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부르심 받은 사람들

천국생활 2017. 8. 21. 12:05

부르심 받은 사람들
막3:13-19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께로 나아왔다.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열둘을 임명하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덧붙여 주신 시몬과 '천둥의 아들'을 뜻하는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덧붙여 주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과,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를 넘겨준 가룟 유다이다.]

• 산에 올라가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도 세상은 참 다사다난했습니다. 살충제 달걀 파문으로 인해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유서깊은 도시 바르셀로나에서는 차량을 이용한 테러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샤롯츠빌(Charlotteville)에서 벌어진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횃불행진과 폭력은 미국 사회에 잠재돼 있는 위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나치의 깃발까지 등장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평화 잡지인 소저너스(Sojourners)는 최근의 사태를 바라보며 기독교인들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지니아주 샤롯츠빌에서 이번 주 중에 벌어진 폭력사태는 다시 한 번 인종차별주의라는 미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우리는 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이들로서 증오를 뿌리째 뽑아야 하고, 증오가 '남부의 유산을 지킨다'거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든다'는 명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인종주의자들에 맞서는 캠페인에 동참했던 린다 누먼(Linda Nooman) 목사의 말은 그런 사태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증오심에 가득차서 돌을 던집니다. 우리가 돌에 맞지 않았다면 그것은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증오와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신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본문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께로 나아왔다."(3:13) 성급한 이들은 그 다음에 일어날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하지만 '산에 올라가셔서'라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는 그 산이 어떤 산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장소를 적시하는 것이 그의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을 세우기 위해 산에 올라가신 것일까요?

누가는 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주님이 산에 올라가신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눅6:12). 누가복음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 있는 선택을 하거나, 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변화산 사건을 다루면서도 누가는 주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고 말합니다(눅9:28).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전하는 본문에서도 누가는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눅22:4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가운데 기도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둘인데 다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마가는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말을 굳이 기도와 연결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산은 차라리 일상을 벗어난 자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상의 자리를 떠나야 오히려 우리가 선 자리가 제대로 보입니다. 신경림 선생의 시 '밤 차'는 바로 그런 진실을 잘 드러내줍니다. "세상은 온통/크고 높은 목소리만이 덮어/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 줄을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많다/밤차를 탄다/산바람 엉키는 간이역에 내리면/감나무에 매달린 새파란 그믐달/비로소 크고 높은 목소리/귓가에서 걷히면서/작고 낮은 참 목소리/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속삭임처럼 흐느낌처럼/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한다". 좋지요? 시인은 일상의 자리를 벗어날 때 비로소 작고 낮은 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람들, 욕망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날 준비가 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산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과 깊숙히 접속하는 자리입니다. 제자들의 수가 열둘인 것은 오랫동안 무너졌던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 각양각색
마가는 그 열둘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면면이 참 다양합니다. 그 주축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등의 어부들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헤롯 안티파스의 가혹한 수탈 정책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던 계층이 어부들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갈릴리 호수에 그물을 던져 먹고 살던 사람들에게 헤롯은 무서운 세금을 물렸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도 남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 호숫가에 만들어놓은 염장처리 공장에 고기를 헐값에 넘기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로 대표되는 체제에 가장 깊은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학수고대했던 이들이 예수의 제자로 먼저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는 자칫하면 예수 일행에게 추문거리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시몬은 열혈당원이었다고 합니다. 폭력적인 방식으로라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룟 유다도 열혈당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가룟이라는 말에 급진적 테러리스트 집단인 시카리단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빌립, 바돌로매, 가나안인 다대오,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등이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요한복음에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칭찬을 받았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급진적인 사람들도 있고 성정이 느긋한 사람도 있고, 실증주의적인 회의주의자도 있고 다소 냉소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찌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의 식당 벽면에 그린 '최후의 만찬'(460*880cm)을 도판으로나마 다 보셨을 겁니다. 다 빈치는 성경을 면밀히 읽고 그림 속에 제자들을 잘 배치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제자들 각각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정과 삶의 배경이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다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사회의 유력인사라 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주변인들입니다. 바울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7-28)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주변화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 나라의 꿈을 펼치셨습니다. 이미 배부른 사람들, 홀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어디에서나 불온시됩니다. 제자들의 면면은 다 달랐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은 의지나 결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사람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 함께 있게 하심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예수의 제자로 세워졌을까요? 제자란 배우는 사람입니다. 마가는 주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까닭을 몇 가지로 요약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구절입니다. 제자는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낯선 이들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몇 해 전에 이탈리아 아씨시에 있는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깊은 곳까지 저를 안내해준 수사님께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는 일이 어떠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수사님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 형제 다 버리고 떠난 놈들이 오죽하겠어요!" 더 묻지 않아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사는 이들이지만, 함께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공동체는 존재의 변혁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자기를 고집하면 반드시 불화를 빚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은 나'가 자꾸 동료들과의 만남을 통해 깎여나가고 무너진 후에 '새로운 나'로 거듭나야 합니다. 공동체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목사님 한 분이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치약을 짜는 방식, 옷을 벗어놓는 방식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기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찌 시대에 독일 기독교는 부끄럽게도 히틀러에게 복무했습니다. 제국교회에 저항하면서 오직 한 분이신 주님만을 섬기자며 시작된 것이 바로 고백교회 운동입니다. 1934년 5월 일단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바르멘이라는 도시에 모여 '바르멘 신학 선언'을 발표합니다. 그 선언문의 제1항은 성서에서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는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면서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선포의 원천으로서 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외에, 그리고 그것과 나란히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 및 진리들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정할 수 있고 또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고백교회 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은 칼 바르트와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입니다. 고백교회는 본회퍼에게 목회자 양성을 위한 과정을 맡겼고, 그는 핑켄발데(Finkenwalde)라는 곳에 기숙사를 겸한 신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핑켄발데에서 신학생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찬송가 부르기, 시편 기도, 성경 묵상, 예배, 도보여행, 스포츠, 침묵 등의 훈련이 지속되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살라고 명하신 대로 살아가는 공동체, 신학생으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공동체"(에릭 메택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김순현 옮김, 포이에마, 2011년 8월 10일, p.378)였습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익혀야 했던 것입니다.

