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소란하게 한 사람들
행 17:1-9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유대 사람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다가 패거리를 지어서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그러나 그들을 찾지 못하고,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시청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 군중과 시청 관원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였다. 그러나 시청 관원들은 야손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다.]
• 어디에 이끌리는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상강입니다. 서리가 내리는 절기가 바야흐로 열렸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맘때면 추원보본追遠報本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추원'은 지나간 일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일이고, '보본'은 자기 뿌리를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감사함으로 돌아본다는 게 참 중요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인생길 걷다 보면 힘들고 짜증나는 일들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 마음이 황폐해지지 않으려면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생이 사랑의 빚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기민요인 '태평가'를 기억하시는지요?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성화를 내어서 무엇하나/인생 일장춘몽인데 아니나 놀고서 무엇하리". 후렴이 '니나노 닐리리야 니나노' 하고 이어집니다. 젊을 때는 이 노래가 퇴폐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노래가 그렇게 싫지는 않습니다. 죽어라 일하라고 은근히 부추기는 세상에서 이 노래는 그래도 틈을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기왕 사는 인생 즐겁고 기쁘게, 그리고 보람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을 가리켜 흔히 '도상途上의 실존'이라 말합니다. 한 군데 머물지 못하고 늘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겠지요. 어머니의 모태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죽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순간까지 우리는 다 길 위에서 살아갑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강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지만, 발을 담그는 사람 또한 조금 전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아가는 길의 방향성입니다. 거칠 게 분류하자면 빛을 향하는 사람도 있고 어둠을 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이끌리는 사람이 빛을 향하는 사람이라면,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은 어둠을 향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경건한 사람들은 누구?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바울 사도는 분명한 지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든든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9:26) 이형기 선생님의 시 '낙화'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야할 때 뿐이겠습니까? 가야할 곳을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누가 농조로 쓴 글을 보았습니다. '갈대 같은 인생, 갈 데와 갈 때를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울 사도는 길 위에서 살다 간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선교의 동행인 선정 혹은 방법론을 놓고 바나바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게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별로 기억됩니다. 바울은 실라를 대동한 채 육로를 통해 지금의 터키 지역을 관통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환상 가운데 한 사람이 나타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는(행16:9) 청을 듣고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감옥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시련도 그의 발걸음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길을 떠나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디아스포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기도소'(proseuchē)나 '회당'(synagōgē)을 만들었고 그곳에 모여 말씀을 배우거나 자기들 지역사회의 현안을 논의하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딜 가나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노골화되기 전까지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 먼저 회당을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곤 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의 정확하고 해박한 성경 인용, 그리고 새로운 해석에 매료되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와 성문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게 수렴된다는 사실을 그는 밝혔습니다.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시는 분이 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지 해석하고 증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특히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이 자기들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생각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다가 패거리를 지어서 시내에 소요를 일으켰고, 사도 일행이 머물고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일행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대체 그들은 왜 이리 흥분할 것일까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흔히 '경건한 사람'으로 번역되는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방인으로서 회당 공동체에 참여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둘 등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phobeō, 행10:22, 13:16)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한 개종자" 혹은 "경건한 사람"(sebomai, 행13:43, 16:14,17:4)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 유대인의 도덕성을 받아들이고, 유대교 회당에 출석했던"(존 도미니크 크로산, <하나님과 제국>, 이종욱 옮김, 포이에마, 2010년 1월 21일, p.243)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교 회당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유대교의 관습을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고, 유대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그 지역 사회와 유대인들 사이의 매개 역할을 감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50여년 전에 일단의 고고학자들이 회당으로 보이는 건물 입구에 세워진 기둥을 살펴보다가 그 건물을 지을 때 기부금을 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회당 건립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죽 적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이라는 제하에 열거된 이름들도 있었습니다. 그로써 회당 공동체는 그 지역 명사들의 후원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바울이 등장하여 그들을 예수에게로 이끄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 폭력의 유혹
그런 시기심 혹은 질투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인 행태는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란을 피움으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종교가 폭력과 결합하는 순간 가르침의 본질은 사라지고 타락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얽히고 설킨 문제를 일거에 풀기 위해 해결사의 도움을 받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폭력이 가끔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모략과 위증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들은 야손과 신도 일행을 시청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6b-7)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 이게 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던 모양입니다. '소란하게 하다'라는 단어는 위 아래를 뒤바꿔놓는다는 뜻입니다. 질서 혹은 일사불란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이들이 달갑지 않은 법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보며 사람들은 부자는 부자의 운명이 있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운명이 있다고 체념섞인 푸념을 늘어놓곤 합니다.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최00라는 여인과 그의 딸 정00를 보십시오. 그 한 사람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과 기업이 동원된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에 있는 방 20개짜리 호텔을 샀다는 말도 들리고, 임대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국정을 농단했다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유언비어流言蜚語일까요? 흐르는 말과 쏘는 말에 진실이 담겨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걸 보고도 입을 다물라고 말한다면 참 파렴치한 것 아닌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릇된 것을 그릇된 것으로, 불의한 것은 불의한 것으로 드러내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상대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학자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은 사회가 당연시하는 관례에 맞서며 때로는 지배문화의 본질에 도전하기도 한다"(도널드 크레이빌,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나라>, 김기철 옮김, 복있는사람, 2010년 7월 27일, p.26-7)고 말합니다. 지배문화에 도전하지 않는 교회는 생명력 없는 교회입니다.
