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독

17일통독 사사기17-룻기4

천국생활 2016. 6. 19. 16:55

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17 일


(사사기 17-룻기 4)



<내용 요약>
사사기는 크게 세 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사사 시대의 서론(1-2장)
2. 사사들의 시대(3-16장)
3. 사사 시대의 결과(17-21장)
이중에서 우리는 오늘 17-21장까지 그리고 룻기를 통독하겠습니다.
1. 종교적인 타락(17-18장)
2. 도덕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19장)
3. 정치적, 국가적 타락(20-21장)

룻기의 내용
1장: 모압에서
2장: 회복의 일터, 보아스의 밭에서
3장: 당신의 날개로 나를 덮으소서
4장: 결혼

<주요 통독자료>
1. 사사기의 마지막 다섯 장은 “왕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저마다 자기 멋대로 행하면 그게 곧 법이었던 시대”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그야말로 총체적 타락의 국면을 보이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타락의 시작은 먼저 “종교적 타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그들은 저마다 우상들을 몇 개씩은 갖고 있었습니다.

열 두 지파의 땅에 골고루 퍼져있는 48개의 성읍들을 얻은 레위지파는 따로 기업이 될 수 있는 땅을 분배 받지 못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로 생활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엉망이 되어버린 하나님께 대한 사고를 가진 그들이 십일조 생활을 했을 리 없고,

그래서 레위지파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정 제사장의 자리를 얻으려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성직을 얻고자 합니다.

 17장에 나오는 미가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를 정말 놀라게 합니다. 어머니의 은을 훔쳤다가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의 말에 찔림을 받아 은을 내놓습니다. 어머니는 일정한 훈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미가를 축복하면서 훔쳤던 은을 미가에게 도로 주어,

그것으로 부어 우상을 만들게 합니다. 그래서 미가는 그 우상을 자기 집에 두고, 자기 아들 가운데 하나를 지목하여 우상숭배를 주도할 제사장을 삼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때마침 먹고 살 길을 찾아 떠돌던 레위지파 소년 하나를 만나서 미가는 그를 자기 집안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이 레위지파 소년은 미가가 하는 우상숭배의 행위에 대해 바른 소리 한 마디 못하고 쫓겨날까 전전긍긍, 미가의 비위나 맞춰주는 그런 제사장이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비위를 거슬릴 까봐 바른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비극 아니겠습니까?

2. 18장을 보면, 이 때, 단 지파는 자기들에게 분배된 기업의 땅을 여태 차지하지 못한 채 거주할 땅을 얻으려고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신앙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결국 훗날 이 단 지파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어떻든 이리 저리 방황하던 단 지파의 첨병들이 마침 에브라임을 지나다가 미가의 집에서 머뭅니다. 그들은 그 집에서 제사장 노릇하던 레위지파 사람에게 자기들의 갈 길을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것인지 묻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도 순종도 없고 다만 제사장에게 점을 치는 것처럼 운세를 점치는 광경입니다. 레위지파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덕담을 해 주었고, 그들은 정탐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하러 가는 길에 이 정탐꾼들은 군인들을 미가의 집으로 데려가서 미가의 집에 있는 각종 부어 만든 우상과 드라빔, 그리고 에봇을 훔치고, 레위 지파의 제사장까지 빼앗아 달아납니다. “왜 이러느냐?”고 묻는 미가에게 단지파 사람들은 “네가 한 사람의 제사장 노릇 하는 게 좋으냐, 아니면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게 좋으냐”곧 묻자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이것이 성직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들이 한참 갔을 때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미가가 에브라임 사람들을 데리고 쫓아옵니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 미가에게 단 지파 사람들은 힘으로 위협을 합니다. 살고 싶으면 입을 다물라고… 순 깡패 아닙니까? 이들은 모두 이런 짓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더 큰 교회의 목사가 되기 위하여 작은 양을 버리고 떠나는 목사, 힘으로 남의 교회 것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 뭔가 오늘의 교회의 양상과 흡사한 것이 아닌가 눈물이 글썽거려집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세상 사람들 누구도 닮고 싶은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 이것이 바로 왕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면 그게 곧 법이 되었던 사회의 모습입니다.

