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으로서의 삶
요5:31-38
["내가 내 자신을 위하여 증언한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못하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 주시는 분은 따로 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에 그는 이 진리를 증언하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사람의 증언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너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면서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잠시 동안 그의 빛 속에서 즐거워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주신 일들, 곧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 주셨다. 너희는 그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그 모습을 본 일도 없다. 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것은 너희가, 그분이 보내신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누구인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모처럼 맞이한 긴 연휴를 보람 있게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친밀해야 할 가족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서로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많으면 원망과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사랑하고 존중하되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게 평화로운 삶의 비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에서는 유능한 사람인데 정작 가족관계에서는 지옥을 만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 자기 영혼 살피는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역할과 가족 관계에서 요구되는 역할이 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장소와 시간,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 따라 우리 역할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회나 어떤 집단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일러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영역에 속합니다. 일종의 가면입니다. 그것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반면 몸과 마음에 각인된 기억 혹은 태도를 가리켜 '버릇'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하는 말이나 행동은 노릇이고, 나도 모르게 불쑥 하는 말이나 태도는 버릇입니다. 노릇도 중요하지만 버릇도 중요합니다. 남이 보든 보지 않든 한결같이 삼가는 태도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일러 신독愼獨이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서려면 사람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모든 공부는 참 사람이 되는 길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0년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인생은 오리무중입니다. 세월이 저절로 지혜를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밤새도록 바쳤던 기도는 딱 두 마디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나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합니다. 군목 시절에 '인격 지도'라는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주제로 병사들 교육을 시키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주제넘은 주제였습니다. 저는 중대장, 소대장, 선임하사 등 간부들을 다 내보내고, 병사들이 편한 자세로 앉아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한번은 종이를 나눠주고 내가 묻는 열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 질문은 시종일관 '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처음 서너 번 질문을 던졌을 때 병사들은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대답을 적었습니다. '나는 ~이다', '나는 농부인 ~의 아들로 ~에서 태어났다', '나는 ~ 부대의 소총수이다', '나는 ~의 애인이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답을 적어가던 병사들도 질문이 거듭될수록 조금 진지해졌습니다. 늘 남을 살피며 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있는지를 묻지 않은 채 그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연기하며 살고 있다는 자각이 때로는 우리를 아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의 인정 여부에 따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 요구에 응답하려다 보니 숨이 가빠집니다.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 자기를 입증해야 하는 사람들
세상에는 끊임없이 자기를 입증할 것을 요구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직장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낯익은 세계를 떠나 낯선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사람들은 다 약자로 변합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괜히 눈치를 보게 됩니다. 사람의 의사소통은 언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맥락이 참 중요합니다. 익숙한 곳에서는 '척 하면 척'이라는 말처럼 대충 이야기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던 맥락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귀 기울여 들어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리 못할 때도 많습니다. 이주 노동자들, 다문화 가정에 속한 이들, 자기 나라에서 살 수 없어 조국을 떠나온 난민들,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매 순간 자기들을 향한 사람들의 가파른 시선을 견뎌야 합니다. 그들은 사회 불안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받거나, 일상의 안온함을 깨뜨리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순간순간 자신들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정착 생활을 할 때 나그네들을 선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으니 그들의 신산스런 마음을 잘 알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과 모른 체 하는 것이 바로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과 가르침 그리고 실천은 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은 주님의 그런 말씀과 실천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구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습니다.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도 그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셨습니다. 그게 그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아름다운 원로들과 함께 보았던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기억납니다. 일본군에 의해 성 노예로 살아야 했던 김옥분 할머니는 자기의 아픔과 과거를 숨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까칠한 사람입니다. 소소한 잘못도 다 시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한평생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증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친구가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친구가 못 다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 하원 청문회의 증언대에 서기로 작정합니다. 