• 2위는 패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기존의 세상 한복판에서 샘물처럼 솟아나 목마른 이들을 해갈시켜줍니다. 찬송 시인은 이 은총의 샘물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샘에 솟는 물 강같이 흘러/온 천하 만국에 다 통하네/빈부나 귀천에 분별이 없이/다 와서 쉬고 또 마시겠네"(526장 2절).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이전에 하찮아 보였던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고, 홀로 행복한 삶이 아니라 함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가끔 쓰는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성경에서 충만(pleroma)이란 말은 '자기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에너지'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은혜에 충만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타자들에게 마음을 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자'라는 평판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눈이 먼 사람들은 하나님 또한 보지 못합니다. 아니, 볼 생각이 아예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불순분자', '위험인물',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자'라는 찌지를 붙입니다. 새 사람의 길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동을 정치적 색깔로 물들여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받았던 오해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사답게 고난을 함께 달게 받으십시오"(딤후2:3). 유대교인들의 음험한 속을 시청 관원들이 먼저 알았습니다. 그들은 야손과 그 일행이 큰 문제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소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보석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선교는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바울과 실라가 그곳에 심은 복음의 씨앗은 이후에 싹을 틔우고야 말았습니다. 패배 혹은 좌절처럼 보이지만 기어코 이기는 것, 바로 그것이 생명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믿는다면 현실이 암담하다 하여 낙심하거나,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축구선수인 리오넬 메시를 아시지요?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한다 하여 비난을 받곤 했습니다. 큰 대회에서 탈락한 후 그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때 요아나 푹스라는 교사가 은퇴를 만류하는 편지를 공개적으로 썼습니다. 그는 승리만 가치있다고 느끼고 패배를 통해 성장하는 것은 무시하는 어리석음에 넘어가지 말라면서 "아이들에게 이기는 것만이 우선이고 유일한 가치라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메시가 어린 시절부터 성장 호르몬 결핍이라는 병을 이겨내기 위해 계속 치료를 받으면서 기어코 그 자리까지 이르렀음을 안다면서 "제발 우리 아이들에게 2위는 패배라고, 경기에 지는 게 영광을 잃게 되는 일이라는 선례를 남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믿음의 길은 궁극적으로는 승리의 길이지만, 늘 실패와 고통의 가시밭길이 기다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길을 잘 걸어갔습니다. 생의 시련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기도 하지만 지향이 분명하다면 길은 분명히 열립니다. 우리는 경쟁을 원리로 하고 승리, 성공, 부유함을 목표로 삼는 세상에서, 서로 함께 협력하면서 모두가 자기 삶의 몫을 한껏 누리며 사는 생명 세상, 평화 세상을 지향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지금부터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들 속에 생명과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가끔 세찬 바람이 불어 우리가 들고 있는 희망의 불이 꺼질 수도 있지만, 지금 옆에 있는 이들이 우리에게 불씨를 나눠줄 겁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 거룩한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길을 닦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 위에서 주님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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