3. 이들의 종교적 타락은 곧장 가정의 붕괴로 다가옵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레위 사람이 바람을 피워 저 남쪽 베들레헴에서 첩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첩도 또한 음란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가 친정 집에 돌아가 있습니다. 넉 달 동안을 첩을 찾지 않다가 갑자기 첩을 찾아간 이 사람, 나흘 동안 첩 장인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첩을 데리고 돌아갑니다. 여부스쯤 이를 때에 해가 떨어지자 여부스 땅은 이방인의 땅이라고 안 들어가고 그 맞은 편 베냐민 지파에게 속한 기브아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 중 누구도 이 나그네들을 영접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밤늦도록 방황하다가 성읍으로 들어오는 노인 하나를 만났는데 마침 그가 에브라임 산지 구석 출신, 즉 동향 사람이었습니다. 그 노인이 이들을 영접하여 한참 먹고 마시고 하려는 데 동네의 비류들이 문을 두드립니다. 이 집에 들어온 자를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관계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이 도시에 동성연애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 첩을 끌어내어 이 패거리들에게 던져줍니다. 이들은 밤새 이 여인을 윤간하고 폭행했습니다. 이게 사람들의 사회입니까? 그래도 그녀는 자기 남편이 잠든 집까지 기어와서 그 문고리를 잡고 쓰러져버렸습니다. 아직 그녀가 죽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는 관심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의 안장을 들고 문을 열다가 문 앞에 쓰러진 자신의 첩을 봅니다. 참으로 무심하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합니다. 법의학적 측면에서 피해자의 사망 추정시간이 매우 중요한데, 제 생각에는 이 순간 너무 기가 막혀서 그녀가 죽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녀의 시체를 싣고 집에까지 와서는 그녀의 시체를 열 두 토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두목들에게로 보냅니다. 이것이 19장의 내용입니다.

4. 마지막 20장과 21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 두 지파가 모였는데, 당연히 문제의 핵심인 베냐민 지파는 빠졌습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모여서 회개하고 울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서로 생각해 보고 상의하자고 모인 이들의 결정은 베냐민 지파 하나를 지상에서 완전히 멸절시키자는 결정입니다. 결국 40만 군대와 26,700명의 군사가 각각 동원된 말도 안 되는 동족간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의 장정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그러자 뒤늦게 이 일을 후회하고 명절에 모여 춤추며 놀 때에 베냐민의 남자들이 다른 지파의 처녀들을 보쌈을 해다가 종족을 이어가게 하는 웃지 못할 일을 꾸미고 맙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마치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계속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이들이 왕 되신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자꾸 비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사 시대가 끝나면서 마지막 사사이며 또한 선지자들의 머리가 될 사무엘이 출생하고

그에 의하여 이스라엘에 이방인들처럼 왕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웠던 “신정통치” 시대가 가고

 “왕정통치” 시대로 전환되는 비극이 이렇게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비극입니다.

<이 단원의 그리스도>
1. 사사시대의 마지막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어디를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부록과도 같은 룻기를 펼치면서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아직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인애가 크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룻기는 제멋 대로 살던 사람들의 사사시대의 전형적인 이스라엘 집안인 엘리멜렉 일가의 모압 이민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던 시대에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 일가는 문제의 해답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던 전형적인 당시의 이스라엘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돈이 좀 있었고, 얼른 그것을 정리해서 모압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모압이 어떤 곳입니까?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근친상간의 무서운 죄로 시작된 족속들입니다.

그런데다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자기 경내로 지나가게 허락해 주지 않아서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모압과 암몬은 10대 뿐 아니라,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나의 즐거움, 나의 기쁨”이란 뜻입니다.

이름은 근사하지만, 삶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맘대로 모압으로 이민을 가버린 것입니다.

2. 모압 땅에 이민 간 뒤 얼마 후에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나오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얍 여인들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삼아 결혼을 시킵니다. 그렇게 얼마나 살다가 두 아들이 다 죽습니다. 이 집엔 이제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이 슬피우는 장례식이 룻기의 시작입니다.

그러다가 모압으로 내려간 지 10년 즈음에 하나님께서 다시 베들레헴에 풍년을 주셨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얼마나 후회가 되었겠습니까? “그냥 거기 있을걸…” 했겠죠? 그래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두 며느리를 데리고 한 참 국경을 향하여 가다 보니 나오미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어려운 때에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세 남자들이 다 죽고 히브리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이방인, 그것도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규정된 모압 며느리 둘을 데리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 자신이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모압에 떼어놓고 가려는 작전을 쓴 것입니다. 다행히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룻은 절대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고백이 멋집니다.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할 것이요. 어머니 죽어 장사지내는 곳에 나도 장사될 것입니다.”

