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황색시간

천국생활 2018. 5. 20. 07:51


 [엘리는 매우 늙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저지른 온갖 잘못을 상세하게 들었고,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타일렀다. “너희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느냐? 너희가 저지른 악행을, 내가 이 백성 모두에게서 듣고 있다. 이놈들아, 당장 그쳐라! 주님의 백성이 이런 추문을 옮기는 것을 내가 듣게 되니, 두려운 일이다. 사람끼리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중재하여 주시겠지만, 사람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변호하여 주겠느냐?“ 아버지가 이렇게 꾸짖어도,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어린 사무엘은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 당겨진 화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날짜가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오늘 우리는 어버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지금까지 힘겹게 삶을 일궈온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이 오늘만큼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군자삼락의 첫번째는 ‘父母俱存兄弟無故‘입니다. 부모님이 다 살아계시고, 형제자매들이 별고 없이 지내는 즐거움은 평범해 보이지만 아주 소중한 기쁨입니다. 이미 돌아가셨어도 부모님은 늘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가끔 삶이 힘겹거나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분들의 인자하신 얼굴과 음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마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 문준호는 ‘어떤 부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늙은 어머니가
마루에 서서
밥 먹자, 하신다
오늘은 그 말씀의 넓고 평평한 잎사귀를 푸른 벌레처럼 다 기어가고 싶다
막 푼 뜨거운 밥에서 피어오르는 긴 김 같은 말씀
원뢰(遠雷) 같은 부름
나는 기도를 올렸다,
모든 부름을 잃고 잊어도
이 하나는 저녁에 남겨달라고
옛 성 같은 어머니가
내딛는 소리로
밥 먹자, 하신다
(문태준 시집 <먼 곳> 중에서 ‘어떤 부름’ 전문)

시인은 ‘밥 먹자‘ 하시던 늙은 어머니의 음성을 꼭 붙들려고 합니다. 그 음성은 막막하기만 인생의 피난처와 같습니다. 잘났다 못났다 잘했다 못했다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식에게 더운 밥 먹이고픈 그 마음이야말로 살벌한 세상에서 우리를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밥 먹자’ 하는 어머니의 음성은 험한 세상을 방황하던 이들이 언제라도 돌아가 안길 수 있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도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어라‘.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만난다는 일처럼 신비하고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부모님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칼릴 지브란은 그래서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부모들은 활이고 아이들은 살아 있는 화살입니다. 사수는 하나님입니다. 지브란은 이 미묘한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사수이신 신은 무한의 길 위에 한 표적을 겨누고 그분의 온 힘으로 그대들을 구부리는 것이다. 그분의 화살이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칼릴 지브란, <예언자>, 강은교 옮김, 문예출판사, 1975년 12월 25일, p.23-24)

부모는 ‘당겨진 활‘입니다. 하나님은 화살을 멀리 보내기 위해 부모를 그렇게 힘껏 잡아당깁니다. 자식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기쁨과 기대, 안쓰러움과 속상함이 교차합니다. 그 애씀과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사람입니다. 성경이 부모를 공경하라 이르는 것은 괜히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됨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 특권이라는 독약
오늘 본문은 실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엘리 가문에서 벌어진 일을 다룹니다. 엘리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그는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 한을 품고 성소에서 울며 기도하는 한나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그를 위해 축복해준 것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엘리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아들들의 행실이 나빴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했습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마다 갈고리를 가져와서 제물을 건져가곤 했습니다. 제물을 태워 바치려는 이들에게 날고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권한을 오용했던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존경받는 제사장인 아버지 엘리의 후광 덕분에 자질과는 상관없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이고, 젊은 때부터 사람들의 공대를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특권 의식에 조금씩 물들었을 겁니다. 이것은 먼지가 쌓이듯 소리없이 진행됩니다. 특권 의식은 성찰을 가로막습니다. 자기 행동을 돌이켜 보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그들의 행동은 방자해지고, 타자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권한 혹은 권세라는 것처럼 들큼한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권위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과 영향력이라면, 권세 혹은 위세란 나의 의지를 다른 이들에게 부과하여 그들로 하여금 내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는 강제력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능하다고 느낍니다. 자기 힘을 과신하는 이들일수록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집니다. 갑질이라는 말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고, 싸잡아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재벌가 사람들의 일탈 행위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른 것일까요? 어릴 때부터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자기 의지가 좌절되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때로는 감정 노동도 해야 하는 이들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욕망과 충족 사이의 거리를 못 견뎌합니다. 그들에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망 실현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하인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 기죽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욕망을 포기하는 것도, 욕망이 충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배우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즉시 손에 넣을 수 있을 때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고마움이라는 더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누리는 것을 소중하게 여길 줄도 모릅니다. 부모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연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학벌은 좋은데 처신하는 것은 형편없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다른 이들과 섞여 살면서 배워야 할 사람됨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속물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전남대학교 철학과 김상봉 교수는 재일학자인 서경식 선생과의 대담에서 교양은 “모든 일을 자신의 편협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줄 아는 정신의 개방성“과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총체성을 향한 소질로서의 교양의 본질은 자기를 초월하여 타자의 자리에 자기를 놓을 줄 아는 능력, 곧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참된 교양이란 ‘학문이나 예술에 대한 지식과 소양을 얼마나 축적했느냐’가 아니라 ‘타인의 삶의 기쁨과 슬픔을 얼마나 절실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서경식, 김상봉 대담, <만남>, 돌베개, 2007년 12월 10일, p.350)

