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6 일
(출애굽기 31-40장)
<내용 요약>
31장 : 성막을 일꾼들, 이스라엘의 표징인 안식일
32-35장 : 금송아지, 깨어진 율법, 모세의 중보, 두 번째 십계명 돌판
36-39장 : 성막의 건축
40장 : 성막의 봉헌과 쉬카이나 글로리 – 출애굽기는 노예들의 아우성으로 시작했으나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의 이야기로 마침(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삶의 변화와 성숙의 결과)
<주요 통독자료> 조금 더 디테일을 원하시는 분들은 계속하십시오.
1.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제도를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제도가 사람에 의하여 연구 개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총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곳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래서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성막의 모든 요소들이 하나님의 디자인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도 하나님의 디자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막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특별히 오홀리압과 브살렐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모든 일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그 일을 하도록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바로 찾기 위해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2. 오늘날 교회가 가진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예배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능력을 받고 은혜를 받으러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예배를 통한 사귐의 시간은 우리에게 그런 축복들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을 뵙고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배는 우리가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고, 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빈 손으로 내게 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축복은 사실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터전에서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배운 지식과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살아가는 믿음,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진 은사와 나타나심의 경험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업자, 하나님과 동거하는 가정… 그런 삶의 현장에서 얻은 축복의 산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경배를 올려 드리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에 나올 때 무엇을 받으러 나온다는 생각을 하니까 자신이 예배의 중심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성가대도 자신을 위해 공연을 하는 가수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대표기도를 하시는 장로님들도, 설교를 하는 목사님도 전부 자기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라 생각하니까 앉아서 점수를 매기고 비평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께 드리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3. 32장에서 우리는 모세의 중보기도를 봅니다. 이 장면은 신기한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화가 나셔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며, “아~! 말리지 마! 내가 저 인간들을 정말…” 하시며 이스라엘을 치려 하시는데, 모세가 도리어 하나님께 “하나님,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참으세요…”라고 말리는 것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중보기도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He repented: 그가 후회하셨다 혹은 뉘우치셨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며, 뜻을 정하시면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한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밖에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 속에 중보할 마음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본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 것이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로 심판 받아 마땅한 백성들을 위하여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시라”는 무서운 말씀까지 하면서 백성들을 위해 중보할 마음을 모세의 마음 속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중보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시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단원의 그리스도>
1. 성막 문 : 성막에 문이 하나 뿐이었던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을 보여줍니다(요 14:6; 행 4:12). 또한 성막 문은 동편을 향하고 있었으며 바로 그 앞에 유다 지파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에서 오신 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번제단 : 놋이라는 금속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번제단에 쏟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인류에게 쏟아질 모든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진 것입니다.
3. 물두멍 : 제사장들이 짐승을 도살하며 더려워진 손과 발을 이곳에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물두멍은 여성들의 거울을 녹여서 만들었습니다. 거울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성결케 함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우리를 성결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4. 성소는 지상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나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소 안에는 세 가지 가구가 있었는데, 이는 지상 교회의 세 가지 생활을 보여줍니다. 왼편에 순금 등대가 있었습니다. 지상교회에서의 성도의 삶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홀리압과 브살렐에게 특별히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은 이 등대가 등대 자체를 빛나게 디자인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옛 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 했지만 이 등대는 등대 자체를 빛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충만함을 받은 신자의 특징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냅니다. 정면 휘장 앞에는 금으로 만든 향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상교회에서의 신자의 기도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른 편에는 떡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만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떡상에는 아침마다 신선한 떡이 진설되어야 했습니다.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교제는 아침마다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5.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카펫을 직조하는 방식으로 직조 되어진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들을 수놓은 커튼입니다. 이 두께가 어른 손으로 한 뼘이나 되어서 절대로 사람의 손으로는 찢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바로 이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아래에서 위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을 찢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체로 이 휘장을 열으사,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대 제사장으로 먼저 들어가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6. 휘장 뒤편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상 교회를 의미합니다. 언약궤 속에 있었던 만나는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님을,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십계명의 두 돌판은 우리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언약궤를 들여다 보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우리가 그대로 노출되면 우리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은좌, 즉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로 일컬어지는 뚜껑을 해 덮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뚜껑 위에는 두 그룹 천사들이 날개를 맞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상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을 그룹들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일을 주님의 날개로 덮어주시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 날개 그늘은 바로 십자가 아래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는 다 걸려지고, 오직 은총만 우리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잠시만요, 여리고 지체들 <주 날개 밑> 찬송 한 장 하고 가실게요~~!!!” ㅎㅎ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이 찬양도 참 좋죠? – 오늘은 여기 까지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