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천천히 그리나 꾸준히

천국생활 2017. 9. 25. 11:11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사28:23-29
(2017/09/17, 기독교교육진흥주일)

[너희는 귀를 기울여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주의 깊게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씨를 뿌리려고 밭을 가는 농부가, 날마다 밭만 갈고 있겠느냐? 흙을 뒤집고 써레질만 하겠느냐? 밭을 고르고 나면, 소회향 씨를 뿌리거나 대회향 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밀을 줄줄이 심고, 적당한 자리에 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밭 가장자리에는 귀리도 심지 않겠느냐? 농부에게 밭농사를 이렇게 짓도록 일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소회향을 도리깨로 쳐서 떨지 않는다. 대회향 위로는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는다. 소회향은 작대기로 가볍게 두드려서 떨고, 대회향도 막대기로 가볍게 두드려서 떤다. 사람이 곡식을 떨지만, 낟알이 바스러지도록 떨지는 않는다. 수레바퀴를 곡식 위에 굴릴 때에도, 말발굽이 그것을 으깨지는 않는다. 이것도 만군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주님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끝없이 넓다.]

• 분주한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가을이 빠르게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 탁상달력 9월 페이지에 적혀 있는 신영복 선생의 글귀를 자꾸 마음에 새기게 되는 나날입니다. "자동차로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 어떤 길을 점으로 경험하거나 꽃길로 경험하는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속도입니다. 빠름 속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은 대개 자기 속도대로 살지 못합니다. 세상이 정해준 속도대로 살거나, 그보다 더 빨리 달리려 합니다. 누군가 나를 앞서 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늘 숨이 가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미쉘 꽈스트는 "끊임없는 활동이란 현대의 가장 무자비한 우상(偶像)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나 많고 그러면서도 무엇이건 다 하려 든다"(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1989년 12월 25일, p.103)고 말합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처럼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미쉘은 지나치게 바쁜 사람에게 신뢰를 둘 수 없다면서 "'그는 너무 바빠' 하는 말은 그는 우리 문제를 생각해 줄 여유가 없으니까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는 뜻이 된다"(같은 책, p.104)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형제자매가 되려 한다면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그들이 우리 삶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 정진규 선생은 왈칵왈칵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보다가 봄 신명에 지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몸詩·14' 중에서). 이런 자기 개방, 혹은 환대의 공간 만들기야말로 이웃 사랑이 아닐까요?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상이 역동적이기는 하지만 그곳에 느긋한 평화는 없습니다. 평화가 없으니 생명의 기쁨 또한 없습니다. 누구나 평화를 꿈꾸지만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저마다 과속의 세상에 적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기독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기독교교육이든 교육이든 그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리 세대는 오랫동안 1968년에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야 했습니다. 헌장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까닭을 아주 단순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 헌장에 근거한 교육의 목표는 산업사회의 일꾼들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습니다. 한때 교육부의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였던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다만 수단 혹은 도구일 뿐입니다.

• 교육의 목표
교육의 진짜 목표는 뭐가 되어야 할까요? 거창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전성은 선생은 "교육은 평화를 위한 목적 이외의 어떤 목적으로도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전성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메디치, 2011년 5월 16일, p.112)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대단히 단호합니다. 남을 억누르고, 짓밟고, 빼앗는 일이 없는 세상의 꿈은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영성가들의 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략하지만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5:9). 평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나는 모든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은 그 눈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유난히 악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입니다.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일이 일상이 된 무정한 세상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희랍인들은 이해하기 위하여 배웠다. 히브리 인들은 공경하기 위하여 배웠다. 현대인들은 사용하기 위하여 배운다"(<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201)고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아는 것이 힘'이라는 표어를 내면화하고 삽니다. 자기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 상품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헤셸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의 옛말에 따르면 세계는 공부, 예배, 자애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고 한다. 공부는 하늘의 지혜를 더불어 나누는 것이요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며, 자애는 이웃의 아픔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같은 책, p.201)

