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입춘첩
신6:1-9
(2017/02/05, 주현 후 제5주)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가르치라고 나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당신들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십시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당신들과 당신들 자손이 오래오래 잘 살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이 모든 말을 듣고 성심껏 지키면,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당신들이 잘 되고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 입춘 무렵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제가 입춘이었습니다. 계절에 가장 민감한 쇼핑몰에서는 벌써 봄 상품을 전시해놓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남녘에서는 벌써 청매화가 개화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농가월령가는 입춘과 우수 무렵의 정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山中 間壑에 빙설氷雪은 남았으나, 平郊 廣野에 雲物이 變하도다". 물이 흐르는 골짜기마다 눈과 얼음이 남았지만, 넓고 평평한 들녘에는 이미 천지간의 경치가 변하고 있다고 새기면 되겠습니다. 좋은 시절입니다. 입춘 무렵이면 사람들은 대문에 立春大吉, 建陽多慶 등의 입춘첩을 적어 붙이곤 했습니다. 따뜻한 생명의 봄바람이 집에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겨울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겨울바람이 매섭습니다. 트럼프 정부가 취하는 조치들이 미국 내에서 논란을 일으킬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우려를 사고 있습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일부 무슬림 국가 사람들과 난민들의 입국을 불허한다는 조치가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미국의 복음주의 계열의 잡지인 'Sojourners'의 발행인인 짐 월리스(Jim Wallis)는 인종적 편견, 여성 차별,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적 시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멸시를 특징으로 하는 트럼프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해 보자고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제안했습니다. 미국만 심각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역시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편 가르기가 성행하고,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적대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조롱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멍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작은 자극에도 '아야' 하고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근본적인 것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신명기에 나오는 '쉐마Shema'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을 가늠해 보려고 합니다. '쉐마'는 '너희는 들어라'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오랜 광야생활에 지쳐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던 탈출공동체에게 자기들이 지향해야 할 삶과 역사의 목표를 간명하게 제시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5장은 십계명에 대한 재진술을 내포하고 있는데, 모세는 그 계명의 현재성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언약을 우리 조상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우신 것입니다"(신5:3). 언약은 과거에 일회적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실존적 결단을 통해 새롭게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언약은 생동하는 삶의 길이 됩니다.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해설한 저의 책 <오래된 새 길>은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정한 것입니다.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면 마음을 비우고 오래된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 속에서 터져나온 빛으로 우리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산다는 것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현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일 것입니다.
• 우리의 하나님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태도를 칭찬하시면서 그들이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잘 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쉐마Shema는 바로 그 직후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6:4) 짤막하지만 이 구절을 잘 이해하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가 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일단 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탈출 공동체 혹은 언약 공동체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고독한 개인의 성찰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신산스런 역사의 골짜기를 함께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겪었던 절망스런 현실, 무려 열 번이나 계속된 재앙, 탈출, 갈대 바다 앞에서의 절망,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절망스러웠던 경험들, 이민족들과의 전쟁, 하나님과의 언약, 회막 만들기….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삶은 늘 곤고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과정을 함께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속에는 이렇듯 다채로운 경험이 아로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입에서 발화될 때마다 사람들은 함께 걸어왔던 시간을 떠올리며 애틋한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한 신앙공동체의 '우리' 의식이 성장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타자들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에 동참할 때입니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라는 고백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고대인들은 세상에 다양한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신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통치 영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주특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출산을 돕는다든지, 비와 바람을 보내 농사가 잘 되게 한다든지, 바다를 관장한다든지, 전쟁을 주관하는 등의 역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나 종교에 등장하는 신들을 '이상화된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특정한 가능성이 최대치로 발현된 존재를 상정하고 그를 신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외화한 것이 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고대 세계는 여러 신들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다른 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속성들을 야훼 하나님께 귀속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고백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 속에는 더 심오한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라는 단어 자체가 아닙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 더 중요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전제정치 하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채 살고 있던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강자들의 편익에 복무하던 다른 종교의 신들과는 달리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약자들의 편에 서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6:5). 쉐마의 이런 요구는 압도적인 구원을 경험한 이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시늉만 하지 말고 자발적인 의지로, 자아 전체를 바쳐서,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은 의지와 관계 없이 저절로 발생하는 감정이지만, 그 사랑의 지속은 매우 의지적인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대한 기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찬송가 중 하나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 노예 운반선의 선장으로 살았던 존 뉴턴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자신의 비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기억하는 자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랑은 마주 봄입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바라봄을 통해 마치 상대의 존재 전체를 흡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마주 봄의 상태야말로 사랑 안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신비주의 시인 루미는 사랑을 가리켜 '사랑하는 대상 안에서 자기를 잃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랑은 나를 상대에게 온전히 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개입하는 순간 마주 봄의 관계는 깨지고 등 돌림이 시작됩니다. 등 돌림은 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일을 기꺼이 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한다 말하면서 제 좋을대로 행동하는 이가 있다면 그의 사랑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떨 때 기뻐하실까요?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보고 경탄할 때,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때입니다. 