∙ 무엇이 불효인가?
이런 자질이 없는 이들이 지도자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제사장인 엘리의 두 아들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하나님 경외와 공감의 능력입니다. 그들은 그 두 가지를 다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해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들의 악행에 대한 소문에 접한 늙은 엘리는 아들들을 불러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느냐? 너희가 저지른 악행을, 내가 이 백성 모두에게서 듣고 있다. 이놈들아, 당장 그쳐라! 주님의 백성이 이런 추문을 옮기는 것을 내가 듣게 되다니, 두려운 일이다. 사람끼리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중재하여 주시겠지만, 사람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변호하여 주겠느냐?”(2:23-25a)

바야흐로 엘리를 비추고 있던 태양이 서산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로 인해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던 기초가 무너지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하지만 꾸지람도 그들을 되돌려 놓지는 못했습니다. 악행에 길들여진 아들들은 아버지의 충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맙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꾸짖어도,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성경은 그 까닭을 간결하게 서술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행이라는 병이 이미 고황膏肓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굳어짐이야말로 죽음의 징조라지 않습니까?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의 악행을 전하고 있는 본문의 앞뒤에는 마치 괄호처럼 사무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곁에 있으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2:11b)
“한편, 어린 사무엘은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2:26)

엘리 가문이 그렇게 무너져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이라는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세대가 가고 다른 한 세대가 옵니다. 저는 늘 불효란 부모보다 정신의 그릇이 큰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지식과 정보가 파편화되고, 먹고 사는 일이 온통 우리 삶을 사로잡고 있어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가능성이 줄어든 세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보다 더 큰 정신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한계를 돌파하여 더 큰 세계와 접속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황색 시간’이라 정했습니다. 사실 이건 황인숙 시인의 시 제목을 따온 것입니다. “문득 고요히/빛과 어둠이 멈추는/황색 시간”이라는 구절이 제 마음을 가만히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시간은 늦은 오후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그 시간을 ‘까마득 먼 데서 돌아’온 것 같이 경험합니다. 그는 호젓한 평화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짐합니다. “생계가 나를 부산스럽게 만들지라도/그래서 슬퍼하거나 노하더라도/호시탐탐/석양에 신경 좀 쓰고 살으리랏다”(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사). 사는 건 여전히 힘이 듭니다. 그래도 삶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 거룩한 시간을 제 삶으로 받아들이며 살자는 겁니다. 이게 어쩌면 노년에 이른 이들의 보편적 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멸찬 그런 꿈을 누리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 역사는 왜 반복되는가
엘리가 가엾습니다. 그의 생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악행을 저지르는, 그리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아들들에 의해 부정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일평생을 살았지만, 아들들로 인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고요해야 할 황색의 시간이 그에게는 잿빛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두 아들은 전사했고 하나님의 궤까지 빼앗겼다 소식을 듣고는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맙니다(삼상4:17-18).

엘리의 뒤를 이어 사무엘이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도 또한 황색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들 또한 엘리의 아들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인 요엘과 둘째 아들인 아비야는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일하였는데, 그들도 행실이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삼상8:3)

왜 이런 일은 반복되는 것일까요? 똑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들 또한 풍요와 존경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익숙해졌던 것입니다. 경외감이 있어야 할 자리에 특권 의식이 자리를 잡았고, 정의와 공의의 자리에 사익이 들어서면 그걸로 끝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에 대한 존경을 자기의 사람됨에 대한 존경으로 받아들이거나,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질 때 사람은 반드시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꾸만 낮은 데 처하는 연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낮은 마음을 얻지 못하면 사람은 방자해집니다. 요즘 자기 아이들에게 ‘사서 고생’을 하도록 하는 중국 부모들이 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한 아이만 낳아야 했던 부모들이 금이야 옥이야 하고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아이들이 아주 버릇없이 자라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제 이런 경향을 타개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결핍과 불편을 체험하도록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 가문으로부터 사무엘 가문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보가 탐욕과 부패로 무너지자, 평등공동체의 꿈을 지탱하던 영적인 권위 또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정신이 무너진 자리를 법이 채워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사무엘의 황색 시간도 우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외하기와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공감의 마음이야말로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입니다. 자녀들이 그 유산을 값지게 받을 때 황색 시간은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서 그러한 신앙의 유산이 아름답고 소중하게 계승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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