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믿음의성숙

천국생활 2017. 1. 24. 15:44

믿음의 성숙
히6:1-8
(2017/01/15, 주현 후 제2주)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 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가 없어지고,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

• 신앙생활의 지향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포근한 겨울이 계속되더니 요 며칠은 제법 겨울답습니다. 내리는 눈을 맞자 답답했던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시인 이재무는 '숫눈'이라는 시에서 눈을 맞이한 설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밤새 송이눈 내렸습니다/하나님, 공부에 지친 아이들에게/맘껏 낙서하며 뛰놀라고/도화지 한 장 크게 펼쳐놓았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른 아이 구분없이, 심지어는 동물까지도 그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립니다. 모든 생명 속에는 유희본능이 있는가 봅니다. 엄숙주의 사회에 적응하느라 우리는 그 본능을 가만히 누르며 삽니다. 그래서 삶이 무겁습니다. 표정도 어둡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잘 웃고, 낯선 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사소한 일에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마음도 저절로 환해집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정신 발달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낙타의 단계는 마치 낙타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는 단계입니다. 사자의 단계는 기존의 관습, 규범, 권위에 의문을 품고 대항하는 단계입니다. 어린이의 단계는 순응과 비판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단계입니다. 어린이는 잊어야 할 것을 잘 잊고 낯선 것을 잘 수용하기 때문에 창조적입니다. 정신이 도달하는 최종단계가 어린이성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아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신 말씀도 이런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땅에 심겨진 씨앗이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움이 트고, 자라는 것처럼 신앙도 그렇게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 교회에 출입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향내가 안 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잘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지향점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 생활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요?

• 얕은 물가를 떠나
바울 사도는 변화된 자기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2:20)

문제는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긴장도 변화도 일어나기 어려운 상태이기도 합니다. 소설가인 줌파 라히리는 어느 날 자기가 타성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모어인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무모한 결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차근차근 이탈리아어를 배워 나갔습니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거기에 빠져드는 것을 호수를 건너는 일에 빗대 설명합니다. 호수 가장자리만 빙빙 돌며 헤엄을 치면 안전하기는 하겠지만 결코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 호수를 가로지르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찬송가 302장 가사가 참 절묘합니다. 찬송 시인은 큰 바다보다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초대합니다. 그러면서도 작은 파도 앞에서 주춤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지금 우리도 호수의 가장자리만 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얕은 물가에서 땅을 짚고 헤엄치는 흉내나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를 띄우고, 주님의 은혜의 바다로 나아갈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금주 중에 마르틴 루터의 <대교리문답>이라는 책의 원고를 읽었습니다.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명분으로 단행된 종교개혁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자유를 빌미로 하여 방종과 게으름, 영적인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개신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1729년에 <대교리문답>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의 서문에서 루터는 게으른 목사들과 거만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십시오. 당신들이 믿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신들의 지식 수준은 바닥입니다. 수준 높은 박사인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혹여 이전에 잘 알고 있었을지라도, '이건 내가 이미 통달한 거야', '이거 다 아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 생각에 교리문답서를 다 알고 있고,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보여도―사실 평생 배워도 그렇게 될 수 없지만―매일 읽고 숙고하고 함께 말할 때마다 거기서 새롭게 배울 것과 열매들을 계속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읽고 대화하고 생각할 때 성령이 함께하실 것입니다."(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있는사람, 2017년 상반기 출간 예정)

'안다' 하지만 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늘 열린 마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씹고 또 씹어 우리의 살과 피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우리는 초보적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얕은 물가를 빙빙 도는 것만으로는 저 깊은 은혜의 바다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 진부한 신앙에서 벗어나기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6:1)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도해야 할 성숙한 경지란 자아라는 한계에 갇혀 살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다른 이들의 시린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룬 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타자를 위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예수적 삶의 방식을 가리켜 "사랑으로 악을 삼켜 자기 속에서 선으로 소화시키는"(김경재, <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 삼인, 2016년 9월 27일, p.96)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의 몸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펼쳐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아직 믿음의 초보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성서가 가르치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말 속에 담긴 도전이 무엇인지, 죄가 어떻게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지, 폭력이 어떻게 버섯 포자처럼 은밀하게 번져가는지, 그런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느끼시는 고통이 무엇인지, 폭력과 죄로 얼룩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모르기에 우리는 깊은 물 속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기초가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거짓 가르침에 이끌리고, 세상에 가득 찬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 채 여전히 자기 욕심 주변을 맴돌며 삽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던 바울 사도는 자기 마음의 일단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드러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11:29) 이 마음 하나 얻지 못해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타락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출애굽의 경험을 민족의 원초적 체험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정착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이들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왕의 직위를 받아들였던 사울은 나중에는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 '듣는 귀'를 달라고 하나님께 청했던 지혜의 임금 솔로몬은 성전과 궁궐을 짓느라고 백성들을 종처럼 부렸습니다. 새로운 애굽이 시작된 것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애당초의 소명을 잃어버린 채 자기 확장에 여념이 없습니다. 영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으로 마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빛 앞에 서서 자꾸만 자기를 지우는 노력을 지속하지 않는 한 우리 또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6:4-6)

가짜일수록 자기를 꾸미는 일에 열심입니다. 내실은 볼품 없지만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이런 신앙이 바로 진부한 신앙입니다. 진부(陳腐)하다고 할 때의 '진'은 '늘어놓다'는 뜻이고 '부'는 '썩다, 썩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고기를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집에 고기가 있으면 자랑 삼아 사람들이 보는 곳에 내놓곤 했답니다. 적당히 하고 그만 두면 좋을 텐데, 자랑하는 마음이 승하다 보니까 고기가 이미 상해 악취가 나는데도 거두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게 진부입니다. 영어로 진부함에 해당하는 단어는 '미디어크러티(mediocrity)'인데, '중간'을 뜻하는 'medi'와 '험한 산'을 뜻하는 'ocris'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서울대학교의 배철현 교수는 그래서 "진부함이란 산의 정상에 오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친 나머지 산 중턱에서 머뭇거리는 상태를 뜻한다"(배철현, <심연>, 21세기북스, 2016년 7월 20일, p.218)고 말합니다.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사이에 어중간하게 선 채 이리도 저리도 가지 못하는 상태 속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의 교회가 세상사람들의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요? 분명한 지향을 갖고 있지 않은 교회 혹은 종교는 오히려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쉽습니다. 호세아의 말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호4:7)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호8:11)

• 낙심하지 맙시다
오늘의 본문은 땅이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 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 없어지고 나중에는 불에 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우리 신앙생활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경고입니다. 대체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미국의 위대한 교사 파커 파머는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은 '실적'으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위대한 일, 우리가 영혼을 잃을까 봐 피하는 위대한 일은 바로 우리가 '실적'을 쌓을 수 없는 일을 뜻한다. 다름 아니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일에는 '실적'이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열심히 하겠다는 헌신만 있을 뿐이다. 만일 이런 일을 측정 가능한 결과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패배와 절망뿐일 것이다."(파커 J. 파머, <일과 창조의 영성>, 홍병룡 옮김, 아바서원, 2013년 11월 25일, p.140)

실적을 따지면 정말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봐도 세상은 별로 달라지는 것 같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낙심할 것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실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파커 파머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한 말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실적을 올리고 있는지 자문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신실한지 여부만 물어왔다"(같은 책, p.141). 이 마음이면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 곁에 다가서고, 불의에 대항하고, 즐겁게 다 같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자체로 복받은 삶입니다.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주님처럼,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지금 이 땅에 하늘의 씨앗을 심는 것처럼 복된 생이 또 있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실천의 길 위에서 주님과 만나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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