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어둠의 세월을 넘어
행13:4-12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그들은 살라미에 이르러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은 요한도 또한 조수로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온 섬을 가로질러 바보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어떤 마술사를 만났는데, 그는 거짓 예언자였으며 바예수라고 하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총독 서기오 바울을 늘 곁에서 모시는 사람이었다. 이 총독은 총명한 사람이어서, 바나바와 사울을 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그런데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술사가 그들을 방해하여,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보아라, 이제 주님의 손이 너를 내리칠 것이니, 눈이 멀어서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곧 안개와 어둠이 그를 내리덮어서, 그는 앞을 더듬으면서, 손을 잡아 자기를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총독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주님의 교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평화의 용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잘 끝났습니다. 남북의 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 때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정상들의 입에서 ‘종전’이란 말이 나오고,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다고 말했을 때 감격했습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만큼 불신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분단체제는 평화를 향한 우리의 꿈을 너무 오랫동안 옭죄었습니다. 그렇기에 합리적 의심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선언을 현실로 바꿀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열어주신 기회입니다. 회담을 위해 기도하는 내내 비틀즈 멤버였던 존 레논이 만든 노래 “Give Peace a Chance”가 떠올랐습니다. 그 한 구절을 자꾸만 되뇐 것은 지금 이 땅에 불어온 훈풍이 삭풍으로 바뀌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꽃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야 할 길입니다. 용감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생 택쥐페리의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안데스에서 조난당했다가 귀환한 기요메라는 비행사가 한 말입니다. “내가 한 일은 결단코 어떤 짐승도 일찍이 한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하네.”(<인간의 대지/야간비행/어린왕자/남방우편기>, 안응렬 옮김, 동서문화사, 2017년 1월 20일, p.41) 그가 한 일은 절망을 닫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언젠가 목사 안수를 받는 후배에게 주려고 샀던 이철수 선생의 판화가 기억납니다. 줄기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매달린 잎들이 가지런한 소박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쓰인 글귀 하나가 제 마음에 쑥 들어왔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넘는 담쟁이넝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모든 생명의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자랍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서 아버지인 알렉산더가 아들인 고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희망이 어떻게 도래하는지를 인상 깊게 암시합니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이름은 팜베였지.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단다. 그리고 제자 조안 코롭에게 말했지.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같이 물을 주도록 해라. 어쨌든 조안은 매일 이른 아침 물통에 물을 담아 산에 올라가서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지. 그렇게 3년 동안 물을 주던 어느 날 그는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단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만약 매일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늘 꾸준하게, 의식과도 같이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 거다.“
평화의 나무는 이렇게 부질없어 보이는 행위, 어리석어 보이는 실천을 통해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안디옥 교회
예수 운동도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어떤 일을 대대적으로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몰려들 때면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곤 하셨습니다. 예수 운동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이들은 군사력 위에 세워진 로마 제국 곳곳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힘과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비폭력이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했습니다. 대대적인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박해도 예수 정신을 무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신자들은 오히려 이르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헤롯에 의해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도 투옥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복음은 스러지기는커녕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지금의 터키의 남동부 지역에 속한 수리아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누가는 그곳에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잘 아는 바나바가 중심인물이었고,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소꿉친구인 마나엔 그리고 사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누가가 소개하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인종과 계급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데 어울려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일체의 장벽이 무너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힘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안디옥 교회는 예배에 힘쓰는 교회였고, 진리와 접속하려는 열정에 금식도 열심히 한 교회였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예배에 힘쓰고 금식에 열중하면서도 자아가 강해 늘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를 치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 영적인 파산자가 되기 쉽습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겸손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이 있는 곳에는 늘 조용한 평화가 감돕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장벽들이 철폐됩니다. 바로 이것이 바른 예배의 징표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일종의 대안적 공동체였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가장 자주 듣던 용어가 ‘구원의 방주’라는 말이었습니다. 대표 기도를 하는 이마다 ‘우리를 저 죄악 세상에서 건지시어 구원의 방주에 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거의 매주 듣는 상투어구였습니다. 저 교회 밖 세상이야 어찌됐든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다행이라는 그 이분법을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겨우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강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고난받는 종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는다는 데 그분을 믿는다는 이들이 겨우 이 정도야? 자아를 넘어 타자의 세계로, 타자의 세계를 거쳐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렇게 작아서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이단 종파에 속한 이들은 자기들 교파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부모도 형제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고집스럽게 자기 구원에 집착합니다. 참 딱한 노릇입니다. 소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장 몰상식한 사람, 편견에 찬 사람, 고집스러운 사람,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되는 현실이 참 부끄럽습니다. 이런 교인과 교회에 하나님의 다림줄이 드리워 있습니다. 심판이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에 갔던 바나바와 사울이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 교회에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13:2). 안디옥 교회는 즉시 그 소명에 응답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 키프로스 전도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마가라 하는 요한은 성령의 지시를 따라 지중해 동편 지역에 있는 섬 키프로스를 향해 떠났습니다. 아마도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선교적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키프로스는 그 당시 구리 광산 개발과 조선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서 약 27km 떨어진 실루기아(Seleucia)로 내려가 배를 타고 키프로스의 살라미(Salamis)에 갔습니다.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친 후에 육로를 통해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 도시 바보(Paphos)에 이르렀습니다. 당시의 총독은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었습니다. 그는 행정만 담당하는 총독(proconsul)이었습니다. 이런 총독을 프로콘술이라 하는데, ‘집정관을 지낸 이’라는 뜻입니다. 집정관을 뜻하는 콘술에 이미 지나갔다는 뜻의 프로가 붙은 말입니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는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1년 임기의 집정관 두 명을 뽑아 행정과 군사 업무를 보게 했습니다. 로마는 속주의 총독을 그런 이들 가운데서 임명했습니다. 누가는 서기오 바울이 총명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인물이었으니 말입니다.
