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나무로 우뚝 서라
사 61:1-7
(2017/01/01, 신년주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나서서 너희 양 떼를 먹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너희의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너희를 '주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 너희가 받은 수치를 갑절이나 보상받으며, 부끄러움을 당한 대가로 받은 몫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땅에서 갑절의 상속을 받으며, 영원한 기쁨을 차지할 것이다.]
• 두레밥상
시간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기대와 설렘으로 맞이한 올 한해,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기를 빕니다.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확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옹다옹하며 살 것이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할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낙심했다가도 또 세상이 살만한 것 같아 희망을 품기도 할 것입니다. 새로운 시간은 없습니다. 순간순간 새로운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 서야 합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시51:10).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신의 추함과 약함을 알고,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빚어진 새로운 존재는 어떤 사람일까요?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는 것이 새로운 존재의 가장 큰 특색입니다.
시대의 풍조란 어떤 것일까요? 간단하게 말해 힘을 숭상하고, 욕망이 명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시대의 풍조를 따르는 이들은 힘 있는 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고, 무력한 이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웃들의 삶을 파괴하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자기 존재에 대한 배신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삶의 태도가 일상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던 공동체는 다 사라졌고, 각자도생의 살풍경만이 우리 현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시인은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톱 가진 짐승으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말입니다. 그 사실을 아프게 자각한 시인은 가난했던 시절을 그리움으로 호출합니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처럼 둥근 하나님의 밥상 앞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꿈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 약한 것이 세상의 중심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면서 거듭되는 시련으로 인해 삶의 지향점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라 이르십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셨던 바로 그 대목으로 주님의 사명 선언이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의 해'는 종은 자유인의 신분을 회복하고, 땅은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희년을 이르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61:1-2)
약한 자들을 보듬어 안고, 그들을 자유케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고,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만들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율법 전체의 에토스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라 요약한 바 있습니다. 너무 편파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성경을 유심히 보면 그 말이 그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며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출3:18) 말씀하셨다고 이르라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아시다시피 '히브리'라는 말은 특정한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고대 중근동 지역을 유랑하며 막노동을 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땅에게 유리하는 사람들이었고, 어느 곳에서든 하층민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착민들 혹은 힘 있는 이들에게 '비존재(non-being)' 혹은 '절반의 사람'(half-person)일 뿐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천덕꾸러기였고, 역사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불온시 되어 제일 먼저 배제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런 이들을 향해 있고, 그들의 신음 소리를 기도로 들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은 그런 이들의 인권이 존중되고, 사람들이 서로를 귀한 이웃으로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일러 출애굽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습니다.
요즘 들어 더욱 분명해지는 확신이 있습니다. 약한 것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약한 것들이 먹이로 잡히는 것이 동물 세계의 질서이지만, 인간 세계는 그러면 안 됩니다. 약한 이들을 보살피고 돌보아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한 집안이 화목하려면 가족 가운데 가장 연약한 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고,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취약한 계층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적폐들이 청산되어야 합니다. 갑질, 비정규직, 누군가에 대한 혐오, 몰상식, 특권과 반칙 말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61:3a)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은총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무정한 사람이 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큰 일이 아니라 작지만 아름다운 일들입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하여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
때로는 역사의 격랑 속에 뛰어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일상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내 주변만이라도 맑고 밝고 따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 겨울나무
냉혹한 세상에 사느라 싸늘하게 식어진 내 손을 잡아줄 사람 하나만 있어도 세상은 견딜만한 곳이 됩니다. 따스한 사랑의 온기로 누군가의 가슴을 녹여줄 때, 그들 속에 잠들어 있던 아름다운 가능성이 깨어납니다. 편견없이 예수와 만난 사람들은 다 그러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그들입니다. 슬픔의 세계, 냉혹한 세계를 거쳐 사랑의 세계에 당도한 사람들, 어둠의 세계를 거쳐 빛의 세계에 당도한 사람들 말입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그런 이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필이면 '나무'라는 은유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어가는 나무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는 땅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땅으로 상징되는 이 세계에 깊이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으면서도, 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듭니다. 열매와 잎으로 동물들을 먹이고, 서늘한 그늘로 지친 이들을 쉬게 합니다. 그 나무의 이름이 '의의 나무'입니다. 불의의 어둠이 지극한 세상에서도 끝끝내 의를 갈망하는 나무입니다. 겨울산을 걸을 때마다 제가 습관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원수 선생님의 가사에 정세문 선생님이 곡을 붙인 '겨울 나무'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그 허허롭고 쓸쓸한 풍경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일까요? 나무는 홀로 서 있어도 외롭다고 투정하지 않습니다. 심겨진 자리에서 묵묵히 생을 견뎌냅니다. 그게 제게는 장엄하게 느껴집니다. 의의 나무로 심겨진 이들, 하나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들은 겨울바람이 차갑다고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감당할 뿐입니다. 변화가 더디다고 안달할 것도 없고, 낙심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주님께서 우리 길을 지켜주실 것입니다(시37:23). 지금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 생명의 초록 바람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61:4)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을 다시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무너진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고,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의 건강을 되찾게 하고, 나눔과 돌봄의 정신이 사회를 지배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실천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되돌리기에는 너무 파괴되었다는 비관론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이들입니다. 섣불리 결과를 예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만 심고, 물을 줄 뿐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잡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편집자인 김기돈 목사님은 중국의 내몽골 사막에서 나무를 심는 인위쩐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거칠고 모진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초록의 땅으로 바꾸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생명의 흔적도 없는 황량한 죽음의 땅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답니다. 쉼 없이 날마다 먼지바람을 무릅쓰고 사막으로 나갔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한 사람이 어떻게 사막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사막은 어느새 옥수수가 자라고, 수박이 넝쿨을 뻗고, 미루나무 숲에 새들이 날아오고, 동물이 깃드는 생명의 땅이 됐습니다. 날마다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무,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을 줘야 하는 나무만 2만 그루가 넘는다고 합니다. 힘겹게 가녀린 잎을 내민 나무에 그녀는 물동이로 물을 날랐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옆으로 새나가면 아깝고 안타까웠답니다."(<희망, 그 빛깔 있는 삶의 몸부림>, 고진하 외 34인 지음, 꽃자리, 2016년 10월 14일, p.51-52)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땀 흘리는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모래 바람이 부는 땅에 머물면서 생명의 초록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광야처럼 황량하다고 투덜거리기만 할 게 아니라, 사랑의 바람, 기쁨의 바람, 정의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으셨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 삶 자체가 복된 삶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참 중요한 해입니다. 한국교회가 공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눈물겨운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너졌던 소중한 가치를 일으켜 세울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주님의 제사장',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올 한 해, 365일 내내 어둠 속에서 배어나오는 빛으로, 황량한 세상에 불어오는 생명의 바람으로 우뚝 서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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