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2 일
(창세기 12-31장)
<내용>
오늘 우리가 통독하는 부분은 창세기의 후반부(12-50장)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이 단원에서 성경은 아브라함(12-23장), 이삭(24-27장), 그리고 야곱(28-31장)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에서부터 그 아들 이삭의 출생, 그리고 야곱의 탄생과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떠나는 장면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전반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끈질긴 죄의 시작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이 죄의 문제는 심판을 가지고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홍수 후에도 타락한 인생의 죄의 씨앗이 다시 싹이 텄으니까요. 그래서 죄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은 바로 구속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계획을 위하여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혈통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함 일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위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집요하신 추적과 사랑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영웅이 되어갑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많은 실수와 허물을 가진 우리들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서 믿음의 영웅이 되어가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13장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선택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는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후에 롯은 애굽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삼촌과 헤어질 때 주저 없이 애굽과 가장 유사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롯은 처음에 소돔을 향하여 장막을 쳤고, 점점 소돔을 향하여 가다가 마침내 소돔에 들어갔고 그 다음 소돔성의 성문에 앉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그 도시의 터줏대감들, 혹은 백성의 장로들이 앉아서 재판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롯은 마침내 이 죄악 된 도시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극이죠? 그래서 우리는 죄악 된 것을 보지도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단원에 나타난 그리스도>
1. 창세기 14장에서 우리는 조카 롯을 구출하러 사병 318명을 거느리고 가나안 남북 전쟁에 뛰어드는 아브라함을 봅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를 맞으러 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바로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어쩌면 그가 진짜 그리스도의 현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5-7장에서 이 멜기세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멜기세덱의 이름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해석했습니다. <멜렉>은 “왕”이란 뜻이고, <체데크>는 “의”라는 뜻이므로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명칭입니다. 또한 <살렘 왕>이라는 것도 보통명사로 해석합니다. <샬롬>은 “평화”이고 따라서 <살렘 왕>은 보통명사로 해석하면 “평강의 왕”이란 뜻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이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족보도 없고 어미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멜기세덱 자체가 그리스도의 현현이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사했던 것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아브라함의 독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이때 이미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도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취하여 다른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이삭을 유독 아브라함의 독자라고 부르신 것은 바로 이 장면에서 이삭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고스란히 보여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이른 아침에 일찍 나귀에 안장을 얹고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이 사흘 동안 죽은 자로 간주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그는 다시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함께 사환들에게 “너희는 여기서 머물러라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러 가면서도 자신이 아이와 함께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 순간 부활의 하나님, 즉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우고 자기 손에는 불과 칼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갈보리에 나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림이며, 이때 하나님의 손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의 불과 칼이 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물었습니다. 여기 나무도 있고 불도 있고 칼도 있는데 번제에 쓸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아브라함은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예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자신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서는 “위하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어린 양으로서 내어주실 것임을 아브라함은 선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산에서 이삭을 죽이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수양을 예비하셔서 이삭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수양은 아브라함이 언급한 어린 양이 아닙니다. 어린 양(Lamb; 어린 양)과 수양(Ram; 뿔을 가진 다 자란 양)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양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순간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은 바로 대하 3:1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장소입니다. 이곳은 거대한 대리석 광산이었습니다. 훗날 솔로몬 성전이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무너지고, 스룹바벨에 의하여 재건 성전이 지어졌다가, 헤롯 대왕에 의하여 그 성전이 무너지고 다시 약간 비껴진 곳에 새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성전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던 그 성전입니다. 헤롯은 바로 본래 성전이 있었던 그 거대한 화강암으로부터 대리석을 캐내서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캐내느라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멀리서 보면 마치 해골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히브리 말로 <골고다: 해골의 곳>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될 때 <갈보리>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2장의 그림은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광경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창세기 24장에서 이삭의 결혼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신부된 이방 교회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을, 이삭은 성자 예수님을, 엘리에셀은 성령님을 예표합니다. 이방에서 엘리에셀의 인도로 이삭을 만나러 온 리브가가 바로 이방인으로서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우리 크리스천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