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열린 식탁

천국생활 2016. 10. 23. 17:13

열린 식탁
마9:9-13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서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세상과의 불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그리고 세계성찬주일을 맞은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과 찢기고 상처입은 세계와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가 하나님 품으로 옮겨가신 농민 백남기 님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든 이들,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어린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은 이리도 어지럽건만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추분을 지나 한로를 향해 가면서 날이 조금씩 선득해지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조금씩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어가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도 인간다운 품격이 깃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마른 사람들의 새된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눈과 귀를 닫고 산다면 모를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참 사람이 더욱 그리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얼굴'이라는 시의 몇 구절이 자꾸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함 선생님은 예수의 모습에서 참 사람의 모습, 참 아름다운 얼굴을 찾아냅니다. 새벽처럼 빛나던 얼굴, 이슬 머금은 백합같이 향기 맑던 얼굴,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태산처럼 누워 평안히 잠자던 얼굴, 채찍 들어 소리치고 도둑 무리 내몰면서 아버지 집 내놓으라고 진노하던 얼굴, 가시관 쓰고 어둠의 권세 앞에서 바람 잔 저녁 바다인 듯 잠잠하시던 얼굴, 부활의 얼굴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은 어떠한지요?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두루 원만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분이셨지만, 권력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는 잘 길들여지지 않는 분, 요즘 말로 하자면 사회성 혹은 융통성이 부족한 분이었습니다. 적당히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는 영 서툰 분이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이 속해 있는 마태복음 9장은 당시의 유력자들과 대립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율법학자들과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데려온 중풍병자를 향해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즉시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귀속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 생명의 화복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학을 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는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와 제자들에게 시빗조로 말을 걸어온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의 갈등이 전개됩니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기도, 금식,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와 그 제자들은 경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주님은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빠져 있던 형식주의의 완고함을 넌즈시 드러내셨습니다.

• 마태를 부르심
오늘 본문인 9절부터 13절은 세리 마태를 부르신 후에 벌어진 갈등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는 "나를 따라오너라" 이르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마제국의 하청을 받아 세금을 걷는 일을 대행하고 있던 세리들은 사람들의 증오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국이 할당한 세금 외에도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주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곤 했습니다. 공권력을 등에 업은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수치와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수전노, 반역자, 악질', 환청처럼 그런 비웃음이 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립감은 그들을 더욱 돈에 집착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돈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공허감 또한 깊어 갔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세리를 그저 악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애쓴 이들도 있겠지만, 더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형편에 몰려 그 자리를 선택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철학자는 '다른 이들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함 혹은 멍청함'이 악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거나 사주한 이들이 그러합니다. 권력의 눈치만 보는 이들에게는 지금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선악의 잣대만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주님이 "나를 따라오너라" 했을 때 마태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를 바 없었던 세관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내면에서 오랫동안 자라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를 냉혹한 인간으로 만들었던 비인간적인 차가움은 스러집니다. 제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의 가슴에 기대어 울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애써 숨겨왔지만 자기 속에서 자라고 있던 두려움과 연약함을 다 드러내놓고 엉엉 울고 싶은 순간 말입니다. 어떠한 정죄도 없이 그를 용납해 줄 품을 만나면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눈길을 통해 자기 안의 상처와 아픔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는 그런 기쁨이 빚어낸 축제입니다. 주님은 마태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을 의식한다면 세리의 집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참 사람으로 회복되고 있는 한 존재가 너무도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자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편견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인위적인 타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사람을 가르는 벽이 무너질 때 찾아오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은 죄인과 세리가 아니라 벌거벗은 인간이었습니다.

• 편견에 갇힌 사람들
그러나 모두가 기뻐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 세계에 갇힌 채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9:11) 그들은 예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경건한 사람이라면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지요. 그들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집 안에 들어와 있던 것일까요? 집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요? 알 수는 없지만 예수의 행태를 못마땅해하는 그들의 마음은 절로 짚여옵니다.

그들의 사고는 경직되어 있습니다. 익숙한 세계에만 머물 때 새로운 구원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가끔 알을 깨는 고통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율법과 전통을 철저하게 준수한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자부심이야말로 그들을 가두는 철창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이야기에 마음을 열 수 없었습니다.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든 낯선 것은 대개 위험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냥 낯선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자기들의 안일한 일상을 깨뜨리는 낯섦은 용납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주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삼중적으로 답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스스로 건강하다, 의롭다 하는 이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과 자기들의 차별성을 강조하려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죄인과 세리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비웃고 정죄할 이들을 창조합니다. 어찌 보면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죄인과 세리'는 좋은 사람들이고, 바리새파는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철저하게 사는 이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의 문제는 낯선 사람들을 맞아들일 만한 품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멸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에 동참합니다. 성찬의 식탁은 분열된 온 인류를 한 가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상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모셔들일 때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식탁에 나아옴으로 하나됨의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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