참된 공부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 지식의 분량은 급격히 늘어나지만 인간성은 나날이 쇠퇴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람들은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지만, 참 사람이 되기 위한 지식은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깊은 사색과 성찰 그리고 기도, 사랑의 실천과 불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교육이 서야 할 자리는 바로 여기입니다.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를 들어보셨는지요?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 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남들이 흠모할 만한 자리에 앉았다 해도 이웃의 아픔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 농부의 지혜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이사야 28장은 대략 네 개의 소 문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살아가는 북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화 선언입니다. 7절부터 13절까지는 이스라엘에게 지식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횡설수설하고 있는 제사장과 예언자들에 대한 조롱입니다. 14절부터 22절까지는 공평과 공의를 저버린 채 외국과의 동맹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는 예루살렘의 지도층을 향한 심판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좀 어두운 메시지가 담긴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3절부터 29절까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지혜로운 농부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밭을 갈 때와 씨를 뿌릴 때를 정확하게 압니다. 계절에 따라 뿌려야 할 씨가 무엇인지, 그루갈이로 심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추수하고 타작할 때에 어떤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정밀하게 알고 있습니다. 소회향을 도리깨로 쳐서 떨지 않고, 대회향 위로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굳이 이 식물들을 등장시킨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왕가에 속한 사람인 이사야로서는 농부들의 실용적 지혜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농부들의 지혜가 앞에서 언급된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의 허위의식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농부들의 지혜조차 "만군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29)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충실한 농부들의 예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뜻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비밀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귀를 기울여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 주의 깊게 말씀을 듣는 사람은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삶이 곤고할수록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속에 가득 차 있는 소음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야 합니다. 가끔은 일상의 자리에서 벗어나 보아야 자기 삶의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온통 '떠나라'는 말과 '따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 떠남과 따름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아브람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은 익숙하던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들어간 이들입니다. 그들은 정착생활의 안락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떠도는 삶을 택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떠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삶으로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분리의 장벽들은 무너졌고, 우정의 공간이 열렸습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걷기의 인문학>(김정아 옮김)에서 저자 리베카 솔닛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편지의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p.10-11)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이라는 말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바로 이렇게 열립니다. 제2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듭난 백성들을 두고 사람들이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합니다(사58:12). 성도의 소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남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는 것이 인생의 성공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삶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불안 때문입니다. 남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 자꾸 갇히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몸으로 입증하기를 바라십니다. 소유는 적어도 삶을 축제로 바꾸며 살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홀로 앞서가는 것보다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삶 속에 더 큰 삶의 묘미가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당장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낙심할 것 없습니다. 땅의 현실에 붙들려 있는 우리 시선을 자꾸만 들어올려야 합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걷고 또 걸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라는 말을 들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귀에 묶어서 사용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성서의 한 형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야곱과 눈물로 재회한 에서는 야곱에게 "자, 이제 갈 길을 서두르자. 내가 앞장을 서마"(창33:12) 하고 말합니다. 급한 성미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가 봅니다. 무슨 일이든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아름다운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생명의 성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은 벼의 생장을 돕기 위해 벼 포기를 조금씩 들어올렸지만 결국 벼농사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발묘조장拔錨助長이라는 고사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서두르는 형의 제안을 야곱은 완곡하게 물리칩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창33:13).

기독교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심는 씨앗이 죽은 씨가 아니라면 움틀 날이 올 것입니다. 신뢰하면서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자기 속도에 맞춰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뿌린 씨가 잘 나지 않을 때 다시 덧뿌리는 씨"를 가리켜 움씨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척박한 세상에 움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씨 뿌리는 사람'은 성직의 길에서 벗어나 화가의 길로 접어든 고흐의 결의 혹은 다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거기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발걸음이 힘찹니다. 절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면 됩니다. 너무 속도에 집착할 것 없습니다.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총을 맛보며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나아가면 됩니다.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빌2:13)께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자라지만 결국 벽을 넘는 담쟁이넝쿨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조금씩 자랄 겁니다. 우리는 추수하는 일꾼인 동시에 파종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생명의 씨, 평화의 씨를 뿌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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