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독

9일민수기

천국생활 2016. 6. 16. 07:37

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9 일

 

 


(민수기 01-12장)

<내용 요약>
1-8장 : 광야 행진의 준비
1. 첫번째 인구조사(1장), 2. 광야 행진에 있어서의 열 두 지파의 기준과 위치들(2장), 3. 레위 지파의 인구조사와 행진에 있어서의 위치(3장), 4. 성막에서의 레위지파 사람들의 섬김(4장). 5. 캠프의 정결을 위하여, 의처증에 대한 판결(5장) 6. 나실인의 규례(6장), 7. 감독된 자들이 드린 헌물(7장), 8. 등잔을 놓는 방식과 레위인들을 하나님께 바침(8장)

9-10장 : 행진 앞으로…!!!
1. 유월절과 구름이 회막에 덮임(9장), 2. 행진의 명령(10장)

11-12장 :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1. 다베라 사건(백성들의 원망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다) (11장)
2. 미리암과 아론의 질투; 미리암에게 임한 심판(12장)

<주요 통독자료> 조금 더 디테일을 원하시는 분들은 계속하십시오.
1. 우리는 창세기가 “죄의 시작”을, 출애굽기가 “그 죄로부터의 구속을”, 레위기가 “구속 받은 신자들의 예배의 삶을” 보여주는 책들임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민수기는 어떤 책일까요? 민수기는 바로 “생활의 책”입니다. 진정한 예배자에게는 생활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수기에서 두 차례에 걸친 인구조사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백성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의미의 “民數記(Numbers)”인 것입니다. 이 책 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후에 출발하여 가데스바네아를 거쳐서 다시 신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간들을 보내고, 드디어 모압 평야에서 요단 강만 건너면 여리고를 향하여 갈 수 있는 바로 그 상황까지 광야의 여행을 보게 됩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캠프에 부어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관한 말씀을, 그리고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에 관한 두 번의 사건들을, 그리고 다베라 사건, 아론의 제사장직에 도전했던 고라 일당의 죽음, 불뱀과 놋뱀의 사건, 그리고 모압평야에서의 발람의 사건 등을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여행은 끊임없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신앙, 그리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들, 그 안에서 아주 느리게 한 걸음씩 성장해 가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예배 생활은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 사랑과 희생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날마다 더 순결해져 가는 삶… 그러는 와중에 1장에 나온 첫 번째와 26장에 나오는 두 번째 인구조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는 일에 실패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명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권능과 우리를 향한 사랑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 책이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2. 6장에 나오는 “나실인의 규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이 헌신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나실인이란 히브리어의 <나지르>라는 단어의 음역으로서 이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어떤 특정한 사역을 위해서, 혹은 일평생 성전에서 종사하는 일을 위해서 어떤 사람을 구별하셔서 나실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때로는 일정 기간 동안만 나실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일생 전부를 나실인으로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나실인들에게는 세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첫번째는 머리를 밀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1:14에서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럽게 되는 것”이라는 유대인 남자들의 보편적 사고에 대해 말했습니다.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은 수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남자들도 머리를 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마는 적어도 성경에서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나실인들에게 긴 머리를 자르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나와 함께 수치를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우리는 때로 수치를 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 나실인은 포도주를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나실인의 삶의 즐거움은 언제나 육신적인 것에서 취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술을 먹는 것이 성경에 위배되느냐”하는 문제로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라는 문제로 바뀌어야 합니다. 당신은 육체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삽니까? 아니면 영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삽니까? 이 질문이 맞습니다. 영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산다면 술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술이 아닌 성령의 충만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3. 나실인에게 금지된 세 번째 것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짐승이나 타인의 시체만 아니라, 심지어 그 부모나 사랑하는 이의 시체라도 만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나실인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명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인물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 의미에서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나실인의 규례에서 바울의 이야기를 좀 해 보죠. 바울은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서 동역자들과 함께 금식하며 예배하던 중에 성령께서 바나바와 함께 그가 시키실 일을 위하여 따로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바울은 나실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읽어나가다 보면 2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는 모습을 보실 것입니다. 이 말은 그가 선교 사역을 위해 헌신된 기간 중에는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 헌신한 나실인의 서약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계속 에베소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계속 막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소원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머리를 깎은 후, 에베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바울도 고집불통이죠? ^^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

<이 단원의 그리스도>
우리는 민수기 2:3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자리를 잡을 때에 동편 해 돋는 곳에 자리를 잡을 세 지파를 봅니다. 이 세 지파의 대표는 유다지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다지파의 깃발 아래 진을 쳤습니다. 유다지파의 양 옆으로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성막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성막의 모든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편에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 뿐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막의 동편을 향한 문 바로 앞에 유다 지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에서 오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주요 통독자료 추가>
4. 아무래도 그냥 나가려니 서운해서 이것 하나 더 말씀 드릴게요. 여러분이 몹시 궁금해 하시는 사안이기도 할 것입니다. 바로 12장에 나오는 미리암의 문둥병 저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어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은 어떤 면에서나 잘못한 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가 미디안에서 얻은 아내를 두고, 또 아내를 얻었다는 것, 그것도 타 인종에 대하여 상당히 배타적 성향을 지닌 유대인들의 지도자로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얻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도 지탄의 대상이 될만한 일인 것입니다. 게다가 모세에게 아론이나 미리암이 누굽니까? 아론은 모세의 둘도 없는 조력자였고, 미리암 역시도 성경은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론이나 미리암이나 모세의 잘못에 대해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주의 종의 잘못에 대해 지적을 하는 것은 저주를 초래한다는 뜻으로 해석을 해선 안됩니다. 주의 종들도 명백히 실수 할 수 있고, 실수가 있을 때에 따듯한 사랑으로 조언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론과 미리암과 같은 동역자의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렇겠죠. 문제는 12:2에서 보인 이들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 이 말씀은 모세의 실수를 지적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기화로 해서 지도자로 세움 받은 모세의 그 직분, 즉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도전을 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주의 종이 무슨 시한폭탄도 아니고, 잘못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신적 존재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동역자와 친구로서 주의 종들의 잘못에 대하여 중보하고 사랑으로 조언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약점을 잡아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름 부으심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성경통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일민수기  (0) 2016.06.16
10일민수기  (0) 2016.06.16
8일레위기  (0) 2016.06.16
7일레위기  (0) 2016.06.16
6일출애굽기  (0) 201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