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대 사람 요셉
막 15:42-47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그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왔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주었다. 요셉은 삼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려다가 그 삼베로 싸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그를 모시고, 무덤 어귀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디에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 생의 원칙이 있는가?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노동의 현장을 지키며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도 함께 하시길 빕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깨면 마치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고단한 현실을 사는 우리 가슴에도 시퍼런 멍이 든 것 같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피로가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샬롬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에 우리 영혼은 지향을 잃고 떠돕니다. 문득 문득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분주하게 지내기는 하는데 뭔가 고갱이는 쏙 빠진 것같은 아뜩함이 느껴집니다. 마치 한 문명의 종착역을 보는 것 같은 일들이 날마다 벌어집니다. 이런 사회 현실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많지만 누구도 세상을 치유하지는 못합니다.
사는 게 힘겹다고 하여 삶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베르 카뮈는 세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부조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아무리 애써 봐도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느끼는 형이상학적인 부조리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들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국가의 고집에서 비롯된 정치적 부조리입니다. 먹고 살기에 분주한 이들은 가급적이면 이런 복잡한 생각을 멀리하려 합니다. 하잘 것 없는 오락에 넋을 잃는 것은 현실과 직면하기 싫어서입니다. 하지만 '의미'를 찾는 존재인 인간이 마냥 그런 질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이들과 얽히고 설킨 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기 나름의 생의 원칙을 정해야 합니다. 높고 힘있는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살 것인지, 작고 사소한 생명을 보듬어 안으며 살 것인지. 먹고 마시는 일에 몰두한 채 살 것인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 것인지. 가난하더라도 맑고 깨끗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부유함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 홀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인지, 함께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인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늘 빚 갚는 마음으로 살 것인지, 타자에 대한 원망 속에서 살 것인지. 머리 좋고 학벌 좋은 사람들이 허망한 열정에 사로잡혀 생을 허비하는 모습을 우리는 날마다 접하며 삽니다. 외적 현실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 명실상부名實相符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 길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예수가 이미 앞서 걸으신 그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지금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벗이 되어주는 길이 바로 예수의 길입니다. 홀로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되게 삶으로써 다른 이들을 복되게 만드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은 입신출세의 길이 아니라 자기 비움의 길입니다. 높아짐이나 욕망 충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들은 이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 부인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라야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안을 수 있습니다. 남에 대한 애달픔, 다른 이를 복되게 하려는 마음은 자기를 부인한 이들에게 찾아오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손해를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짓 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면서 불의를 불의로,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두가지에 미치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는 예수의 길에 접어들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논어 옹야雍也편(6-23)에는 제사에 쓰는 술잔인 '고觚'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觚가 고답지 않으니 이것이 고라 할 수 있느냐!" 이 술잔은 위는 둥글고 중간은 가늘며 아래는 네 개의 각진 테두리를 대어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합니다. 윗부분을 이루는 원형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랫부분이 이루는 사각형은 땅을 상징합니다. 제사란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이니까 '고'가 제사 술잔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김상환, <공자의 생활난>, 북코리아, 2016년 6월 20일, p.76). 공자가 탄식했던 것은 술잔의 이름은 여전히 고인데 그 형태가 변형되어 아래쪽 각이 사라진 고를 고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이건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는다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정작 따를 생각은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요1:38, 3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물은 것은 예수가 머물고 있던 숙소가 어디냐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들을 이미 하나님 나라의 꿈에 사로잡힌 이들의 삶의 현장으로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아픈 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모두가 서로를 귀히 여기는 곳이야말로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기적, 사랑의 기적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이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갔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단은 이렇게 물결이 번져가듯 시나브로 형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먼저 있었고, 제자들은 그 현실에 동참한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 요셉이라는 사나이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꿈을 함께 꾸었던 열 두 제자 말고도 주님에게는 숨겨진 다른 제자들이 제법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며 섬기던 여성 제자들도 거기에 해당됩니다. 마가는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머물렀던 여인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출신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입니다. 또 그렇게 생업을 다 내려놓고 예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예수 운동에 공감하고 예수와 제자들을 지성으로 섬겼던 이들도 있습니다.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와 마르다와 같은 이들 말입니다. 