길가에 피어난 꽃 한 송이, 흘러가는 강물, 곱게 물드는 노을,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 자유롭게 뛰노는 짐승들, 숲을 깨우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기뻐할 때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라 할 수 있습니다. 경탄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타자에 대해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사회학자인 김홍중 교수는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원전에 의존하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10만 년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과 생명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빌려 사용하고 있는 것"(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년 11월 14일, p.36)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합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인 동시에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기꺼이 당신의 손과 발이 되려 할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억압과 착취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 아무리 몸부림쳐도 가난과 질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설 자리가 없어 서러운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는 것이 믿음의 징표입니다.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사랑은 우리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에고를 그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거기에 우리 이웃을 모시는 일이며,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굳은 지각을 깨뜨리는 것"(Harold S. Kushner,, Anchor Books, p.128)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초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 말씀의 내면화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말은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내재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6:8-9).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할 때마다 성경구절을 기록한 양피지를 넣은 작은 상자인 테필린(tefillin, 經文)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마 혹은 미간에 붙이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기를 바란다는 뜻일 겁니다. 맥이 뛰는 자리인 손목에 매는 것은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다는 뜻일 겁니다. 문설주나 대문에 써 붙이는 것을 가리켜 '메주자mezuza'라 하는데, 집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에도 말씀을 따라 살라는 뜻일 겁니다. 가히 신앙인의 입춘첩이라 할만하지 않습니까?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허리춤에 늘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敬義劍'을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성성자는 소리가 나는 방울인데, 그걸 차고 다녔다는 것은 선비답게 '언제나 깨어 있자'는 일종의 다짐일 것잊니다. 경의검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새겼다고 하는데,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고 밖으로는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의라는 뜻으로 선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머니에 조그마한 십자가를 넣고 다닐 때가 있습니다. 가끔 그것을 꺼내 손에 가만히 쥐어보곤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자 '생명'입니다. 아니, 죽어야 살 수 있음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게 낫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은 철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또한 공동체의 일이니까 그런 신앙을 후세대에게 전해주는 일은 부모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6:7). 말로만 가르치면 안 됩니다. 가르침은 가리킴이어야 합니다. 손가락만의 가리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 세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가리키는 삶의 방향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나는 '바담 풍' 하면서 자식들이 '바람 풍' 하고 발음하기를 바라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버릇이 몸과 마음에 배어들면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욕망을 거스르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익혀야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생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고, 이웃의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인정의 황무지, 을씨년스런 바람이 부는 광야처럼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생명의 봄바람이 되어 시든 생명을 깨우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내면에 꽃을 피운 사람 하나가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이들에게 역사의 봄을 일깨워줍니다. 입춘가절에 우리 믿음의 나무에도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신6:1-9
(2017/02/05, 주현 후 제5주)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가르치라고 나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당신들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십시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당신들과 당신들 자손이 오래오래 잘 살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이 모든 말을 듣고 성심껏 지키면,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당신들이 잘 되고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 입춘 무렵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제가 입춘이었습니다. 계절에 가장 민감한 쇼핑몰에서는 벌써 봄 상품을 전시해놓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남녘에서는 벌써 청매화가 개화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농가월령가는 입춘과 우수 무렵의 정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山中 間壑에 빙설氷雪은 남았으나, 平郊 廣野에 雲物이 變하도다". 물이 흐르는 골짜기마다 눈과 얼음이 남았지만, 넓고 평평한 들녘에는 이미 천지간의 경치가 변하고 있다고 새기면 되겠습니다. 좋은 시절입니다. 입춘 무렵이면 사람들은 대문에 立春大吉, 建陽多慶 등의 입춘첩을 적어 붙이곤 했습니다. 따뜻한 생명의 봄바람이 집에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겨울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겨울바람이 매섭습니다. 트럼프 정부가 취하는 조치들이 미국 내에서 논란을 일으킬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우려를 사고 있습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일부 무슬림 국가 사람들과 난민들의 입국을 불허한다는 조치가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미국의 복음주의 계열의 잡지인 'Sojourners'의 발행인인 짐 월리스(Jim Wallis)는 인종적 편견, 여성 차별,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적 시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멸시를 특징으로 하는 트럼프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해 보자고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제안했습니다. 미국만 심각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역시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편 가르기가 성행하고,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적대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조롱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멍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작은 자극에도 '아야' 하고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근본적인 것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신명기에 나오는 '쉐마Shema'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을 가늠해 보려고 합니다. '쉐마'는 '너희는 들어라'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오랜 광야생활에 지쳐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던 탈출공동체에게 자기들이 지향해야 할 삶과 역사의 목표를 간명하게 제시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5장은 십계명에 대한 재진술을 내포하고 있는데, 모세는 그 계명의 현재성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언약을 우리 조상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우신 것입니다"(신5:3). 언약은 과거에 일회적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실존적 결단을 통해 새롭게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언약은 생동하는 삶의 길이 됩니다.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해설한 저의 책 <오래된 새 길>은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정한 것입니다.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면 마음을 비우고 오래된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 속에서 터져나온 빛으로 우리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산다는 것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현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일 것입니다.
