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세상을 향해 열린교회

천국생활 2017. 9. 10. 23:22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
고전1:1-3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 교계 현실 유감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뒤숭숭한 일들로 인해 우리 마음이 무겁습니다. 여중생 폭행 사건은 우리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행된 가혹한 폭력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약자 괴롭히기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몸은 살았지만 정신은 죽은 좀비들의 세상이 영화 속 현실이 아니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서구의 한 동네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장애인 학교를 일종의 혐오시설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학교는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며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은 장애인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아파트 시세 떨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맘몬을 섬기는 세상의 살풍경입니다. 게다가 한반도의 상황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북한의 거듭되는 도발에 국제사회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성주에 사드 포대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우리 앞에는 이중적 과제가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향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과, 위기에 처한 생명을 돌보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 말입니다. 짙은 안갯길을 걷는 것처럼 우리 발걸음이 조심스럽습니다.

이러한 때 교회연합주일을 지키는 심정이 착잡합니다. 얼마 전에는 보수적인 교단의 신학자들이 감리교회를 이단으로 간주해도 좋다고 말해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 판단의 근거는 존 웨슬리의 글 어디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고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무지하고 무례한 이들의 말에 응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장벽들을 철폐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장벽들을 세우고, 경계선 밖의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들이 딱할 뿐입니다. 이전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였지만, 지금은 한국기독교총연맹, 한국기독교연합 등 여러 단체가 할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연합을 표방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갈라지고 있는 것은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조금 박하게 평가하자면 이런 단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정신이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리스도의 뜻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일반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켜야 할 표지로서의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연합하여 선을 이루면 좋겠지만, 오히려 사회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 보편 교회, 지역 교회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도입 부분입니다. 가만히 눈여겨보면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먼저 바울은 발신자인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자인 동시에 보냄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모든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에서도 그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엡3:7)이라고 말합니다.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보내심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집니다. 부르심에만 감격하여 자신이 보내심 받은 존재인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 이름을 이슈마엘이라고 해두자"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 이슈마엘은 자신은 선장도 손님도 아닌 선원으로 배를 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부름 받은 이들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상황을 자기 방식대로 주도하려거나 대접 받으려는 태도를 품으면 곤란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일꾼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발신자의 이름에 '소스데네'를 병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던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는 바울로 인해서 빚어진 소요 사태로 인해 군중들에게 매를 맞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주님을 영접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소스데네의 이름을 서신에 적시한 것은 공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낸 서신이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견해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또한 그에게 집중되기 쉬운 상징적인 권력을 다른 이에게 분배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바울이라는 자연인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그가 원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편지의 수신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보편적 교회이지만, 개별적인 교회는 또한 지역적 교회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는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해야 합니다. 각각의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의 문제에 복음적으로 응답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치열하게 노력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지방에 있는 신창제일교회와 교인들은 여러 해 동안 용산에 세워졌던 화상경마장 철폐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 시설이 학교 정문에서 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의 피폐해진 삶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더러 동참하여 말씀을 전하기도 했지만 신창제일교회는 매주 금요일마다 거리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화상경마장의 이전이 결정되었습니다. 정말 놀랍고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지역의 현안에 교회가 믿음으로 참여한 곳은 예가 되었습니다.

조금 더 본문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은 바울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구절은 주님의 삶과 죽으심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이들이 언제라도 돌아가야 할 고향이 어디인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정신과 무관한 일을 추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부인否認보다도 더 악한 일입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일상적인 삶과 구별되는 어떤 것일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빵이 성찬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빵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재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봉헌된 것이기에 거룩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이란 기도, 금식, 구제, 예배 등 종교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자기 이익에 입각해서 펼쳐지는 삶은 더러운 삶이 되기 십상입니다. 어느 분이 '더럽다'는 단어를 '덜 없다'고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자아가 맑게 비워질수록 깨끗한 존재가 됩니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24일에 쓴 시 '참회록'에서 일본 유학을 위해 부득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면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마저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게 닦고 또 닦아야 우리는 조금씩 더러움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 세상에 흩어진 교회
바울의 편지 수신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교인만이 아닙니다. 그는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문안드린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지칭하는 게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구절로 미루어볼 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차이가 그들을 갈라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특권의식에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지역, 인종, 문화, 전통의 차이가 사람들을 갈라놓을 때가 많습니다.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나를 받아들여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그런 소속감은 타자들에 대한 배제 혹은 적대감의 산실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충성하느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협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최근에 저는 Chetan Bhatt라는 인도계 영국 사회학자의 짤막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기원 신화를 과감히 거절하기'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낯선 이들을 향해 던지는 우리의 질문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대개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Where are you from?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Chetan은 이제 Where are you going?을 묻자고 말합니다. 인종, 나라, 종교, 피부색이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떤 지향을 갖고 사느냐 입니다. 공유해야 할 과거가 별로 없었던 탈출공동체에게 하나님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지향점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미얀마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방글라데시에 유입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국민 다수가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무슬림인 로힝야족은 설 자리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종교간의 갈등이 삶의 자리를 박탈하는 폭력으로 번진 것입니다. 종교적 차이 혹은 문화적 차이가 인간성을 부정하는 형국입니다. 말레이시아에도 많은 미얀마 난민들이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들을 쫓아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쿠알라룸푸르에는 미얀마 난민들, 그 가운데서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분투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어디를 가든 그들이 제 역할을 하며 살도록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여러 군데에 '난민 학교'가 세워졌고, 그 학교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유물, 일자리, 언덕과 숲, 전통, 다양한 관계, 언어까지도 빼앗긴 이들을 섬기면서도 더 잘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이들을 보며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고향이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은퇴 이후에 말레이시아에 들어가 자신의 생활비를 헐고,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아들의 후원을 받아 매일 100여 명의 미얀마 어린이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감리교 권사님 내외분을 만났습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바짝 마른 아이들을 보면서 든든한 밥 한 끼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작한 그 일이 벌써 몇 해에 이르렀습니다. 아이들의 피부가 윤택해지고, 살이 오르는 모습을 보며 그분들은 행복해했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긍정의 현장이 곧 그분들의 교회였습니다. 그분들의 목표는 예수쟁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그런 곳일 겁니다.

• 은혜와 평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은혜와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은혜 곧 카리스charis는 우선은 하나님의 도우심 혹은 하나님의 자기 증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 또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주셨습니다. 갚을 길 없는 은혜입니다. 은혜의 또 다른 차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부어주시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주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고후8:2).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울 마음을 심어주신 그 은혜는 낯선 이들을 사랑의 끈으로 묶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 우리는 분열된 세상에서 화해자로 사는 기쁨을 한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에 북받쳐 살 때 세상에 평화가 기적처럼 돋아날 것입니다. 누구라도 평화로운 세상에 단 걸음에 당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을 믿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낙심하거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리라는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호세아서에서 주님은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호10:12)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우리 소망의 뿌리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이 현실 속에서 구현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교회가 그런 소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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