이런 이들 외에도 공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거나 따르지는 않았지만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깊이 공감하고 그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엔 신부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시름하는 동조자'라 했습니다. 절묘한 조어입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도왔던 니고데모나 오늘 본문의 주동인물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가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삼은 것은 바로 오늘(7월 31일)이 성 아리마대 요셉의 축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 가운데만 잠시 등장하지만 네 복음서가 모두 그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를 '명망 있는 의회 의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15:43), 마태는 '부자'와 '예수의 제자'로(27:57), 요한은 간단하게 '예수의 제자'로(19:38), 누가는 '공의회 의원이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23:50-51)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그의 사람됨에 대한 평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제법 됩니다. 그는 공의회 의원이고 부자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회 혹은 공의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대(大) 산헤드린을 일컫는 말입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최고의결기구입니다. 대제사장이 당연직 의장이 되고 사두개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가운데서도 꽤 유력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의 숨겨진 제자였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역사의 새로움을 대망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은 그가 예수를 모함하여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23:51)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아리마대 요셉보다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었던 니고데모에게 더 호의적입니다. 그는 예수 곁에 머물지 않고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주님에 대한 존경과 호의를 품고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밀 때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7:51) 하고 말한 것이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요한은 그가 처형당한 예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19:3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든 니고데모든 사법 당국에 의해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처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비상한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 가운데 십자가 아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사랑받던 제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노라 장담했던 베드로조차 가야바의 관저에서 "당신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요18:25) 하고 다그쳐 묻는 이에게 "나는 아니오!"라고 단호히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예수와 연루되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마대 요셉은 어떻게 그런 비상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더욱이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여겼습니다.
• 하나님의 법에 따르다
이 대목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가 떠오릅니다. 안티고네는 오디디푸스 왕의 딸인데, 두 오라버니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왕위를 다투다가 서로를 죽이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테바이의 왕인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시신은 명예롭게 장사지내 주었지만,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무덤에 묻혀서도 안 되고 사람들의 애도를 받아도 안 된다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을 어기는 자는 사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자기 오빠의 시신이 땅에 장치된 채 그렇게 치욕을 당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땅에 묻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붙잡아 어찌하여 엄중한 국가의 법을 어겼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때 안티고네가 한 말은 매우 강력합니다.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서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받고 싶지가 않았어요."(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1년 5월 25일, p.110) 왕의 명령 혹은 국법은 신의 법보다 우선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티고네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시신을 욕보이는 것은 신들께 폭행을 가하는 것이라며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어쩌면 안티고네와 같은 고뇌 속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나선다고 하여 그를 되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고, 괜히 나섰다가 곤란한 일에 휘말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자기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모른 척 할 수 있는 핑곗거리는 또 있었습니다. 유월절 대축제일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시신과 접촉하면 불결한 자가 되어 그 축제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이익도 없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양심의 법이 그렇게 명했기 때문일 겁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심어두신 아름다운 법입니다. 양심은 우리를 참 사람의 자리로 부르는 하나님의 소환장입니다.
요셉은 깊은 번민의 시간 끝에 두려움과 주저를 떨치고 일어나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여 정성껏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당장의 평안을 위해 평생 자책에 시달리며 살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앙 양심에 따라 살기를 택했습니다. 그 순간 불멸의 생명이 그의 영혼 속에 유입되었을 겁니다. 살기 위해 택한 길이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할 치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채 선택한 길이 우리 영혼의 해방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역사는 이렇게 두려워하면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위해 용기를 낸 이들을 통해 조금씩 발전합니다.
폭력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이 제공하는 달콤함에 길들여진 채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직시하면서 꿋꿋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난민들에 의해 자행되는 범죄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난민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면서 국민들의 통합을 촉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하는 일이고, 어둠이 지극한 세상에 빛을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이런 위기의 때에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이냐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돌보심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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