헛된 꿈이긴 하지만 제게 소원이 있다면 예수님 곁에서 일주일만이라도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싶지만, 그분의 몸가짐,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은 정규 교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승은 말로 지식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제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분입니다.

• 보냄을 받은 자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 제자들의 가슴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서서히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들 속에 깊게 자리 잡은 패배의식과 원망은 스러지고, 가련한 삶을 살아가는 동족들의 현실이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도, 곧 '보냄을 받은 자'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영적인 산에만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곤고한 사람살이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리처드 바크가 1970년에 상재한 우화소설 <갈매기의 꿈>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대부분의 갈매기는 하구에 모여들어 끼룩거리며 먹이를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게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그런 관심에서 멀어진 채 높이 멀리 나는 일에 온통 집중합니다. 그는 다른 삶을 상상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구의 갈매기와는 달리 다른 세계를 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 세계를 전파하라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들의 소명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꼭 많은 것을 소유하고, 남보다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내려놓기만 해도 삶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가벼워진 마음에 하늘 바람이 불어오는 법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물들이라고 보냄을 받은 이들입니다. 우리 교인인 조호진/최승주 권사 내외는 위기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두분이 하는 일은 지난 수요일에 JTBC '나도 CEO'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조호진 집사님은 시 '누군가'에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노래합니다.

"사랑 없이/봄이 올까요.//사랑 없이/아이들이 태어날까요.//희망 없이 과연/살아갈 수 있을까요.//누군가, 사랑하기에/따뜻한 봄이 오는 거지요.//누군가, 사랑하기에/아이들이 자라는 거지요.//누군가, 울어주었기에/쓰러진 아이들이 일어서는 거지요."

이런 이들이 있어 세상은 조금씩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하지는 않습니다. 귀신 들린 이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다른 악한 것들에게 정신을 점유 당한 이들 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사로잡아 종이 되게 하는 귀신을 내쫓으라 명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귀신들을 꾸짖어 내쫓으셨습니다. 거룩한 영만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강일상). 힘이 얼마나 강하냐 약하냐가 아니라 영이 얼마나 깨끗하냐가 귀신 축출의 요체입니다. 나를 비워 주님으로 채우지 않고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을 수 없습니다. 귀신 축출의 기본은 상처 입은 존재, 정신의 통합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그들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가는 현실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수의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만이 조각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스테인드글라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며 시인은 깨진 마음을 모아 빛나는 존재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니 서로 상처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고, 주님의 빛 가운데 서는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지금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내쫓는 일 말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함으로 참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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