워런 위어스비는 여기까지만 보면 룻의 이야기는 이스라엘판 효녀심청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의 이 이야기를 주목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시리이다.”

형편없이 맘대로 살던 타락한 히브리인 가정 하나가 모압 땅에 내려오는 바람에 구원의 여망이 없이 모압 여인으로 태어난

 이 가련한 여인에게 영원히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녀는 이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 이것은 마치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의 타락이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었다는

감람나무의 접붙임의 비유를 통해 말한 바울의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온 룻은 어머니께 가서 자신을 밭에 나가 이삭이라도 주워 오라고 명령해 달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예쁩니까? 자신의 아이디어지만 어머니의 명령에 움직인 것이 되게 하는 지혜… 그렇게 이삭을 주우러 밭에 나간 룻의 발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근족으로 엘리멜렉 일가의 친족 구원(레위기와 민수기에서 이 율법을 읽은 기억이 있으시죠?)을 해 줄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한 눈에 룻을 향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룻기 2장에서 보아스는 룻에게 인간적인 모든 애정을 쏟아줍니다. 보호해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말로 위로해 주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고, 한 자리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만족을 주었습니다. 룻이 엄청난 곡식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나오미는 처음으로 룻을 보살펴준 이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축복을 말합니다. 이때까지, “전능자가 나를 치셨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나로 풍요롭게 나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등등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입술에 드디어 감사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잊고 있었던 “친족구원”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들어가라고 아이디어를 줍니다. 처음으로 진정한 시어머니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4. 룻이 타작 마당의 노적가리 곁에서 잠든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그 발 아래로 들어가서 누웠습니다.

보아스가 잠결에 깨어나 자기 이불 밑에 왠 여인이 있는 것을 보고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때 룻의 대답이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당신은 나의 기업을 무를 자(친족 구원자)가 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옷자락”은 히브리 말로 <카나프>입니다. 이는 “날개”로도 번역됩니다. 우리 어른들 말이 딱 맞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사실 이 말은 룻기 2장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해 준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여호와께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은 그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내게 있어서 여호와의 은총의 날개는 바로 당신의 품입니다.”

결국 보아스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근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토지무르기를 하겠다고 하면 이야기는 다 끝납니다. 그러나 그가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차례는 보아스입니다.


여기에서 보아스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팔아 넘긴 우리 인류를 다시 구속하기 위하여

우리의 친족이 되시려고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날개”에 비유하는 이유는 지성소의 그룹천사들의 날개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고, 죄를 사하시며, 기도를 들어 주시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날개 아래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5. 룻이 “당신의 날개로 나를 덮으소서”라고 요청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 나를 덮어 주시옵소서”라고 요청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탄이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의 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거짓 목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도적질 하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라 했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은 처음엔 자기 비즈니스에 이득을 얻을 까 하여 욕심이 나서 토지무르기를 하겠다 했지만, 엘리멜렉 일가에 아이를 낳지 못한 룻이 남겨졌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가 룻과 결혼하여 낳은 자녀에게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업을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바보 같은 짓으로 생각하여 신을 벗기우고 침 뱉음을 당한 자라는 수치스런 이름을 얻더라도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여 보아스에게 차례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아 결혼을 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룻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구원 밖에 있는 모압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이 땅에 보아스라는 분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실패한 히브리인 일가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아주 조금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룻기 2장에 들어오면서 룻은 보아스를 단순히 자신에게 인간적 애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먹여주고, 보호해 주고, 위로해 주고, 교제해 주고, 격려해 주는… 그러나 3장에서 룻은 그가 자신의 신분을 영원히 이스라엘 여자, 즉 구원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해 줄 수 있는 친족 구원자라는 것을 알고 그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서 그녀는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 아들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이 이새를 낳았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메시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6.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들의 신분의 변화를 정확히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 없이 죄인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우리에게 들어온 복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 우리는 예수님을 인간적 애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물질의 복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그러나 말씀을 더 깊이 공부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다 줄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 그늘 밑에 날 덮어달라고 간구하면서…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룻기를 구속의 로망스라고 부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왕 되신 하나님을 버린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사사기의 부록과 같은 이 사사시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신분을 영원히 바꾸어 주시는 구속의 로망스를 보여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밑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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