서기오 바울의 보좌역 가운데 영향력이 제법 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술사이자 거짓 예언자인 바예수(Bar-Jesus)였는데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모호성 혹은 불확실성 앞에서 흔들립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느닷없이 벌어져 삶의 기반을 뒤흔들 때도 많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통합되지 않는 부분은 늘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그 어둠과 혼돈의 의미를 읽어내고 설명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마술사나 거짓 예언자들은 인간의 그런 마음을 파고듭니다. 총독은 나름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바예수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가까이 두고 가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자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예수는 총독의 측근이라는 걸 내세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기 잇속을 차리고 있었을 겁니다.
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자 바예수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총독이 그들의 말에 넘어갈까봐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특색은 분명합니다. 거짓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입하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참 종교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폭로하여 사람들이 자유인으로 살도록 합니다. 거짓 종교는 특별한 계시에만 집중하도록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파괴합니다. 참 종교는 일상을 충실하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바예수는 바나바와 사울의 증언을 통해 자기의 실체가 폭로될까봐 두려워합니다.
∙ 거룩한 분노
그때 사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그는 바나바의 그늘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전면에 나섭니다. 누가는 그를 ‘바울이라도고 하는 사울’이라고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사울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바울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쳐진 존재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에 충만하여 마술사를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보아라, 이제 주님의 손이 너를 내리칠 것이니, 눈이 멀어서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13:10-11a)
바울의 어조는 단호합니다. 섬 지역 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일 뿐 아니라 총독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바예수는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로 호명되고 있습니다. 그의 실체가 공공연하게 폭로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실 때 악한 영을 꾸짖으셨습니다. 누가 꾸짖을 수 있습니까? 거룩한 영, 깨끗한 영만이 꾸짖을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단순히 바예수를 제압하려고 혈기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거짓 신비와 신통력의 너울을 쓴 채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던 그의 행태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그렇게 터져나온 것입니다.
덴마크 교회의 목사이던 카즈 뭉크(Kaj Munk, 1898-1944)는 히틀러 체제에 저항하다가 1944년 1월 5일 날 밤 일단의 군인들에게 개처럼 끌려 나가 들판에서 사살 당했습니다. 일찍이 그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의 직무는 무엇인가? 믿음, 소망,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할까? 멋지고 아름다운 말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용기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 단어도 실은 진실을 옹골지게 드러내기에 부족하다. 이 시대 우리의 직무는 ‘무모함’(recklessness)이다...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심리학이나 문학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거룩한 분노(holy rage)를 잃어버렸다.”(Allan Boesak, Walking on Thorns, WCC, 1984, p.41)
악한 영을 꾸짖는 것이 설교자와 교회의 직무입니다. 사람들을 온통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는 악한 영이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이들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기에 교회는 쇠퇴의 위기에 몰린 겁니다. 바울이 그를 준엄하게 꾸짖자 안개와 어둠이 바예수를 내리덮었습니다. 그는 앞을 더듬으면서 자기를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게 그의 적나라한 실체였습니다. 거룩한 영이 도래하자 악한 영의 정체가 폭로되었습니다. 총독은 이 놀라운 사건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 확장의 욕망이라는 안개와 어둠에 갇힌 채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불확실한 세상에서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이 그들의 그물에 걸려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지금 회복해야 할 것은 악한 것을 분별하는 영적 분별력과 더불어, 거룩한 분노입니다. 분노하면서도 거칠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서면 세상의 어둠도 조금씩 걷힐 것입니다. 분단과 분열의 세월을 넘어 서광이 이 땅에 비쳐들고 있습니다. 어둠과 안개의 세월이 지나가고 평화와 생명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그 시간을 열어가는 데 교회가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이 나라 위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