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을 늦추고
사51:1-5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도움을 받으려고 나 주를 찾는 사람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바위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떨어져 나왔다. 저 구덩이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나왔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고, 너희를 낳아 준 사라를 생각하여 보아라 “내가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은혜를 내려서, 그 자손을 수없이 많게 하였다.” 주님께서 시온을 위로하신다!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신다. 주님께서 그 광야를 에덴처럼 만드시고, 그 사막을 주님의 동산처럼 만드실 때에,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이 깃들며, 감사의 찬송과 기쁜 노랫소리가 깃들 것이다. 나의 백성아,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나의 백성아, 내 말을 귀담아 들어라. 법은 나에게로부터 비롯될 것이며, 나의 의는 만백성의 빛이 될 것이다. 나의 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고, 나의 구원이 이미 나타났으니, 내가 능력으로 뭇 백성을 재판하겠다. 섬들이 나를 우러러 바라보며, 나의 능력을 의지할 것이다.]
• 삶은 고마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입동을 눈앞에 둔 지금 온 산하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저마다의 자태를 자랑합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세상 만물들이 생성과 소멸의 순환 속에 있습니다. 주님이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시편 시인의 말처럼 “주님께서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104:30). 오늘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추수가 끝난 저 허허로운 벌판도, 바람에 흔들리는 저 갈대와 코스모스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증언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저마다 삶의 형편은 다르지만 산 자의 땅에서 주님의 이름을 찬미할 수 있음이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요!
세상에 걱정 근심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짐이 너무 무거워 비틀거릴 때도 있고, 어떤 짐도 가든하게 짊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롭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 새로운 일을 꿈꾸어 보기도 하지만,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 우리 삶에 안정성을 부여해줍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평온한 일상을 누릴 수 없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을 떠돌고 있는 난민들이 그러하고,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 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며 별 일 없는 사는 게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장기하라는 가수가 여러 해 전에 부른 노래 가사가 떠오릅니다.
“니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뭐냐 하면/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별일 없이 산다’ 중에서)
장기하는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 않을‘ 이야기,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겁다/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가수가 표정 없는 얼굴로 노래를 부르기에 이 가사는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하루하루 사는 게 즐겁고, 매일매일 신나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왜 그리도 많고, 세상에는 왜 그리도 슬픔과 고통이 많은 걸까요?
우리 가운데에는 인생의 황무지를 지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늘조차 찾기 어려운 팍팍한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 말입니다. 편안한 처지에 있는 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기왕 그런 현실에 처했다면 그 상황으로부터 뭔가 얻어내야 합니다. 엉덩이뼈가 탈골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사자에게 떼를 썼던 야곱처럼 말입니다(창32:26). 인생의 광야는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를 단련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광야와 같은 현실은 때로 우리에게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광야에서 필요한 것은 몇 리터의 물과 인내 그리고 삶에의 의지입니다. 광야를 거친 이라야 한 조각의 그늘, 밤 사이에 내리는 이슬조차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반역하는 병에 걸렸던 백성들을 고쳐주시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릴 것이니,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다”(호14:5). 주님의 은총은 이렇게 은밀하지만 넉넉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은 이슬처럼 내리는 은총보다는 소낙비처럼 내리는 은총을 구합니다. 그래서 이슬처럼 내리는 은총에 무감각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일상 속에서 이슬처럼 다가오는 은총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 인생은 고마움이 됩니다.
• 느림 속에서 얻는 깨달음
오늘 본문은 주전 6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유배는 늘 죄의 결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났고,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방황의 운명 속으로 떨어졌고,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이스라엘은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죄는 그처럼 우리를 뿌리로부터 단절시킵니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들에게 이제 주님의 구원이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지가 예언자를 통해 전달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도움을 받으려고 주를 찾는 사람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다른 번역본은 그 구절을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가톨릭성경)이라 옮겼습니다. 현실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스바냐서 2장 3절은 올바로 살려고 힘쓰고, 겸손하게 살도록 애쓰는 사람들이 주님을 찾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추구와 올바른 삶이 곧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포로민들을 구원을 사모하는 이들로, 주님을 찾는 이들로 인정해주십니다. 비록 지금은 처량한 신세이지만 낙심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저 바위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떨어져 나왔다. 저 구덩이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나왔다.“(1b) 이 구절은 2절과 연관됩니다. 바위와 구덩이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녀나 후손을 가질 희망이 사라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이들입니다. 외롭고 쓸쓸한 나그네 인생을 살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늘의 별처럼 많은 이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15:5). 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이문재 시인은 ‘지금 여기가 맨 앞’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맨 끝이 곧 맨 앞이라면서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라고 노래합니다. 나무의 경우 우듬지나 실뿌리는 안에서 보면 맨 끝이지만 밖에서 보면 맨 앞입니다. 우리 현실도 그렇습니다. 절망의 끝이 희망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현실에 짓눌려 있으면 그런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시선을 끄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보아라’, ‘생각하여 보아라’ 등이 그것입니다. 번잡한 생각을 잠시 거두고, 세상을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여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면 절망의 어둠이 스러지게 됩니다.
