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다
대하33:10-13
[주님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으므로, 앗시리아 왕의 군대 지휘관들을 시켜, 유다를 치게 하시니,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아 쇠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어 갔다. 므낫세는 고통을 당하여 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해졌다. 그가 주님께 기도하니,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그 간구하는 것을 들어 주셔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왕이 되어 다스리게 하셨다. 그제서야 므낫세는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 낙인 찍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문득 절기를 확인하느라 들여다본 탁상달력에 "강물은 만나는 모든 것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가 됩니다"라는 신영복 선생의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강물은 만나는 모든 것을 공부'한다는 문장에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물론 '공부'라는 단어 속에 담긴 의미는 다층적입니다.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시간의 강물을 타고 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과 일들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오래 전 고은 선생의 스무 권짜리 시집 '만인보'를 읽으면서 홀로 자책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인은 일평생 동안 만난 모든 사람들, 사물, 장소, 사태, 책들 속에서 삶의 지혜와 만납니다. 따뜻한 마음과 예리한 통찰력이 없다면 그냥 스쳐가 버렸을 일들이 시인의 노래 속에서 의미 있게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추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때로는 고단하고 암울한 인생길에 빛이 되기도 합니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삶의 어느 지점을 지날 때 문득 다가와 냉랭한 세상을 훈훈하게 만드는 기억이 있는지요? 고은 선생은 '머슴 대길이'라는 시에서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 아저씨를 떠올립니다. 그는 일 잘하는 상머슴이었는데 밤이 되면 머슴방 등잔불 아래서 동네 애들에게 장화홍련전 같은 이야기책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그는 머슴이었지만 삶의 지혜를 알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시인이 기억하고 있는 대길이 아저씨의 말입니다. 이 말이 시인의 삶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길이 아저씨/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 생각해보면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 한 마디 혹은 따뜻한 기억이 우리의 고단한 삶을 지켜주는 외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가련한 사람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기억 속에 비겁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무책임하게도 진실보다 편익을 추구했던 그의 삶이 거둔 열매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언어화 하는 순간, 우리는 그 언어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사람의 다른 가능성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됩니다. '낙인 찍기'처럼 악마적인 게 또 없을 겁니다. 낙인이 찍히는 순간 사람들은 사회적 죽음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주님도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마7:1) 말씀하셨습니다.
• 최악의 임금
오늘은 낙인 찍힌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유다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므낫세입니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세상을 떠난 후 열두 살에 왕이 되어 쉰다섯 해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은 '잊게 하다' 혹은 '잊어버림'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의 맏아들 이름도 므낫세였는데, 객지에서 살던 요셉은 아들을 얻고 무척 기뻤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의 존재는 나그네로 사는 동안 그의 가슴에 새겨졌을 외로움을 일거에 달래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온갖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창41:51)며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왕 므낫세는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본분을 잊고,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든 사태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국정 최고 책임자가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위임된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주위에 자문 그룹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들은 어린 왕을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히스기야의 개혁 정책 때문에 특권을 잃어버린 귀족들이 왕 주변을 에워쌌고, 그들은 급격한 변동이 국가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강대국의 그늘에 머물도록 왕을 부추겼던 것 같습니다. 외국의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인지 므낫세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펼쳤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뜻을 여쭙기보다는 상전 국가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앗시리아의 문화가 유입되었고, 그들이 믿는 신들도 들어왔습니다. 므낫세가 통치하는 동안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들이 다시 세워졌고, 그 산당은 지방 토호세력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곳곳에 바알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고, 아세라 목상들을 세웠습니다. 하늘의 별을 숭배하는 이들도 늘어났습니다. 주님의 성전 안에도 이방 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스스로 아로새긴 목상을 성전 안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야훼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예언자들의 소리는 당연히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므낫세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 곧 게헨나에서 자기 아들들을 몰록신에게 번제물로 살라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무당과 점쟁이, 마술사들이 제철을 만난 것처럼 설쳤습니다.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와 공의는 무너졌습니다. 왕의 악정은 국민들의 윤리의식도 마비시켰습니다. 악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러한 세상이었으니 백성들이 악에 빠지는 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불과 몇 십년 후에 닥쳐올 유다 멸망의 모든 책임을 므낫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의 후대에 요시야의 개혁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지서 기자는 므낫세의 행적을 소개하면서 한 가지 고민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서처럼 그를 천하의 못된 왕으로 기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쉰 다섯 해의 통치 기간이 문제였습니다. 