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한몸의 지체들

천국생활 2017. 10. 23. 12:41

한 몸의 지체들
엡 4:22-3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 고쳐주소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 또 지금 성서의 땅 이스라엘을 답사 중인 교우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두 주간 일어났던 끔찍한 흉악 범죄들로 인해 저는 가슴이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어금니 아빠’라 불렸던 이영학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었지요. 피해자들을 애도하며, 또 유가족들의 찢어진 마음을 주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기를 간구하며, 먹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인면수심의 장본인을 보며 분노했고, 때로는 이런 세태가 반복되는 이 땅의 어두움에 탄식했습니다. 끔찍한 세태 속에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더러운 욕망을 위해 타인을 아무렇게나 이용해 먹는 세상이 언제까지 지속할까요? 거짓말, 폭행, 갈취, 살인까지 못 하는 짓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탄식하는 마음 한쪽에서는 혹시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연이은 폭력 사건을 접하며, 제 입술에서는 저절로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던 중, 헤른후트 기도서 오늘의 말씀에서, 저는 예레미야 17:14 말씀을 만났습니다.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셔야만 한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 새 사람
오늘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의 시대에도, 분별없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서에서 바울의 묘사를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 나머지, 하나님은 물론이고 현실에 대해서도 감각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똑바로 생각할 줄 모릅니다. 감각을 잃어버린 그들은, 성에 집착하고 온갖 종류의 변태 행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메시지성서, 에베소서 4:17-19)

정말 이 땅의 현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랑과 정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자는, 단순히 길을 잃은 자가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 “수치의 감각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방탕과 탐욕”에 먹힙니다. 그리고 악마가 시키는 대로, 온갖 “더러운 일”을 합니다. (엡4:19)

이 악마적 세상에서 한숨만 내쉬고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4:14)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분의 가르침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거듭남의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저 더러운 세상이라고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가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도 시나브로 어둠에 먹힐지 모릅니다.
바울의 단호한 권면은 지금 새사람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4:22-24)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합니까. 간교한 유혹에, 처음엔 아주 조금씩, 이후엔 듬뿍, 나를 내어주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좋다고 광고하는 것들을 보고 들으며, 팔랑귀를 팔랑거리며 홀랑 유혹에 넘어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들도 다 하는데 우리도 해야 하지 않나 하며, 두 눈 똑바로 뜨고 구렁텅이에 빠지는 게 인간입니다. 초장에 단호하게 박차고 일어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슬금슬금 때가 묻게 마련입니다. 종국에는 내 몸에서 풍기는 더럽고 역한 냄새를 내가 맡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은 새사람이 되는 방법을 25-32절에서 아주 구체적인 윤리적 권면의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새사람이 된다 하면, 우리는 한 개인이 내면에서 새로워지는 걸 쉽게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윤리적 목표를 갖고 행동으로 실천할 때, 그가 새로워질 수 있다고 제시합니다. ‘새사람’ 되기는, 수많은 개개인이 ‘새롭게 관계 맺’는 삶을 실천할 때에 가능하다는 걸, 바울은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 사람이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우는 이입니다. 또 매일 만나는 사람들 사이사이에서 새로운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윤리적 권면을 저는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하십시오.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거짓말과 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롭고 평안한 관계를 막는 걸림돌입니다. 우선 서로 거짓될 때,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또 뭔 일마다 화를 내는 사람과는 서로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하얀 거짓말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예의상, 사람들과 두루 편안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또는 피치 못한 사정 때문에 하는 악의 없는 거짓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가끔 듣는 하얀 거짓말 중 하나는, “곱슬머리시네요. 멋져요. 얼마나 좋을까. 파마비도 안 들고”입니다. 저도 이 말이 하얗다는 거 압니다.

사람은 대략 만4세에 의도적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4세 무렵 아동은 타인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우고, 거짓말할 대상으로서의 타인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후 거짓말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이라는 교육을 받습니다.
대개의 양육자는 거짓말은 나쁘다는 훈육을 하면서 동시에 하얀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차츰 사회생활에 필요한 하얀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걸 학습합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서, 사회적 피드백을 받습니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면 선생님의 신뢰를 잃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게 최선의 방책일 수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이는 진심을 전하면서 속 깊은 친구를 사귀어갑니다. 이렇게 아이는 사회적 관계망을 넓혀 갑니다.
상대방을 하얀 거짓말로 치켜세우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상대방의 진짜 장점을 찾아내서 진심 어린 칭찬을 하고, 또 상대의 안타까운 점을 보고 애정 어린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심이 서로 오고 가는 관계가 맺어질 것입니다.

‘화’의 문제도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화,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분노에 내 영혼이 삼켜지면 안 됩니다. 자기 화에 삼켜져서, 밤잠 못 이룰 지경이 되면, 악마에게 틈을 내준 거나 마찬가지라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사람들이 각자 타인에 대한 노여움을 품고 하루 또 하루를 지낸다면, 이 사회 전체의 노여움의 총량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여움들은 쉽게 상대하기 어려운 악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겁니다. 악이 널리 퍼져서, 끔찍한 뉴스를 접하는 세상에서, 악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는, 애초에 화에 삼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있었던 지역은 지금의 터키 서부 에페소스입니다. 당시 아시아주 수도였습니다. 바울은 이 교회에 2년간 머물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스라엘 밖 대개의 교회들처럼 에베소 교회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와 같은 혈통이라는 점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있으나, 반면 소아시아 에베소 지역의 이민자라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서, 에베소 지역의 토착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으나, 유대인에 비해 예수와 동떨어졌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배경 상의 차이가 어느 순간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은연중에 받았습니다. 그러자 점차 서로 멀어지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서로 상대방이 불편했기에, 점차 다양한 거짓이 쌓였을 겁니다. 하얀 거짓말, 말하지 않고 감춰버린 거짓, 새빨간 거짓말 모두 말입니다. 그것들이 섞여 어느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노여움으로 축적되었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만나서 쉽게 하나가 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바울은 단호히 말합니다. 이게 바로 악마에게 틈을 주는 일이라고요. 악마는 사람들 사이의 갈라진 틈에서 그 노여움의 찌꺼기를 먹고 자랍니다. 악마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풀어내야 합니다. 화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사람은 눈이고, 또 한 사람은 귀입니다. 어떤 이는 팔이고, 또 어떤 이는 다리입니다.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는 서로를 채워주라고 한 몸을 이룬 겁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4:3)

