울하면 출세 하라는 못된 말이 있지만, 출세의 사다리 높은 곳에 이른 사람일수록 불안감을 더 느낍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설 땅이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가끔 성공해서 불행해진 사람들을 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불안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지나치게 행복해지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승하면 정작 누려야 할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고 보내주신 이들로 여겨 존중하고 아껴야 합니다. '나'를 '너'에게 기꺼이 선물로 내주려 할 때 불안은 줄어들고 평안과 기쁨이 스며듭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요 기쁨입니다.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면서 안식을 얻는 길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우상에게 퇴거를 명령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상은 그 뿐이 아닙니다. 종교조차 우상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참 사람다운 삶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삶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구원받았다는 고백은 있으나 구원받은 삶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채 드리는 제물의 향기가 역겹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성전의 마당만 밟은 이들이 많습니다. 종교 혹은 교회조차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삶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는 시대가 또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저주하고, 전쟁을 선포하기도 합니다. 자기 확장의 욕망에 분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들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교회 세습이라는 음습한 욕망과 작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 문제가 일간지의 사설에까지 등장하는 현실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제게는 그게 바벨탑 쌓기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상식과 부합하지 않을 때, 우리 속에 허위의식이 발동하게 마련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언제나 권력자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실은 자기 욕망의 소리를 들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이 참 많습니다.

• 그리스도의 몸
아드 폰테스ad fontes, 이것은 종교개혁의 구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근원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정신입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해도 예수 정신이 살아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 해도 예수 정신이 가물거린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산 교회와 죽은 교회로만 구별될 뿐입니다. 예수 정신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은 없습니다. 모두가 아끼고 존중해야 할 이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많은 장벽들을 철폐함으로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나옵니다만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는 말이 현실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는 인간의 운명 속으로 뛰어드셨습니다. 비릿한 욕망과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럽다 아니하시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자는 진리에 깊이 접속된 사람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그려낸 바 있습니다.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도덕경4장)이 그것입니다. 날카로움을 감추고, 얽힌 것을 풀어내고, 스스로 빛나려 하기보다 그 빛을 부드럽게 만들고, 티끌과 하나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 말처럼 보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케노시스 찬가'와 유사합니다. 근본으로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지만 스스로를 비워 종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 말입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걸으셨던 고난의 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길은 예루살렘성의 동쪽에 있는 스데반 문 안쪽에서 시작되는 길인데, 좁고 지저분하고 번잡스러운 시장통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은 가방을 앞쪽으로 메고, 가이드를 따라 총총 걸음을 걷습니다.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길이 그렇게 시장통을 통과하는 것 자체를 통탄하기도 합니다. 고요한 묵상이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주님은 인간의 현실 저 너머에서 진리를 가리켜 보인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의 한복판에 들어오셔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비아 돌로로사가 아랍인들의 상가를 관통한다는 사실이 제게는 계시처럼 보입니다. 진리는 바로 그런 곳에서 체현되어야 합니다. 철학자 김진석 선생이 만든 조어 가운데 '포월匍越'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뻘밭과 같은 현실의 밑바닥에서 기다가 마침내 그것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육신의 신비가 있습니다. 현실을 도외시한 진리의 추구는 관념일 뿐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그 교회가 오늘날 중병에 걸렸습니다. 회복의 조짐보다 몰락의 조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가 되기 위해 십자가를 택한 그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세상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병든 세상을 치유하려 할 때 교회는 다시금 일어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을 청산하는 것, 멸시와 천대 받는 이들 곁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들 곁에 다가가는 것, 공포와 선망의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인답게 사는 것,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 앞에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 이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삶이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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