• 우리의 하나님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태도를 칭찬하시면서 그들이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잘 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쉐마Shema는 바로 그 직후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6:4) 짤막하지만 이 구절을 잘 이해하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가 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일단 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탈출 공동체 혹은 언약 공동체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고독한 개인의 성찰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신산스런 역사의 골짜기를 함께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겪었던 절망스런 현실, 무려 열 번이나 계속된 재앙, 탈출, 갈대 바다 앞에서의 절망,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절망스러웠던 경험들, 이민족들과의 전쟁, 하나님과의 언약, 회막 만들기….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삶은 늘 곤고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과정을 함께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속에는 이렇듯 다채로운 경험이 아로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입에서 발화될 때마다 사람들은 함께 걸어왔던 시간을 떠올리며 애틋한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한 신앙공동체의 '우리' 의식이 성장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타자들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에 동참할 때입니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라는 고백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고대인들은 세상에 다양한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신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통치 영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주특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출산을 돕는다든지, 비와 바람을 보내 농사가 잘 되게 한다든지, 바다를 관장한다든지, 전쟁을 주관하는 등의 역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나 종교에 등장하는 신들을 '이상화된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특정한 가능성이 최대치로 발현된 존재를 상정하고 그를 신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외화한 것이 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고대 세계는 여러 신들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다른 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속성들을 야훼 하나님께 귀속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고백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 속에는 더 심오한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라는 단어 자체가 아닙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 더 중요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전제정치 하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채 살고 있던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강자들의 편익에 복무하던 다른 종교의 신들과는 달리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약자들의 편에 서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6:5). 쉐마의 이런 요구는 압도적인 구원을 경험한 이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시늉만 하지 말고 자발적인 의지로, 자아 전체를 바쳐서,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은 의지와 관계 없이 저절로 발생하는 감정이지만, 그 사랑의 지속은 매우 의지적인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대한 기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찬송가 중 하나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 노예 운반선의 선장으로 살았던 존 뉴턴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자신의 비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기억하는 자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랑은 마주 봄입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바라봄을 통해 마치 상대의 존재 전체를 흡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마주 봄의 상태야말로 사랑 안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신비주의 시인 루미는 사랑을 가리켜 '사랑하는 대상 안에서 자기를 잃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랑은 나를 상대에게 온전히 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개입하는 순간 마주 봄의 관계는 깨지고 등 돌림이 시작됩니다. 등 돌림은 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일을 기꺼이 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한다 말하면서 제 좋을대로 행동하는 이가 있다면 그의 사랑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떨 때 기뻐하실까요?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보고 경탄할 때,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때입니다. 길가에 피어난 꽃 한 송이, 흘러가는 강물, 곱게 물드는 노을,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 자유롭게 뛰노는 짐승들, 숲을 깨우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기뻐할 때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라 할 수 있습니다. 경탄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타자에 대해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사회학자인 김홍중 교수는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원전에 의존하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10만 년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과 생명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빌려 사용하고 있는 것"(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년 11월 14일, p.36)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합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인 동시에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기꺼이 당신의 손과 발이 되려 할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억압과 착취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 아무리 몸부림쳐도 가난과 질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설 자리가 없어 서러운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는 것이 믿음의 징표입니다.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사랑은 우리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에고를 그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거기에 우리 이웃을 모시는 일이며,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굳은 지각을 깨뜨리는 것"(Harold S. Kushner,
• 말씀의 내면화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말은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내재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6:8-9).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할 때마다 성경구절을 기록한 양피지를 넣은 작은 상자인 테필린(tefillin, 經文)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마 혹은 미간에 붙이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기를 바란다는 뜻일 겁니다. 맥이 뛰는 자리인 손목에 매는 것은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다는 뜻일 겁니다. 문설주나 대문에 써 붙이는 것을 가리켜 '메주자mezuza'라 하는데, 집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에도 말씀을 따라 살라는 뜻일 겁니다. 가히 신앙인의 입춘첩이라 할만하지 않습니까?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허리춤에 늘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敬義劍'을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성성자는 소리가 나는 방울인데, 그걸 차고 다녔다는 것은 선비답게 '언제나 깨어 있자'는 일종의 다짐일 것잊니다. 경의검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새겼다고 하는데,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고 밖으로는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의라는 뜻으로 선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머니에 조그마한 십자가를 넣고 다닐 때가 있습니다. 가끔 그것을 꺼내 손에 가만히 쥐어보곤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자 '생명'입니다. 아니, 죽어야 살 수 있음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게 낫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은 철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또한 공동체의 일이니까 그런 신앙을 후세대에게 전해주는 일은 부모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6:7). 말로만 가르치면 안 됩니다. 가르침은 가리킴이어야 합니다. 손가락만의 가리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 세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가리키는 삶의 방향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나는 '바담 풍' 하면서 자식들이 '바람 풍' 하고 발음하기를 바라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버릇이 몸과 마음에 배어들면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욕망을 거스르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익혀야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생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고, 이웃의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인정의 황무지, 을씨년스런 바람이 부는 광야처럼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생명의 봄바람이 되어 시든 생명을 깨우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내면에 꽃을 피운 사람 하나가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이들에게 역사의 봄을 일깨워줍니다. 입춘가절에 우리 믿음의 나무에도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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