일본측 대리인들은 김옥분 할머니가 종군 위안부 명단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증언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그래도 그는 기어이 증언대에 서서, 일본군에 의해 자기 몸에 새겨진 폭력의 흔적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상처 자국,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할머니의 상처는 그의 몸 뿐 아니라 영혼에 찍힌 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 일평생 한사코 숨기려고만 했던 과거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과감히 드러냈습니다. 상처가 꽃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의 말미에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6:17)라고 말했습니다. '상처 자국'은 헬라어 '스티그마'를 번역한 말로 문신 혹은 낙인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스티그마를 그의 삶이 철저히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더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고 따르기 위해 그가 감내해야 했던 숱한 고생과 고난의 흔적이 그의 몸에 얼룩무늬 상처처럼 새겨져 있었을 겁니다. 바울은 그 상처 혹은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흔적이었기에 그 흉터는 아름다운 무늬였습니다. 먹감나무가 상처를 통해 유입된 물기를 무늬로 바꿔내듯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입은 상처를 아름다운 증언의 무늬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 타오르면서 빛을 내는 등불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당신에 대해 증언했다고 말합니다. 한번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면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묻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요1:26-27) 어느 날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요1:36). 바로 이것은 요한의 증언입니다. 주님은 요한을 가리켜 '타오르면서 빛을 내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무고한 이들의 피가 점점이 스며든 땅의 현실을 보고 분노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움을 입었으나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사는 무리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자처했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는 외쳤습니다. 그게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역사의 어둠을 향해 온몸을 내던져 파란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불꽃은 잠시 동안 타오른 후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에게 붙잡혀 마케루스 산성에 갇힌 요한은 아마도 죽음을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눅7:19) 주님은 그 물음에 간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눅7:22-23) 당신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기적이 곧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누구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 소명을 이루는 삶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주신 일들, 곧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36).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 진술이 아닙니다. 사는 모습이 곧 우리 존재에 대한 증거입니다. 자기 진술과 실체가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눈이 어두웠던 이삭은 축복해달라고 별미를 만들어 자기 앞에 가져온 야곱의 정체를 의심합니다. 염소새끼 가죽을 손과 목덜미에 둘러 털이 많은 에서로 변장했지만 이삭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이 오간 후에 그는 혼자 중얼거립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구나"(창27:22). 소리와 실체가 다른 이들이 참 많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혐오와 배제의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을 말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늘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화해와 용서를 말하면서도 불화를 자아내고, 타자에 대한 미움을 가슴에 품고 살기도 합니다. 이런 허위의식을 믿음으로 포장하고, 고백과 삶의 부조화를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덮으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몸짓 하나하나가 곧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기독교인들의이 지향해야 할 삶의 원리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릇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삶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言)을 이루는(成) 삶이 곧 성실한 삶, 신실한 삶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혹은 따른다 하면서도 정작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신앙이 일상 속에 깊이 배어들지 못할 때 우리는 겉 다르고 속 다른 거짓 신자가 되게 마련입니다. 퇴계 이황은 제자이자 문인인 남시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젊은 날의 공부가 방향을 잘못 잡았더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이(理)는 일상생활 곳곳에 가득 차 있습니다. 오직 평소의 언어와 동작에 있고, 사람이 언제나 지켜 고행해야 할 도덕적인 응접을 실행하는 사이에 있습니다.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한 것입니다." 퇴계는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일상에 충실하지 못한 채 고심 원대한 것을 탐구할 때 헛공부가 되기 쉽다면서 송나라 학자인 연평(延平)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 도리는 오로지 일상생활에서 익숙하게 되는 데 있다"(이황, <자성록/언행록/성학십도>, 고산 역해, 동서문화사, 2014년 6월 1일, p.22-23). 그래서일까요? 복음주의권에서 깊은 존경을 받는 어느 원로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향해 '성경공부는 이제 그만 하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공부를 위한 공부는 우리를 진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들기 쉽다는 뜻일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강렬한 도전이 되어 다가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녹아들고, 그분의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 소외된 사람의 벗이 되어주려 했던 그분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불 일듯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을 부자유하게 하는 일체의 허위의식을 훨훨 벗어버리고, 사람을 옭아매는 그릇된 권위를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 달음에 그 목표에 당도할 수는 없다 해도, 다만 한 걸음씩만이라도 그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우리 존재에 대한 증언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아름다운 가을 날, 우리가 거둔 생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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