• 위로하시는 하나님
제2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을 위로하신다!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신다.“(3) 예레미야는 일찍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황폐하게 변한 땅, 가시와 엉겅퀴만 무성한 땅, 불에 탄 성전,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울었습니다. “도성 예루살렘아, 너를 무엇에 견주며, 너를 무엇에 맞대랴? 도성 시온아, 너를 무엇에 비겨서 위로하랴? 네 상처가 바다처럼 큰데, 누가 너를 낫게 할 수 있겠느냐?”(애2:13). 상처 입은 시온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맨 끝이 맨 앞인 것과 마찬가지로 황폐한 곳이야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여도 ‘보는 사람’인 예언자의 눈에는 그게 보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겪어내야 할 어려움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조차 꿀 수 없는 시대에 예언자는 새로운 역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 광야를 에덴처럼 만드시고, 그 사막을 주님의 동산처럼 만드실 때에,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이 깃들며, 감사의 찬송과 기쁜 노랫소리가 깃들 것이다.”(3b)
건기에 네게브 사막이나 유대 광야 혹은 요르단의 고원 지대를 지나다 보면 황량하고 허허로운 풍경에 마음이 쓸쓸해지곤 합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따금 서 있는 싯딤나무 뿐입니다. 생명의 기척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광야에도 오아시스 지대가 있습니다. 비가 올 때 석회암 지대 안으로 스며들었던 물이 안으로 흐르다가 솟구쳐 나오는 곳입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홍해를 건너 온갖 시련 끝에 당도한 엘림 같은 곳 말입니다. 그곳에는 샘이 열두 곳이나 있었고, 종려나무가 일흔 그루나 있었다고 합니다(출15:27). 우기가 찾아오면 광야도 깨어납니다. 그것은 마치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나는 기적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에 걸쳐 있는 황량하고 건조한 땅 데스밸리(Death Valley) 국립공원은 북미에서 가장 낮고 건조한 지역이라 합니다. 강수량은 적고 기온은 높아 도무지 생명이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6년에 그곳에서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났던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Death valley wildflower super bloom‘을 찾으면 누구나 그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척박해 보이는 땅도 생명의 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절망 속에도 희망의 씨는 남아 있는 법입니다. 제 아무리 척박해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꽃들은 피어나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의 희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이런 당당함의 근거는 우리 속에 있는 심겨진 예수의 생명입니다. 참 생명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제2이사야는 절망의 땅, 눈물의 골짜기에 처한 이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궁극적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희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희망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의는 만백성의 빛
제2이사야가 전하는 좋은 소식은 그들이 포로생활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만이 아닙니다. 진짜 좋은 소식은 세상을 다스리는 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될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만백성의 빛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백성을 지켜낼 힘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정의와 공의, 인애와 긍휼을 저버린 백성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형벌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그 백성들로 인하여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을 친히 회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출34:6)
우리가 거듭 잘못을 저지를 때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시지만 우리를 포기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리고 기어코 우리를 새롭게 빚어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제2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사42:6-7)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이끌어 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번 여정 중에 베들레헴 예수 탄생교회를 향해 가던 차 안에서 저는 가이드에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을 차단하기 위해 둘러친 분리장벽에 사람들이 그린 벽화를 볼 수 있도록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6미터 높이의 장벽은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차가 멈춘 곳에서 우리가 처음 만난 벽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의 초상화와 그가 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유 없이는 우리의 자유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 장벽은 그 사실을 여실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장벽 그림을 따라가다가 저는 후미진 구석에서 팔레스타인 젊은이 둘을 만났습니다. 벽화를 보고 있는 제게 그들은 말을 건네왔고, 저도 그들을 격려하는 말을 건넸습니다. 상황이 암담하기는 하지만 언젠가 이 장벽은 무너질 것이고,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한껏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니 희망을 품으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담담한 어조로 내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지만,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분리장벽보다 더 높은 장벽은 그들의 가슴에 드리운 패배의식 혹은 절망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절망의 자리에서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절망에 빠진 이들은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전히 포로생활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세상의 희망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비전을 가슴에 품는 순간 절망의 장벽에 틈이 생기고 그 속으로 하늘의 빛이 새어 들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과 불통의 세상에 균열을 내고, 마침내 장벽이 무너진 세상을 만들라는 소명 앞에 있습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깊고 놀라운지요? 추수감사주일,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은총에도 감사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초대해주심에 더욱 감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낯을 피하여 (0) | 2017.11.21 |
---|---|
근본에 충실한 사람들 (0) | 2017.11.06 |
한몸의 지체들 (0) | 2017.10.23 |
함께여서 좋은 사람들 (0) | 2017.10.19 |
증언으로서의 삶 (0) | 2017.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