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12 일
(신명기 1-17장)
<내용 요약>
신명기는 크게 네 단원으로 나누입니다.
1. 광야여행을 뒤돌아봄(1-4장)
2. 율법의 재해석-사랑과 순종(5-26장)
3. 약속의 땅에서의 미래-축복이냐 저주냐(27-30장)
4. 모세의 최후(31-34장)
이중에서 우리는 오늘 1-17장까지를 통독하겠습니다.
<주요 통독자료> 조금 더 디테일을 원하시는 분들은 계속하십시오.
1. 신명기의 개요 :
우리는 창세기에서 죄의 시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그 죄로부터의 구속을 배웠습니다. 레위기는 구속 받은 신자의 예배생활을, 그리고 민수기는 진정한 예배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따르는 것이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명기는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전형적 특징이 되는 것이 “사랑과 순종”임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신명기의 제목은 한문으로 펼칠 신(申)자를 써서 申命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재해석 해 준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신명기를 Deuteronomy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70인역 헬라어 성경의 헬라어 제목인 <듀테로노미온>을 음역한 것입니다. 헬라어의 <듀테로>는 “두 번째”라는 뜻이며, <노미온>은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첫 번째 율법은 출애굽기에서 선포되었던 십계명을 비롯한 광야 1세대들에게 선포된 율법을 말합니다.
왜 두 번째 율법이 필요했을까요? 율법의 내용이 바뀐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의 문제에 대해 재해석을 해 주신 것이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시면 광야 생활의 첫 세대는 갑자기 그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무척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백주에 빽빽한 구름으로 캄캄함이 그들을 뒤덮은 가운데 우레가 나면서 나팔소리 같은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으니까요. 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들은 율법의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맹세를 한 것입니다.
모든 원시종교들과 헬라 신화들에 기초한 세상의 우상들을 숭배하는 제례행위들의 기초가 바로 이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그들은 신에 대하여 인간보다 초월한 능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인간과 갈등의 관계를 조성하며,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행위는 언제나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하여,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가련한 종교행위들이었습니다. 광야 생활 첫 세대도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도 자꾸 당하다 보면 소위 간이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한 번, 두 번... 어기면서 매를 맞고 징계를 당하다 보면 거기에 이력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과 이런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비극은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형성해 간다는 것입니다. 원시종교나 우상숭배의 종교들처럼 기독교가 기복적이고 세상의 영광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변질되면서 오직 축복이 신앙의 목적인 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위를 거슬리면 저주를 받을까 두렵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매를 맞을까 두려운 그런 공포심이 동기가 되어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 안에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때에 그런 간증들을 들어왔습니까? 하나님께 순종치 않아서 하나님께 매를 맞았다든지, 꿈에 천국에 가는데 새벽 기도를 빠진 횟수만큼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유실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지… 마치 땅 투기만큼이나 지나치게 무리하여 드린 헌금으로 대박이 터졌다든지… 물론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방법이 케이스마다 다르므로 더러 하나님의 특별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복을 주신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런 기복적 탐심과 수틀리면 저주를 받을까 두려운 공포심이 동기가 되어서 하는 신앙생활은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제게 기독교 신앙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 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사랑으로 하는 일이 진짜입니다. 라헬이 너무 좋아서 7년을 엄청나게 어려운 근무조건에서 노동을 하면서 몇 일 밖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꼈던 야곱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그런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더욱 알기 위하여 말씀을 공부하고, 그분이 소원하시는 것을 내 삶에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능력으로 지성이 변하고, 삶이 변하여 날마다 예수님을 더욱 닮아 가는 것… 물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 허락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건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들이 절대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상쇄시킬 수 없는 그런 사랑, 지독한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프랜시스 챈, 목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런 의미에서 “미친 사랑(Crazy Love)”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그들의 신분상의 특권이나 물질이나 모든 자랑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도 바로 같은 맥락의 “미친 사랑(Crazy Love)”인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압 평야에서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광야생활의 1.5세들과 2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미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들이 1세대처럼 실패하는 신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가져야 할 신앙관은 바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핵심이 되는 구절을 이야기 하라면 바로 신명기 6:4 이하의 말씀을 꼽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구절을 <쉐마(the Great Shema)>라고 부릅니다. 히브리 문학의 특성은 어떤 문장이나 책의 첫 번째 단어를 가지고 제목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 <신명기 6:4>의 히브리어 성경의 첫 단어가 바로 <쉐마>입니다. 이는 “들으라(Hear)”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도 가장 크고 첫 때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바로 이 구절을 짚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율법의 노른자위입니다. 이 구절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1세대처럼 하나님과 기복적 관계만 형성하고 사랑이 없는 건조한 종교인들이 아니라, 순종치 않으면 매를 맞으리라는 공포심이 모든 일의 동기가 되는 그런 종교인들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 생명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1세대처럼 하나님과 기복적 관계만 형성하고 사랑이 없는 건조한 종교인들이 아니라, 순종치 않으면 매를 맞으리라는 공포심이 모든 일의 동기가 되는 그런 종교인들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 생명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단원에 나타난 그리스도
<신명기 8장>에서 완전히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귀 뚫린 종에 관한 규례를 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같은 유대인들끼리는 다른 사람을 종으로 삼지 못하도록 규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전쟁포로로 잡혀온 종들도 있고, 빚을 졌는데 그 빚을 갚은 능력이 없으면 자신의 노동력으로라도 빚을 갚을 기회를 얻기 위하여 종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은 6년간 종사했으면 7년째는 안식년이므로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년간의 종살이 가운데, 주인과 너무나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놓여난다 하더라도 이 주인 밑에서 종살이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자신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좋은 주인이 같은 여종을 아내로 주어 결혼까지 시켜 주었고, 그래서 그 여종과의 사이에서 자녀까지 낳은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종이 안식년을 맞으면 이 종은 풀려날 수 있지만, 아내와 자녀들은 여전히 주인에게 예속된 재산이므로 그들은 두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이 종이 주인을 찾아가 “나는 자유를 얻지 않겠습니다. 나는 영원히 놓여나는 일을 포기한, 영원히 팔려간 종(a Bond Slave)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이 사람을 문설주로 데려가서 기둥에 귀를 대고 대못으로 구멍을 내어 거기에 주인의 이니셜이 담긴 귀고리를 걸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팔려버린 종의 표식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이 영원히 종이 되신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자기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우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죠.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 영원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몸에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못자국과 창자욱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을 어떤 질병이나 육체적 결함을 가지고 살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면 그가 천국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완전하게 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죠. 하지만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영원한 상처를 입은 종이 되신 것입니다.
어떤 광고 카피가 생각납니다. “이러니 반하나 안 반하나…!”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