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심이라는 질병
삼상 18:1-5
[다윗이 사울과 이야기를 끝냈다. 그 뒤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마치 제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다. 사울은 그 날로 다윗을 자기와 함께 머무르게 하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요나단은 제 목숨을 아끼듯이 다윗을 아끼어, 그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기로 굳게 언약을 맺고,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고,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 모두 다윗에게 주었다. 다윗은, 사울이 어떤 임무를 주어서 보내든지, 맡은 일을 잘 해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그 일을 마땅하게 여겼다.]
• 역사의 무대 앞에 서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엘라 골짜기를 아십니까? 그곳은 베들레헴에서 서남쪽으로 24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골짜기로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역에서 유다의 산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울 때 누가 이곳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날 수도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 거친 골짜기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가드 출신의 거인 장수 골리앗과 소년 다윗의 싸움이 벌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그 골짜기에 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반대편 진영에 모습을 드러낸 골리앗의 장대한 모습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진영 앞까지 와서 누구든 용기있는 자가 나와 자기와 자웅을 겨루자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습니다. 똑같은 일이 사십 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그곳에 왔던 다윗은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허락을 받아 그와 대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준 갑옷과 투구와 칼로 무장을 해보았지만 몸에 익숙하지 않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 대신 한 손에는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다른 손에는 무릿매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고른 돌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윗의 승리가 전투 능력이나 지략의 승리라기보다는 여호와의 승리임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스가랴서에는 제2성전을 건축했던 스룹바벨 총독을 두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을 떠서 내올 때에,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서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고 외칠 것이다."(슥4:6-7)
힘과 권력에 중독된 이들은 자기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오류는 늘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살다보면 마치 '큰 산'에 가로막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큰 산'이 '평지'가 되는 법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갑옷과 투구를 벗고 칼을 내려놓고 지팡이를 든 것은 다윗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골리앗의 죽음으로 그 전쟁의 승패는 결정났습니다. 블레셋은 달아났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 승승장구
사울은 다윗을 불러 그 공을 크게 치하했습니다. 사울은 유능한 인재를 곁에 두고 싶었기에 다윗에게 자기와 함께 머물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이 배석하고 있었는데, 다윗을 보는 순간 마치 제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사로잡힘입니다. 의지적인 선택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가까운 친구로 지내기로 굳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의 징표로 자기의 겉옷, 활, 허리띠까지 선물로 주었습니다. 왕자와 목동 출신의 한 사내가 맺은 언약은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때가 사울이 왕위에 오른지 정확히 몇 해 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요나단이 권력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정은 평등한 두 주체 사이에서만 가능한 법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아낌의 마음이 끝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우정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사울에게로 관심을 집중해보려 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맡기는 임무를 잘 수행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특정되고 있지는 않지만 사울이 그를 장군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군대를 지휘하는 일이 중심이었을 것입니다. 잠언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잠25:13). 다윗은 사울에게 그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벼락 출세처럼 보였지만 백성들은 물론이고 사울의 신하들까지 다윗이 중용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참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실성과 충실성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미덕입니다. 잠언은 "게으른 사람은 부리는 사람에게,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다"(10:26)고 말합니다. 참 생생한 표현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 자기를 믿어준 사람들의 신뢰를 배신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면서 밥벌이나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거기 비해 다윗은 참 믿음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는 성실하고 충실해서 문제인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관료적 성실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고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이들은 매우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늘 강자의 편에 서곤 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일러 '생각 없음' 혹은 '멍청함'이라 말합니다. 세상은 기존 질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잘 적응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순종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삽니다. 하지만 순종해서는 안 될 때도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해야 합니다. 호락호락 넘어가서도 안 됩니다. 까칠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런 이들에게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어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곤 합니다. 한번 두번 그런 경험이 축적되면 우리 몸과 마음은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 검열에 돌입합니다. 차츰 불의한 일을 보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게 됩니다. 악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그런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 관계의 위기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 다시 사울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다윗에게로 사람들의 눈길이 쏠렸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사울은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성읍의 여인들이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사울을 환영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왕의 승리로 귀속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18:7) 하고 노래하자 사울은 몹시 언짢았습니다. 모욕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기울고 있다고 지레 짐작한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18:9). 개역 성경은 이 대목을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라고 옮겨놓았습니다. 시기는 눈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권력은 독점을 지향하기에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법입니다. 권력자들은 늘 주변에 있는 이들을 두려워합니다. 헤롯대왕은 가장 가까운 신하들은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죽였습니다. 로마 황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두려움이 커지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변해갑니다. 이성적인 사유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그러한 시기심에 사로잡혔던 그 때부터 악한 영이 사울을 내리덮쳤다고 말합니다. 악한 영은 바로 시기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 속에 들어오는가 봅니다.
기독교 역사가 가르치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심, 나태가 그것입니다. 사울은 질투 혹은 시기심이라는 질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잠언에도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14:30)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을 열거하시는 중에 '악한 시선'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7:22). '악한 시선'이 바로 '시기심'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견뎌하는 마음입니다. 심리학에서는 타자들을 향한 인간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라는 독일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샤덴'은 '고통'이라는 뜻이고 '프로이데'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두 단어가 합쳐져서 타자의 불행이나 고통을 좋아하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기도 하고, 남의 불행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 마음이 평안할 리 없습니다. 우리 삶에 안식이 없다면 그 까닭을 곰곰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심이 파괴적인 까닭은 또 있습니다. 시기의 대상은 먼 데 있는 사람 혹은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나보다 월등히 나은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시기심이 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이에 대해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교 의식이 작동됩니다. 이 마음만 내려놓아도 인생이 편해질 텐데, 우리는 늘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둥거립니다. 주변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그렇기에 연습이 필요합니다. 가까운 이들이 이룬 성취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함께 기뻐해주는 연습 말입니다.
• 한 몸 공동체를 지향하라
바울 사도는 교회를 일러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교회는 유기체라는 말입니다. 유기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의 일부가 아프면 몸 전체가 괴로움을 겪습니다. 몸의 각 지체들은 아프거나 연약해진 지체의 회복을 위해 협력하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2:20-22)
교회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환대할 때 탄생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 평화와 안식을 빼앗아갑니다. 경쟁의식을 내면화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 승자 독식사회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습니다. 그 멍 때문에 우리는 작은 타격에도 비명을 질러대곤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호흡이 가지런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십니까? 늘 조마조마합니다.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는 이들의 운명이 이러합니다.
교회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상처입은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샬롬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을 조금의 유보도 없이 함께 기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이들의 삶을 가르치면서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롬12:15-16)라고 권면합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연약한 이들을 중심에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은 연약한 이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도시는 노약자들과 어린이들,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에 참 위험한 곳입니다. 정신없이 질주하는 세상은 그들의 더딘 속도를 못견뎌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속도에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혼자 걷는 열 걸음보다 함께 걷는 한 걸음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더디고 답답하더라도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합니다. C.S 루이스는 "일과 연약함은 신들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않은 두 가지 위안"(C.S 루이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홍성사, p.106)이라고 말했습니다. '위안'이라는 말을 저는 '희망의 단초'라고 바꿔서 읽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보듬어 안으려 할 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릴 때 우리 속에 있는 시기심이라는 독성이 빠져나가고, 하늘의 희망이 우리 삶에 유입됩니다. 권력의 단맛에 취했던 사울은 시기심이라는 병에서 벗어나지 못해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성공이 때로는 시험이 되는 법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 이웃들이 마음 편히 다가와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을 마련하고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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