문제가 많은 그를 하나님은 왜 징치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었습니다. 역대지 사가는 그 질문을 염두에 두고는 역사적 평가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시어 갱생의 길을 열어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가 악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돌보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죄에 대해 그냥 눈을 감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와 백성들의 죄를 꾸짖으셨으나 그들이 듣지 않자, 앗시리아를 들어 유다를 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므낫세는 결국 사로잡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열왕기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역사적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앗시리아를 지배하던 이는 앗수르바니팔(Assurbanipal)입니다.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는 앗수르바니팔 왕의 치적을 자랑하는 부조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자 사냥' 장면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위대한 왕들은 흔히 사자를 사냥하는 용사의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그는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주전 652년에 그의 동생인 사마시 숨 우킨(Shamash-Shum Ukin)이 애굽 왕의 후원을 등에 업고 바빌론에서 형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역사가들은 므낫세가 어떤 형태로든 그 반란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거기에 가담했던 이들은 앗수르바니팔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22명의 봉신 명단 가운데는 므낫세의 이름도 들어 있습니다(장일선, <歷代記 史家의 神學>, 한국신학연구소, 1981년 2월10일, p.216/군네벡, <이스라엘 歷史>, 문희석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6년 2월 20일, p.180 참조). 므낫세가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아니라 바빌론으로 잡혀간 것은 바빌론에서 벌어진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 삶의 전환
그런데 므낫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시간은 그에게 저주가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련과 아픔을 통해 자기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역대기 기록자는 그의 삶에 발생한 변화를 간결한 문장 속에 담아냈습니다. "므낫세는 고통을 당하여 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해졌다."(대하33:12) 하늘 무서운 줄 모르던 악한 왕의 이런 극적인 변화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변화의 촉매가 된 것은 기도였습니다. 므낫세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던 것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경에는 그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후 3세기에 등장한 '사도의 가르침'에 므낫세의 기도가 처음 등장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성경 사본은 시편의 부록으로 14개의 찬양을 덧붙이고 있는데 므낫세의 기도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후세 사람들이 므낫세의 이름을 빌어 그 참회의 기도를 썼다는 말이 아닐까요?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바다의 모래보다 많은 죄를 저질렀으니 나의 죄가 허다하고, 오 주여, 그 죄가 차고 넘쳐 내가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수 없으니 나의 허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쇠사슬에 겹겹이 묶여 엎드러지고 내 죄로 인해 억눌려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노를 발하며 당신 앞에 악을 행하여 가증한 것들을 세우고 죄를 더하였나이다. 이제 마음의 무릎을 꿇고 당신의 선하심을 구하나이다. 주여, 내가 죄를 범하였나이다. 나의 허물을 자백하나이다. 내가 기도하고 당신을 구하나니, 나를 풀어주소서, 나를 풀어주소서. 나의 범죄를 따라 나를 멸하지 마옵소서. 언제까지나 노하지 마시고 나의 악함을 쌓아놓지 마소서. 땅의 가장 낮은 곳에 나를 내버려두지 마옵소서. 당신은 주님이시며 회개하는 자의 하나님이시니 당신의 자비를 좇아 내 속에 당신의 선함을 보이소서. 가치 없는 나를 구하소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그 모든 고통의 뿌리에는 하나님 앞에서 지은 자기의 죄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듯 그는 죄의 올무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절절히 참회하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합니다. 역대지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풀어주셨다고 말합니다. 겸손해진 므낫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오늘 읽지 않았지만 14절부터 17절은 귀환 이후에 므낫세가 펼친 정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외곽 성을 쌓아 올려 방비를 튼튼히 했고, 곳곳에 요새화된 성읍을 만들어 군대 지휘관들을 배치했습니다. 성전 안에 있던 이방 신상들을 없애고, 자신이 가져다 놓은 목상들을 없애고, 이교의 제단을 철거하도록 했습니다. 더럽혀졌던 주님의 제단을 고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바쳤습니다. 산당 제사가 완전히 철폐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수행되는 제사는 오직 주님께만 바쳐지도록 했습니다.
열왕기에 소개된 므낫세는 천하의 악인입니다. 역대지서에 소개된 므낫세는 악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변화된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 역사적 사실에 더 부합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대기의 기록에서 희망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여전히 자기 욕망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이들의 큰 아픔보다 우리의 사소한 아픔에 더 크게 반응합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지만, 죄의 중력 때문에 자꾸만 추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속에 심어주신 하늘 빛이 자꾸만 흐려지고 있습니다. 고쳐주시고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자비하심과 은총 앞에 우리를 내려놓으십시오. 바울 사도의 말처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롬12:2)하는 새 사람이 되십시오. 눈을 감은 채 헛된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던 삶에서 벗어나, 믿음의 눈을 크게 뜬 채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을 사십시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롬13:12). 강물이 만나는 모든 것을 공부하며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희망을 일깨우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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