2.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하여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도둑질 자체는 분명히 비윤리적입니다. 도둑질은 나의 욕구를 위해 타인의 소유를 갈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와 타인의 관계를 망치는 행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도둑질’이라는 하나의 행위의 잘못만을 살피는 것은 문맥상 부족합니다. 즉, ‘레미제라블의 장 발장’처럼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이 실수로 저지른 한 번의 도둑질을 바울이 여기서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매일의 생업에서, 일상의 활동에서, 타인의 소유를 욕심 사납게 내 것으로 삼으려는 태도 전체를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도둑질’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욕심 많은 삶의 경향성과 태도를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옆집 나봇의 포도밭을 갖지 못해 안달복달했습니다. 결국, 이세벨이 거짓 증인 둘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갈취하여, 자기 정원으로 만든 후에야 만족해했습니다. 이런 삶의 경향성을 ‘도둑질’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가 타인을 돌보며 살 리 만무합니다.
바울은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는 삶의 귀결점이자 목표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밥벌이의 동기를 재설정했습니다. 이기적으로 나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를 넘어서서, 공동체 안의 타인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수고를 하는 삶을 지향하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일해야 하는 목표가 명확해졌습니다. 너의 것을 도둑질하는 노동이 아니라, 너의 필요를 채우는 행위로써의 노동입니다. 관계를 망치는 노동이 아니라, 관계를 확장하는 노동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리와) 동떨어진 이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입니다.
가까이 우리 동네 어르신 댁에 방충망을 수리해 드리고, 창문에 뽁뽁이를 붙여드리는 일로부터, 멀리 요르단 자아타리 난민촌의 시리아 어린이들의 생존과 교육을 위해 후원하는 일 등, 우리가 서로 의지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며 살아갈 방법은 무척 많습니다. 이를 위해 내 손으로 떳떳하게 노동하는 삶을 바울은 권고하고 있습니다.

3. 나쁜 말은 하지 말고, 덕을 세우기 위해 적절한 때에 은혜롭게 말하십시오.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로 가득한 말, 어떡하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말, 생명을 파괴하기 위한 말이 난무합니다. 나쁜 말은 사람의 성정을 거칠게 합니다.
반면 좋은 말은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듣는 사람의 안녕과 행복, 성장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말도 구체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말로써, 은혜를 끼친 가장 대표적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복음서는 복된 삶의 길로 초대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고 부르셨습니다. 복된 자리로 초대하는 말이야말로 좋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귀신 들린 사람, 병든 환자들을 능력 있는 말씀의 은사로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선 ‘꾸짖는’ 말로 은혜를 끼치셨습니다. 악한 영에게 미혹되거나 부지불식간에 점령당해 고통당하거나,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며 잘못된 길에서 헤매는 사람에게는 엄중한 꾸짖음을 통해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선물해주십니다.
때론 믿음이 부족한 이에게 ‘북돋우시는’ 말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안간힘을 써서 겨우 닿을 듯했는데 닿지 않고, 오랜 시간 애를 써서 올라설 듯했는데 미끄러져 버리는 삶의 야속함 앞에서 무너져버린 사람에게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내어 희망찬 선택을 하도록 이끄십니다.
때론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말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복음서에서의 죄는 법률의 위반, 불의, 잘못이나 악행이란 뜻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빗나가거나 어긋나서 멀어진 상태를 뜻할 때가 많습니다. 죄 사함은, 어긋나고 갈라진 하나님과 나 사이를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십니다.
때론 말없이 포용의 몸짓으로 그냥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품에 안아서 아무 말 없이 ‘이제 다 괜찮아’라고 도닥거려 주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조차 버림받았다고 낙인 찍혀 평생 부재한 존재로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새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우리 입술과 몸짓으로 표현되는 말도 예수님의 것처럼 상대방을 일으켜 세우는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 한 몸의 지체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바울은 첫째, 거짓말과 화, 둘째, 도둑질, 셋째, 나쁜 말에 대한 윤리적 권면을 마치고, 서로 친절히 대하라는 마지막 당부를 32절에서 합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4:32)
‘친절히’로 번역된 단어는 ‘크레스토이(χρηστοί)’인데, 그리스도‘크리스토(Χριστῷ)’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당부는,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라는 권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행하고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족, 친구, 교우, 낯선 이방인들,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지지하고 삶의 필요를 공급해주고 한 인격으로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한 몸의 지체들’의 만남 속에 사소한 만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깃든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상대방을 받아줄 때,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타인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사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라고 하면서, 이는 “오래 참음”(4:2)으로써 할 수 있다고 일러줍니다.
‘오래 참음’은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이런 종류의 일은 그 시간의 소요 자체가 중요합니다.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건 떨떠름할 뿐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도 그렇습니다.
부디 그리스도 한 분에게 속한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사랑으로 돌보며, 더딘 시간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차가운 세상을 따사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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