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18 일
(사무엘 상 1-15장)
<내용 요약>
사무엘 상은 크게 세 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사무엘, 하나님의 선지자 (1-8장)
2. 사울, 사탄의 사람(9-15장)
3. 다윗, 하나님의 사람(16-31장)
이중에서 우리는 오늘 1-15장까지 통독하겠습니다.
1-2장: 사무엘의 출생
3장: 사무엘의 소명
4-8장: 마지막 사사이며 첫 번째 선지자인 사무엘 (4장: 언약궤를 빼앗기다/ 5-6장: 돌아오는 언약궤/ 7장: 에벤에셀의 광영/ 8장: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9-10장: 사울의 출현
11-12장: 사울의 통치
13-15장: 버려진 사울
<주요 통독자료>
1. 기도의 여인 한나:
우리가 성경에서 기도 응답을 받은 인물을 이야기 할 때, 한나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나는 기도의 사람에 대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우리는 한나를 통해 응답 받는 기도의 특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나는 “은혜”라는 의미를 가진 아름다운 이름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다소 불행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한나 대신 브닌나라는 또 하나의 여인을 아내로 얻었습니다. 당시엔 여인이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그 이유만으로 이혼을 당할 수 있는 큰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엘가나는 여인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둔한 남편의 전형적인 케이스입니다. 남성들은 모든 것을 공식적으로 생각하는 문제가 있는 듯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잖아. 브닌나와 브닌나의 아들들보다 두 배로 당신에게 나누어 주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뭘 더 해줘야 해?” 사랑은 이렇게 1+1=2라는 공식적 계산이 아닌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따뜻함을 원합니다. “여보, 당신의 아픔을 이해해. 많이 힘들지? 괜찮아. 당신을 사랑해…” 이런 남성을 여인은 원하는 것입니다. 한나를 사랑한다면서 브닌나를 통해서 계속 아들을 낳는 남편을 어떻게 신뢰할 수가 있겠습니까? 엘가나가 “당신이 내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어쩌면 브닌나는 실제로 열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해마다 아들을 하나씩 낳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마음은 상처가 쌓이고 쌓여갑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올 때마다 그녀는 울며 기도합니다.
이때 대제사장이었던 엘리는 나이가 많고 눈이 어두웠습니다. 어두운 것은 그의 육신적 눈의 시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적 안목 역시 심히 어두웠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는 한나의 기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나가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술 주정을 부리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그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 목사는 바로 교인을 잃었을 것입니다. “여자여, 어느 때까지 술에 취하여 있겠느냐? 독주를 끊으라”고 단언하는 제사장 앞에 한나는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마음에 애통함이 있어 여호와께 마음을 쏟아놓은 것뿐입니다.” 엘리가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엘리는 한나를 축복했습니다. 한나는 엘리의 축복기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다시는 근심 띤 빛을 갖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사시대의 말엽에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사사기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사사 삼손의 출생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도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자들마다 총체적으로 타락해 있었던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남자, 삼손을 낳아줄 여인을 찾으신 이야기를 한나가 들었을 것입니다. 같은 시대니까요. 하지만 삼손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를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처음에 억울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들 하나만 주세요. 억울해요. 하나 아니면 반쪽이라도 주세요.” 그것이 한나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고 오래 되면 사실 하나님이 바뀌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뀌지 않으신 분이시라고 했잖아요? 바뀌는 것은 우리인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도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는 유치한 동기의 기도로 그녀의 기도가 시작되었지만 오래 계속되는 동안 그녀의 기도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아들 하나만 주세요. 이 사사시대 말엽의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아들 하나 길러보겠습니다. 삼손 같은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멋진 종을 하나님께 길러 드릴게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터치한 기도인 것입니다. 사실 남자마다 타락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던 사사시대 말엽에 이스라엘의 남자 아기 하나가 더 태어나는 것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으실 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로 바뀐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한나의 태를 여시게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기도의 주도권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한나의 어려운 환경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한나로 하여금 사무엘을 낳아줄 수 있도록 사용하신 것일테니까요. 이 시대에 부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한 명의 부자가 탄생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관심이 없으실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강한 힘을 가지고,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죄를 짓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또 한 명의 부자나, 건강한 사람이나 혹은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탄생하는 것에 하나님은 별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한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주님께 드릴 것을 우리에게 달라는 그런 기도로… 그것이 응답 받는 기도의 요건인 것입니다.
