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주님을 시험하지말라

천국생활 2017. 1. 9. 11:05

주님을 시험하지 말라


출 17:1-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이에 모세가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 나는 만족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매섭게 추워야 할 때인데 날이 여간 푸근하지 않습니다. 등 시린 사람들로서는 다행이지만, 이런 따뜻한 겨울이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기후 변화가 가져올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 동안 심한 감기 몸살에 시달렸습니다. 여간해서는 낮에 쉬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몸을 부실하게 관리한 저를 탓해야 하겠지만, 새로운 시간에 돌입할 때 일쑤 찾아오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벌건 대낮에 집에 우두커니 누워 있자니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아스라이 떠올랐습니다. 아픔은 때로 거울이 되어 자기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노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곁을 스쳐 지나간 이들과 지금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물론 그 모든 만남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느꺼워지면서 바흐의 칸타타(BWV82) 가운데 나오는 'Ich habe genug'라는 곡의 선율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유튜브에서 곡을 찾아 여러 번 반족해서 들었습니다. '이히 하베 게누크'란 '나는 만족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성전에서 메시야 오기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린 대목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눅2:29). '나는 만족합니다', 이 말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생이 한결 가벼워질 겁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온 세월이지만 우리는 가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가끔 멈춰 설 필요가 있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받은 은혜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면서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나가는 것인 동시에,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내는 과정입니다. 출애굽 사건 가운데 나오는 한 일화를 통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한지를 가늠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거듭되는 시련 앞에서
출애굽 공동체가 겪은 일들은 지금 우리도 겪고 있는 일들입니다. 인생은 어찌 보면 예기치 못한 시련의 연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고,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을 벗어날 때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셨지만, 홍해를 건넌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뿐이었습니다. 회막이 제작된 후에는 모세가 장막에 들어간 후에 구름기둥이 장막 어귀에 섰을 뿐입니다(출33:9). 홍해를 건너 광야길에 접어든 공동체는 이제 유아적 신앙의 단계에서 벗어나 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해주시던 꽃시절은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늘 유아기적 상태에서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탈출 공동체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주체적인 신앙의 사람들로 커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신앙의 내면화 과정이라고 할까요? 그 과정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홍해를 건넌 출애굽 공동체가 당도한 곳은 수르 광야였습니다. 그곳에서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변하는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물이 풍족하고 종려나무가 우거진 엘림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기에 또 다시 길을 떠나 신 광야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지, 둘째 달 보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출애굽기의 편집자는 그날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출16:2). 탈출할 때 준비해온 음식은 다 떨어졌고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자, 탈출의 감격은 급격하게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치 꿈꾸듯 지나온 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으로 감행한 탈출, 자기 삶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는 희망, 죽음의 위기로부터의 기적적인 구원. 놀람과 감격의 시간이었습니다. 광야에서 광야로 이어지는 여정은 멀기만 했고, 살 길은 막연했습니다. 현실이 각박하면 꿈은 뒤로 물러나게 마련입니다.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백성들은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까지 말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 다음 날'입니다. 다시 말해 감격이 잦아든 후 맞이하는 새로울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희망의 불을 지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고단한 일상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의 꿈을 퇴색시키곤 합니다.

