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꿈은 아니리
사19:23-25
(2017-10-01, 세계성찬주일)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세계성찬주일로 지키는 오늘, 전 세계의 분쟁지역에도 주님의 은총이 햇살처럼 환하게 내리기를 빕니다. 며칠 전 저는 어디선가 우련하게 들려오는 어떤 노랫가락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곡은 제 입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문승현 씨가 만든 '그 날이 오면'인데 서정적인 멜로디에 담긴 가사가 가슴을 울립니다.
"한 밤의 꿈은 아니리 모진 고통 다 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피 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이 곡이 제 가슴에 깊이 울려온 것은 요즘 들어 평화 없는 세상, 전쟁과 테러, 혐오와 저주의 언어가 넘치는 세상이 너무 슬프게 다가왔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안일한 행복을 뒤로 한 채 더 큰 공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좋은 세상의 꿈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입니다. 세상 때문에 아파하는 이들의 눈물과 좋은 세상을 열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이들의 땀방울이 함께 흐르다가 마침내 드넓은 바다에 당도하고, 거기서 정의의 물결로 출렁이는 꿈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 아름다운 원로 나들이에 동행했을 때 홀로 을왕리 해변의 바위에 앉아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문득 어떤 힘이 이 물결을 일렁이게 할까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밀물과 썰물은 달을 비롯한 천체의 인력으로 인해 발생하고, 파도는 바람 때문에 인다는 것은 압니다. 정작 제가 궁금했던 것은 그게 아니라 어떤 충동이 혹은 어떤 그리움이 바다를 일렁이게 하는가 하는 은유적 궁금증이었습니다. 시간 여행자인 우리도 늘 일렁이며 삽니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가벼움과 무거움, 슬픔과 기쁨이 시도 때도 없이 갈마듭니다. 어떤 때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신비하고 놀라워 감사의 심정에 사로잡히고, 또 어떤 때는 생이 권태롭고 힘겨워 원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둘 다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경우든 충실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향해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인격적으로는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발전해 나아가야 하고, 역사적으로는 모두가 한껏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누리고 사는 하나님 나라를 꿈꿔야 합니다. 이 이중적 과제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덴 이후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상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인간은 그렇기에 제도나 국가를 통해 행동을 제약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 분석입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국가도 온전한 평화를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세계 1,2차 대전을 겪은 인류가 공멸의 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UN이라는 기구를 만들었지만 UN은 강대국들이나 전체주의 국가의 독주를 가로막지 못합니다. 지금 한반도가 겪고 있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정말 간절히 이 땅의 평화를 원합니다.
• 어처구니 없는 꿈
주전 8세기 사람인 이사야는 강대국인 앗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 낀 채 전전긍긍하던 조국의 운명 때문에 심히 아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힘을 숭상하는 나라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특히 앗시리아와 이집트에 대한 심판은 엄중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앗시리아를 죄지은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한 몽둥이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나의 진노의 몽둥이요, 그의 손에 있는 몽둥이는 바로 나의 분노다"(사10:5). 하지만 앗시리아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정도 이상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거드름을 피우고, 사람들을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앗시리아의 몰락을 예고하십니다. 제 힘만 믿고 기고만장한 이집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가 세상의 기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세력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은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루터기 같은 이들은 남겨두십니다. 이사야는 이집트 땅에도 만군의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이 세워지고,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사19:19). 출애굽 당시의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의 재앙이었습니다. 이집트 온 땅에 흑암이 내렸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었다고 합니다(출10:23).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희망의 단초는 있는 법입니다. 산불이 나서 나무들이 다 잿더미로 변해도, 이듬해 봄이 되면 새싹이 바닥에서부터 돋아나듯이 희망은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희망의 단초가 되어야 합니다. 분쟁과 갈등의 땅에서 평화의 씨를 심고, 절망의 땅에 희망의 씨를 심고, 인정의 황무지에 인간적 따스함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사야는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앗시리아와 이집트 그리고 이스라엘은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기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몰락을 기원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서 두 나라 사람들이 피차 오고가면서 함께 주님을 경배하는 세상 말입니다.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가 주님의 뜻 안에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될 때, 그들은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전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께서 그 세 나라에 복을 주시면서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25) 하실 때를 바라봅니다. 예언자들은 꿈꾸는 자들입니다. 헛된 꿈인 것 같지만, 그 꿈조차 없다면 생명과 평화의 세상은 영영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남과 북,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 사이에 큰길이 생겨나는 꿈은 헛된 꿈에 불과할까요?
• 'Colour in Faith'
사람의 눈으로 보면 국경과 인종에 따라 세상이 갈라져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하나입니다. 모두가 하나가 된 세상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힘 있는 나라에 동화되기를 강요받았던 민족들이 독립을 꿈꾸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라크 북부의 크루드족들이 독립 투표를 했고,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과 바스크 지방이 독립을 꿈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스코틀랜드,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프랑스의 코르시카도 독립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것 자체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갈라짐이 분열과 갈등의 단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공존의 토대가 될 수 있느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눕니다. 주님은 당신의 온 몸으로 세상이 만들어놓은 온갖 장벽들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장벽을 사이에 둔 두 집단은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장벽이 높을수록 서로에 대한 의구심은 높아만 갑니다. 적대적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상대방을 더욱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장벽을 낮춰가면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는 장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장벽을 쌓는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변해야 할 때입니다.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인도 출신의 케냐인이면서 이슬람 신자인 나빌라 알리바이(Nabila Alibhai)가 최근에 한 TED 강연의 제목은 "서로 다른 신앙 전통에 속한 이들이 그들의 예배처소를 노란색으로 칠한 까닭은 무엇일까?"입니다. 나빌라 알리바이는 종교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인종주의로 인한 두려움이 증대되는 현실 가운데서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용감하게 그리고 가시적으로 함께 서게 할 수 있을까?", 그런 물음 끝에 만든 것이 'Colour in Faith'라는 단체입니다. 그들은 각 도시에 있는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는 종교인들을 만나 누구라도 평안한 마음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데 합의했고, 합의의 징표로 각 종교의 예배 처소, 즉 모스크, 교회, 힌두교 신전을 노란색으로 도색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에 속한 이들이 함께 모여 다른 종교 신전을 노란색으로 칠하면서 그들은 평화의 기운과 연대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노란색은 햇빛을 나타내는 색으로 하나님께서는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주신다는 생각을 반영한 색이었습니다. 'Colour in Faith'는 세계 여러 나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이집트 땅 한 가운데 세워진 주님을 섬기는 제단이 아닐까요?
장벽 허무는 자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도 분열된 세상을 꿰매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하나 둘 축적될 때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오늘 우리의 노력이 헛된 꿈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의 꿈 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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