2. 사무엘의 소명
“사무엘아! 사무엘아!”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때는 구전에 의하면 그의 나이 겨우 열 두 살 때의 일입니다.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간치 못할 만큼 아직 어린 나이의 사무엘을 하나님은 부르고 계셨습니다. 삼상 3:1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던 시대 그래서 이상(Open vision), 즉 하나님과의 열린 사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대제사장 엘리도 있었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라인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고, 백성의 유사들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장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젊은 제사장들의 죄악과 완전히 짓밟힌 당시의 성전 시스템의 타락에 대해 읽습니다. 바로 이 시대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사시대의 말엽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던 시대, 가장 종교적인 민족으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는 길을 가고 있던 때에, 하나님은 누군가와 사귐을 나누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서 듣고, 그 일을 행해줄 누군가를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 열 두 살짜리 아이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현대 교회의 모습은 아닐까요? 그래도 우리 여리고 성경통독 방에 함께 하시는 지체들이 이 시대, 우리 하나님의 벗이 되어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른 새벽부터 쉬지 않고 백성들을 부르시고,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며 뭔가를 말씀하시는데 아무도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탄했습니다. 이 시대, 한국에 아무리 교인들이 많아도 진실로 성경을 펼쳐놓고 개인적인 묵상, 혹은 큐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막 구워낸 신선한 냄새를 가진 빵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들려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한 몸부림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엘의 시대는 엄청난 하나님의 징계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열 두살 짜리 아이에게 들려주시기엔 너무나 벅찬 말씀이 하나님의 가슴에 차 있었습니다. 홉니 제사장 집안의 죄악과 타락, 그리고 예비된 징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멸망에 관한 말씀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실 하나님의 친구가 그 시대에 없었던 것입니다. 대화 상대가 없어서 어린 손주를 붙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노인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불러놓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사무엘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드리는 우리… 말씀을 통해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는 진짜 크리스천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대조 속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
굉장한 가능성을 가졌으나, 그 가능성을 하나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 사람… 그것이 바로 사울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음 단원에서 나누게 될 다윗이라는 인물의 대조를 통해서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의 극명한 대조를 봅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우선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 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습니다. 키가 아주 큰 사람, 아마도 오늘날 NBA 농구 선수를 해도 될 만큼 키가 컸고, 그는 아주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단히 남자답고 멋진 사람이죠? 게다가 그는 아주 미남이었습니다. 그의 용모가 준수했다는 것은 영어 성경에서 핸섬(Hand-some)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섰다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당시 나귀는 부자들의 탈것이었습니다. 말은 군인들이 타는 것이죠, 농군들은 소를 타고 다녔습니다. 나귀는 부자들, 귀공자들의 탈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벤츠 승용차에 해당되는 그런 고급 탈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나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부자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울이야말로 오늘날 여성들의 결혼 상대 영순위 아니겠습니까? 잘생겼죠? 키 크죠? 남자답죠? 부잣집 아들이죠? 게다가 아버지의 나귀를 찾아 며칠을 헤맬 만큼 그는 효자였고, 처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질 때 보인 겸손은 그야말로 그를 엄친아로 만들만한 조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할 때에 바로 사람들의 구미를 아시므로 사람들이 딱 좋아할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울은 변합니다. 이런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그의 내면에 감추어진 온갖 탐욕과 교만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택한 것을 톡톡히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을 즐겼고, 백성들의 많은 아들 딸들을 전쟁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궁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정 국가가 된 다음부터 백성들은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속성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다윗을 세우셨다면 백성들은 절대 다윗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을 통해서 자신들의 선택의 어리석음을 확연히 깨달은 후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조상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다룬 룻이 보아스를 통해 낳은 오벳의 아들 이새의 아들로 다윗이 태어났고,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엔 인간의 선택으로 세워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방법으론 아무것도 안됩니다. 사람이 놓은 길들… 철학, 지식, 부와 권세, 심지어 종교 시스템까지… 그 어떤 길로도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생이 갈 수 있는 길은 사단의 노예가 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하나님의 선택으로 우리에게 주신 다윗, 그리고 그 라인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갈 수 있고, 왕 되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섬겨 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노예에서 사랑 받는 자녀로… 이것이 바로 사울과 다윗의 대조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사탄의 노예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의 그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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