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선한 목자

천국생활 2016. 12. 30. 12:53

선하신 목자
요10:7-11
(2016성탄절)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 어둠의 시간
언제나 한결같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4주간 동안 촛불 하나하나를 밝히면서 우리는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앙망했습니다. 우리와 역사 속에 드리운 더럽고 추한 것을 태우고 심판하는 빛, 우리를 참회로 이끄는 빛, 죄로 얼룩진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삶의 기쁨을 되돌려주는 빛, 우리를 다른 이들과 갈라놓았던 모든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서로의 얼굴에 깃든 신성함을 보게 만드는 화해의 빛을 우리는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 속에 영원이 돌입하는 것을 기뻐하는 성탄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별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예수, 그 분이 바로 영원한 빛이십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냉랭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그 빛을 이미 보았기에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늘 하나 없는 기쁨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를 잠식해온 고질적인 세대간의, 정파간의 갈등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날카롭습니다. 냉소적인 언어들이 오갑니다. 탄핵 정국으로 인해 광장이 뜨겁습니다. 시골에서는 수천만 마리의 가금류가 살처분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닭과 오리를 땅에 파묻고 있습니다. 고기를 과소비하는 풍조로 인해 시작된 공장식 축산의 폐해가 참 큽니다. 마치 묵시록의 네 기사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살처분'이라는 단어 속에 담겨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폭력성이 제게는 큰 충격과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생명도 처분의 대상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다소 근본주의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시리아의 알레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인데, 왜 그들은 그렇게 죽음의 자리에 내몰려야 합니까? 전쟁 무기는 어린이들과 여인들을 비껴가지 않습니다. 복잡한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를 논하기 이전에,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무신론적 풍조가 세계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요?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교회 옆 골목에 있는 성탄절 마켓에 대형 트럭이 돌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세상에 대한 적대감정에 사로잡힌 이들로 인해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세상(시144:14)은 언제나 도래할까요?

•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시므온은 성전에 온 예수를 품에 안고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눅2:3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일까요?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오랫동안 기다려 온 분이 바로 그 아기임을 직감했던 것일까요? 그 경험의 실체가 무엇이든 우리는 이 고백 속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긴 겨울의 끝자락에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여린 새싹처럼, 짙은 어둠 속에 스며드는 새벽 미명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게 다가옵니다. 땅에 심긴 씨앗이 자고 깨고 하는 동안 싹이 트고 잎이 나고 줄기가 자라 결실하게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조짐도 있지만 희망의 조짐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인류는 함께 지향해야 할 방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장벽처럼 우리 시야를 차단하는 일들이 많지만, 그 장벽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인 엄기호 선생의 책을 읽다가 참 공감되는 대목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모두 조급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전망이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우울한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악한 이들이 득세하는 것 같은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은 판을 한번 싹 갈아엎었으면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전자기기가 잘 작동되지 않을 때 '리셋' 버튼을 눌러 시스템을 다시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입니다. 광장은 그런 이들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됩니다.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기호 선생의 진단은 매우 엄중합니다.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삶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삶의 울증이 심각할수록 현장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광장의 조증을 갈망한다. 삶의 울증과 광장의 조증 사이의 간격이 넓을수록 광장을 대신하는 정치의 공간에서 대중의 인기를 끄는 자는 두테르테나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다. 그들은 마치 콜로세움의 검투사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 사냥과 검투의 스펙터클이 끊임없이 대중을 흥분시킨다. 삶에 남은 '흥분'은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창비, 2016년 11월 30일, p.9)

광장에 서면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아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일상의 자리에 돌아오면 지지부진한 삶이 계속되기에 우울해집니다. 광장의 조증과 삶의 울증 사이의 거리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그 거리를 좁혀줄 영웅을 기다립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사람들을 쏘아 죽인 적이 있다'고 호언하는 두테르테를 대통령으로 뽑고, 미국인들이 많은 구설에 시달리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과연 세상을 새롭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어쩌면 더 큰 환멸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정치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치인에게만 우리 운명을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 양이 드나드는 문
세례자 요한이 하루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묻습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눅7:20). 그때 주님이 뭐라셨습니까?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눅7:22-23).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줍니다. 오늘 주님을 믿는 사람들,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져야 합니다. 눈 앞의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이 더 큰 역사의 지평을 내다보게 되고, 욕망의 벌판을 비틀걸음으로 걷던 이들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걷고, 죄와 허물로 인해 영혼이 물크러졌던 이들이 고귀한 양심을 되찾고, 칭찬과 비난에만 반응하던 사람들이 하늘의 소리와 이웃의 소리를 가려듣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삶의 이유를 알지 못해 허덕이던 이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이 드나드는 문'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다음 대목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과격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배타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8) 하지만 이 말은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라는 말씀과 연결될 때만 그 의미가 오롯이 드러납니다. 종교와 종교인의 본분은 생명을 살리고, 붇돋고, 바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각자에게 품부된 생명의 몫을 한껏 살아내고, 삶을 축제로 살아내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때로는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거나, 영혼을 비틀어 불구로 만들기도 합니다. 잘못된 종교는 사람을 파괴합니다. 그릇된 확신에 사로잡힌 이들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잘 믿는다 하는 이들 가운데도 시민적 책임에 둔감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명료하게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 예수의 이름을 영접한 이들은 모두 치유의 기쁨, 생명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병자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귀신 들렸던 이들은 온전해졌고, 외로움 속에 유폐되었던 이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 서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오려고 하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의 몸을 통해 고통받는 이들과 어둠에 잠긴 땅을 치유하려 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생명의 기적, 평화의 기적, 화해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몸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수천 번 태어난다 해도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희망의 빛을 꺼뜨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곳곳에 하늘의 빛을 나르는 사람들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어둠에 유폐된 채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적대감과 환멸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환대의 공간을 넓혀가야 합니다. 무정한 세상의 냉혹함을 친절함으로 녹여야 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과 목자들이 이른 곳은 화려한 왕궁이나 성전이 아니라 말 구유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자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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