하나님은 먹을 것이 없다고 출애굽 사건 자체를 부정하려는 이들이 조금 실망스러우셨겠지만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광야는 일종의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음식만 주신 게 아니라 그들이 각자의 욕망을 조정하면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하는 가르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만나는 제각기 먹을 만큼씩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욕심사납게 거둬봐야 다음 날 아침이면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거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과 나눠 먹어야 했습니다. 나눔의 훈련인 셈입니다. 매주 엿샛날에는 만나를 두 배로 거두어 안식일에 대비했습니다. 그때는 만나가 썩지 않았습니다. 순종과 안식의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살 때 인간을 잡아채는 조바심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시련은 그침이 없습니다. 그들이 신 광야를 벗어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마라의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물로 변화시켜 주셨지만, 르비딤에서는 그런 물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인지를 입증해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원망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잠언은 인간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곡식과 함께 절구에 넣어서 공이로 찧어도, 그 어리석음이 벗겨지지 않는다"(잠27:22). 은혜가 없이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원망하는 이들을 손가락질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출17:2) 여기서 사용된 '대들다'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7절과 연결되는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장로들과 함께 백성들보다 앞서 가라 명령하셨습니다. 장로들을 동행시킨 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증인으로 삼는 동시에, 그들을 백성의 리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상기시키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 바위 위에서 모세 앞에 서시겠다면서, 그 바위를 치라 이르십니다. 모세는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수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기자는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입을 꾹 다물고 맙니다. 여기까지 성경을 읽어온 이들은 바위에서 터져나온 생수를 마시는 사람들의 흡족하고 흥겨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겁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기자는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아쉬움을 알았던 것일까요?

• 말씀의 생수
빼어난 성서화가인 마르크 샤갈은 '바위산 두드리기'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이 장면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니스에 있는 마크 샤갈 국립 박물관에서 이 그림과 만났을 때 참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가로 236cm, 세로 232cm의 아주 큰 그림입니다. 화면의 상단에는 머리에 뿔이 난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뒤로는 그가 목동이었음을 상기시키는 양떼가 배치되어 있고, 그 위에서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는 모세가 무릎을 꿇은 채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하단에는 이미 물을 받은 듯 물동이를 가슴에 안고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는 이들과 춤으로 그 기쁨을 표현하는 이들이 보이고, 물동이에 물을 긷고 있는 여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팡이를 든 모세의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거침없이 대들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백성들에게 질렸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물이 솟구쳐 나오는 바위가 십계명을 받는 그 장면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샤갈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또는 토라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생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야말로 생수입니다. 말씀은 때로는 우리 앞길을 밝히는 빛으로, 때로는 생수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주신 경고의 말씀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암8:11)

지금이야말로 말씀의 기근 시대입니다. 홍수 때에 오히려 마실 물이 부족한 것처럼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참 말씀을 듣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없어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말씀의 빛을 따라 걸으면 쉬울 인생인데, 참 말씀을 한사코 외면하면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당장의 필요에 온통 정신을 쏟다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베푸시는 은총과 기적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은 바로 거기서 빚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깊이 박혀야 합니다. 그때 말씀은 영혼의 닻이 되어 우리를 세상 풍파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게 해줍니다.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지친 우리를 시원하게 해줍니다.

• 기억의 매개
이제 마침내 이야기의 종결부에 이르렀습니다. 생수가 터져 나오는 장관을 과감하게 생략한 출애굽기 기자는 대신 그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어떻게 명명하게 되었는지를 기록해두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출17:7)

특별한 장소나 기념물은 우리에게 어떤 기억을 상기시키곤 합니다. 일본 정부가 기를 쓰고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상기시키는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베고 자던 돌베개를 제단 삼아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시련이 닥쳐온다 해도 그가 가는 길에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키는 기념물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당도한 탈출 공동체는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 열두 개를 길갈에 세움으로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신 구원 사건을 잊지 않돌고 했습니다.

장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고 그곳을 브니엘이라 칭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끝에 나온 '므리바'와 '맛사'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믿음 없음을 상기시키는 이름입니다. 추문거리인 셈입니다. 그래도 성서 기자는 그 추문을 미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 민낯을 화장발로 가리려 하면 안 됩니다. 아픈 기억, 부끄러운 기억을 안고 가야 성숙한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는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생수가 터져나온 이후에 벌어진 흥겨운 상황을 굳이 묘사하지 않은 까닭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속적인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계약적 신실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회의가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처럼 변덕스럽지 않으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롬5:20b)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삶을 단출하게 하고, 이웃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애쓰십시오. 말씀의 바위를 쳐서 생수를 얻으십시오. 삶이 고단해도 습관적으로 힘겹다 힘겹다 말하지 말고 바흐의 칸타타처럼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생명과 평화가 꽃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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