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종말과 도리--부목사설교

천국생활 2017. 9. 10. 23:21

종말과 도리
렘 21:1-7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제사장을 예레미야에게 보냈을 때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전할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주셨다. 그 때에 그들이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발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주십시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행여 주님께서, 예전에 많은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느부갓네살이 우리에게서 물러갈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시드기야 왕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지금 성벽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바빌로니아 왕과 갈대아 군대에게 맞서서 싸우려고 무장을 하고 있으나, 내가, 너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쟁무기를 회수하여, 이 도성 한가운데 모아 놓겠다. 내가 직접 너희를 공격하겠다. 이 분노, 이 노여움, 이 울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팔을 들고, 나의 손과 강한 팔로 너희를 치고,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이 도성에 사는 모든 것을 칠 것이니, 그들이 무서운 염병에 걸려 몰살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다음에, 염병과 전쟁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이 도성의 사람들, 곧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을,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들의 원수들의 손과,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의 손에, 포로로 넘겨주겠다. 느부갓네살은 포로를 조금도 가련하게 여기지 않고, 조금도 아끼지 않고, 무자비하게 칼로 쳐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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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으로 성큼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드는 주일 아침입니다. 새로운 계절을 맞아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은총이 여기 모인 우리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큰 위기 속에 있는 이 한반도와 큰 홍수 피해를 본 남아시아 국가들과 미국 위에도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 종말적 무력감
지난 화요일 새벽에 북한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평양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일본 상공을 지나 태평양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올해만 해도 벌써 13번째 탄도미사일 발사입니다. 앞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를 운운하며 북한을 향한 공격 가능성을 내비치자 북한은 미국의 군사기지가 있는 괌을 포위 사격하겠다,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북한이 잠시 대화 자세를 취하는듯하며 조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이번 북한의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의 위기감은 더욱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북한은 ‘태평양 작전 시대’를 선포하고 계속된 도발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핵실험의 징후들도 포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미국은 “모든 옵션은 테이블 위에 있다”라며 북한을 향한 선제공격의 가능성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북한이 ‘궁지에 몰린 쥐 고양이 무는 식’으로 미국을 향한 직접적인 도발을 강행한다면, 또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보복 공격했듯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이 한반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최근 북한의 미사일 도발 직후 청와대는 긴급안보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곤 ‘북한은 더 이상의 도발을 하지 마라. 도발 시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똑같이 했던 말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정부는 그간 실질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그리고 미국의 변화를 조금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것은 앞으로도 우리 정부가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끌어낼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 오랫동안 대화의 통로를 막고 살아온 결과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바가 너무 적습니다. ‘아, 정말 이건 아닌데. 일이 이렇게 되어나가서는 안 되는데’ 수십 번 생각하게 되지만 당최 어디서 어떻게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에 무력감, 무기력감이 몰려옵니다.
전쟁과 같은 종말적 사건은 아니더라도 사실 우리의 삶에는 우리를 무력감 속으로 몰아넣는 일들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질병, 사고,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의 단절과 파탄 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런 일들은 우리를 일종의 ‘종말적 무력감’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삶의 방향을 놓치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그래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차라리 삶이 이렇게 끝나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만드는 무력감 말이죠.

• 예레미야
주전 6세기의 유다의 상황은 오늘의 한반도의 상황보다 훨씬 좋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유다에 왕으로 세웠던 시드기야가 자신을 배신하고 이집트 쪽에 가 붙자 대군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내 부탁합니다.
“제발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 달라.”(2절) 이에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긴 말씀을 조금 줄여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지금 성벽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바빌로니아 왕에 맞서서 싸우려고 무장을 하고 있다. 내가 직접 너희를 공격하겠다.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이 도성에 사는 모든 것을 칠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넘겨줄 것이며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이 조금도 아끼지 않고 칼로 쳐 죽일 것이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에 항복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목숨만은 건질 것이다.’(4-10절)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 유다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그 말에 모두 놀랐을 것입니다. 너무 충격적이고 과격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때,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이다’, ‘적들을 반드시 물리쳐주실 것이다’, 라는 희망적이고 힘이 되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빌로니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유다를 치실 것이다’,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라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예레미야는 유다의 예언자가 아니라 바빌로니아의 예언자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의 사람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의 인생사를 살펴보면 예레미야는 유다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했으며, 친구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았습니다. 나라의 멸망을 내다보면서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모진 말로 멸망과 심판을 예언해야만 했던 예언자, 그로 인해 모욕당하고 외면당했던 예레미야는 자기의 생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돼야 했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20:17)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런 깊은 절망과 무력감 속에서도 유다 왕과 유다 왕실을 향해 두 가지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라, 고통받는 사람을 구해주라’는 것입니다. (21:11-14) 나라가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예언자가 내어놓은 구원의 길은 기적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 ‘고통받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 이것은 다가오는 종말을 막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너무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 기준은 도리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말적 상황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해집니다. 이 말은 그 무력감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아니 그 무력감 속에서도 우리가 힘이 남아 있는 한 힘써 감당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내가 아닌 내일의 그 누군가를 위해 희망을 심는 일이 인간이 해야 하는 본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도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간 된 도리. 그것은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을 앞두고 말한 ‘공의를 행하는 것’과 ‘고통받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광주 5.18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가 크게 흥행했습니다. 서울에 살던 한 평범한 소시민 택시운전사가 독일인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현장 곳곳을 다니며 이전과는 다르게 사회와 역사를 보게 되고, 광주를 기록으로 남기고 그날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도움을 주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그 택시운전사를 연기했던 배우 송강호 씨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투사가 아니어도 괜찮다. 도리라도 지키자’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누구처럼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총을 들고 싸우지는 못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사 앞에서 무기력했지만, 택시운전사로서 자신의 손님을 끝까지 목적지에 모시기 위해 사지(死地)와 같은 곳으로 다시 핸들을 돌릴 수 있는 도리.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보좌에 앉아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양과 염소로 나누십니다. 그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국적, 인종, 성별, 학력, 외모, 말발, 인맥, 소위 인간사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예배, 헌금, 금식과 같은 종교적 행위의 유무도 아니었습니다. 기준은 도리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인간적으로 대했는가 아닌가 하는 도리의 실행 여부가 구원의 기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앞두고 모두 구원받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그 종말적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로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의 무게는 구원의 무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무기력감에 자주 빠지게 만드는 사회와 세상입니다. 그것은 이 사회와 세상이 도리를 잃어버려 생기는 일입니다.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기에, 그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기에, 그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기에, 그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지 않았기에, 그가 갇혔을 때 돌아봐 주지 않았기에 종말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종말을 이기는 길을, 아니 종말을 넘어서는 길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내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 공의를 행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 어느 순간에라도 감당해야 할 바입니다.
종말적 상황을 자초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십시오. 우리에게 생명이 남아 있는 한 감당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때론 내게 피해가 온다 해도, 행여 내 삶이 무명의 것으로 사라진다 해도 주님께서 일러주신 도리의 길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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