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14 일
(여호수아 1-12장)
<내용 요약>
여호수아서는 크게 세 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땅의 정복(1-12장)
2. 땅의 분배(13-22장)
3. 여호수아의 고별설교(23-24장)
이중에서 우리는 오늘 1-12장까지를 통독하겠습니다.
1장: 여호수아의 사명
2장: 여리고 정탐과 기생 라합
3장: 요단강을 건넘
4장: 두 개의 기념비
5장: 승리의 조건
6-8장: 가나안 중부(여리고와 아이성) 정복
9-10장: 가나안 남부(기브온과의 조약;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정복
11장: 가나안 북부 정복
12장: 정복 당한 왕들의 리스트
<주요 통독자료>
1. 여호수아서는 “정복의 책(the Book of Conquest)”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는 죄의 시작을, 출애굽기는 죄로부터의 구속을, 레위기는 구속 받은 신자의 예배생활을, 민수기는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그리고 신명기는 삶의 핵심은 사랑과 순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이러한 달콤한 사귐이 있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현을 우리의 삶에서 보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들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가나안이 천국을 보여주는 그림은 아닙니다. 가나안에서 여호수아가 남긴 실패의 그림자도 있습니다. 아직도 완전한 순종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불행의 씨앗을 남겨두었고, 그 씨앗이 자라 종내 이스라엘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을 상징한다면 가나안에서는 더 이상 그런 실패나 좌절, 눈물과 아픔, 그런 게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승리의 비결을 아주 단순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집중하고, 내게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길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가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함께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승리의 원칙입니다. 말씀 위에 섭시다. 치우치지 맙시다.
2. 우리는 2장에 나오는 정탐꾼들에게 했던 기생 라합의 고백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지 약 1년 반만에 가나안 남부 국경 지대인 가데스바네아에 당도했고, 하나님의 명령은 거기서 바로 “올라가서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없었고, 정탐꾼들을 뽑아 정탐을 시켜 보자는 제안을 했고, 결국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 결과 광야에 나올 때 20세 이상이었던 성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한 채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1년 반 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약속의 땅을 그 후로 38년 반을 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모두 죽고 그 뒤에 새로 태어난 세대들만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고백합니다. 이미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널 때부터 가나안 종족들은 무서워 떨고 있었고, 심지어 사람들이 정신이 나갔다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홍해의 사건, 아말렉과의 싸움, 반석의 생수, 만나와 메추라기…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함께 하심의 축복을 그들은 다 듣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무서워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38년 반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올라오기만 했다면 그 땅을 그냥 넘겨받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런 그림을 연상해 보십시오. 여리고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성벽 안쪽의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서워 떨고 있고, 성벽 바깥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종족들의 덩치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양쪽에서 서로를 보며 같이 떨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치우치지 않고 준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니까요.
3. 우리가 정복해야 할 세 가지 대적: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에서 중부 지방을 공략할 때 만나야 했던 세 종족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싸워야 할 대적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첫째로 여리고는 환경적인 대적, 즉 “세상”의 상징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성벽, 강력해 보이는 아낙 자손들… 그러나 그 성의 공략은 의외로 쉬웠습니다. 너무 어렵다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며 성벽을 돌았고, 약속대로 무너져버렸습니다. 환경적인 대적, 세상은 엄청난 위용으로 신자들을 압박하지만 의외로 쉽습니다. 말씀에 순종만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아이성은 육체의 상징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싸워야 할 두 번째 원수가 바로 우리 육체입니다. 우리 자신의 육적 속성은 아주 정복하기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손바닥만한 아이 성과의 싸움은 사연이 많았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하나님께 묻는 대신 정탐꾼들의 말을 믿고 움직였습니다. 기도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실패로 코가 깨진 후에야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3,000명만 올려보내는 교만을 행했습니다. 이런 모든 요인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패인은 그들 내부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간의 문제였습니다. 그 죄를 도려낸 후에야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고 승리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대적보다 내부에 숨은 우리 자아가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기븐온 족속입니다. 그는 마귀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간교하게 여호수아를 속여서 자신들은 여호수아의 싸움의 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항복하고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덜컥 그들과 평화조약을 맺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이 바로 다음 자신들의 공격 대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일들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 “세상과 육체와 마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단원의 그리스도>
1. 여호수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입구인 요단 건너편 모압 평야까지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모세의 역할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여기엔 사실 하나님의 의도 또한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지도자로서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율법의 의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 이런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버전으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헬라어 버전으로 바꾸면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순종과 승리의 삶으로 인도해 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여호수아의 이름은 <호세아(구원이라는 뜻)>였는데, 모세가 그를 시종으로 삼으면서 그의 이름 앞에 여호와를 의미하는 <여>를 붙여 주어서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서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고 그녀를 가만히 헤어지고자 했던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가 “그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으며,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이 선포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2. 기생 라합의 구원과 복음: 기생 라합의 구원은 우리에게 복음의 중요한 요소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에 살았습니다. 여리고는 죄악 가운데 있었고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여리고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망이 기정사실화 된 죄인의 전형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그 죄악된 땅에서도 죄를 생활 수단으로 삼고 있었던 기생(히브리어; 이샤자나-음행하는 여자, 음행을 직업으로 가진 여자, 창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여호수아에 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죄악 된 땅에서 죄인으로 살던 우리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들려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라합은 이 복음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그들과 약조를 합니다. 정탐꾼들은 그녀에게 붉은 줄을 주어 창 밖에 매달라고 했고, 그녀의 집안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붉은 줄이 드리워진 집에 있는 한 그들은 모두 안전하게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붉은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십자가 밑에, 즉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제 곧 진격해 올 여호수아의 군대는 이 땅에 곧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더 이상 십자가를 지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즉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책임을 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여리고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순간, 라합의 집이 있었던 그 부분만 뾰족하게 솟아있는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방주가 물위에 떠오를 때, 세상은 물속에 침몰했습니다. 함께 잠을 자던 사람들이, 함께 맷돌을 갈던 사람들이, 함께 들판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둘로 갈리어질 것입니다.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고… 라합의 스토리는 구원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여호수아, 곧 예수님이 계십니다.
3.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 : 우리는 여호수아 5장 13절에서 여호수아를 방문한 한 사람을 봅니다. 엄청난 대적과의 전쟁을 앞두고 긴장에 빠져 있던 여호수아는 갑자기 칼을 허리에 차고 자기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본 것입니다. 그는 당장 자신의 편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 군인이었다면 여호수아를 몰라볼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여호수아가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이편이냐 저편이냐?” 그런데 이 사람의 대답이 엉뚱합니다. “아니라.” 아니 이 질문이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소위 “Yes or No Question”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편이냐 저편이냐”고 묻는 데, “아니라(No)”라는 대답이 왠말입니까? 분명합니다. 그분은 여러 차례 구약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 보이셨던 “화육하기 이전의 그리스도(the Pre-incarnated Christ)”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편도 저 편도 아니십니다. 그냥 하나님의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Captain of the Lord’s Host)”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군대의 대장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을 단순하게 정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대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적이 여리고든, 무엇이든… 아무리 힘들어 보이는 대적이라 할찌라도 예수께서 우리의 대장이 되시는 한 우리의 전쟁은 절대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여리고 작전입니다. 그를 따르는 군대의 특징 중 하나가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침묵 속에서 다만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