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악인의 등불은 꺼진다

천국생활 2015. 7. 22. 17:34

악인의 등불은 꺼진다
잠24:15-20


[악한 사람아, 의인의 집을 노리지 말고, 그가 쉬는 곳을 헐지 말아라. 의인은 일곱 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을 만나면 망한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그가 걸려서 쓰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셔서, 그 노여움을 너의 원수로부터 너에게로 돌이키실까 두렵다. 행악자 때문에 분개하지도 말고, 악인을 시기하지도 말아라. 행악자에게는 장래가 없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고 만다.]

• 멀리 멀리 갔더니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빕니다. 세상이 참 소란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일들이 많습니다. 태풍 찬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메르스의 광풍이 잦아드는 듯하자 정치권의 소용돌이가 또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불쾌합니다. 경제 위기에 직면한 그리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채권자들이 요구하는 긴축재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EU의 위기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균열을 예고하는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시대입니다. 문제는 이런 시대를 통과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황폐해지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난초'라는 시를 아시는지요? "하늘이/하도나/고요하시니/난초는/궁금해서/꽃피는 거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우니 이 시가 드러내고 있는 그런 고요함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산다면 모를까 우리 외부 세계는 우리 내면에 이런저런 파문과 흔적을 남기곤 합니다.

너무 애상맞은 느낌이 들어서 이전에는 잘 부르지 않던 찬송가가 요즘은 자꾸 떠오릅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387장 1절). 요즘 세상과 교회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분명하게 보이던 길이 어느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지고, 길을 알 수 없는 숲길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찬송가는 한국선교사였던 베어드 부인(Mrs. Wm. M. Baird)이 1895년에 작사한 것입니다. 그해는 바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해이기도 한데, 사람들은 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어드는 조선 민중들의 그 침통한 마음을 가슴으로 느꼈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자기 마음을 다스렸을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혹은 힘을 잃어 허정허정 걸을 수밖에 없을 때일수록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태초의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뚫고 나왔습니다. 모래로 바다의 경계선을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지혜 앞에 설 때 우리는 절망의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 회복력
오늘 본문은 악인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악한 사람아, 의인의 집을 노리지 말고, 그가 쉬는 곳을 헐지 말아라."(15) 몇 해 전에 공직에 나섰다가 어려움을 겪은 어느 지인이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목사님, 세상에는 정말 악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이전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는 알겠어요." 자기 이익에 발밭은 사람들에게 어지간히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살다보면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조차 내던지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말 정나미가 떨어지지요. 악인은 한마디로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입니다. 그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는 납작 엎드리지만,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피라냐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습니다. 그들은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올라서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먹힐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배려와 존중 혹은 연민은 약자들의 윤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런 삶이야말로 심판받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3:19-20)

악인들은 빛을 미워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악인들에게 의인의 집을 노리거나, 그가 쉬는 것을 헐지 말라고 엄히 경계한 후에 툭 던지듯 말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을 만나면 망한다."(16) 대체 의인과 악인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의인은 하늘의 뜻을 자기 삶의 준거점으로 삼습니다. 옛날 항해자들은 북극성을 보면서 항로를 확인하곤 했다고 합니다. 북극성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하여 '거기소居其所'라고도 부릅니다. 하늘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다시금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 혹은 욕망을 자기 삶의 준거점으로 삼는 악인들은 한번 넘어지면 일어서기 어렵습니다.

요즘 들어 여러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회복력(resilience)이 그것입니다. 공학에서는 구조물이 충격을 받은 뒤에 원상태로 되돌아오는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생태학에는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어떤 큰 일을 겪고 난 후에 마음에 남은 상처 혹은 흔적을 나타내는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개인의 능력을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회복력이 큰 사람일수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의 지혜자는 의인은 일곱 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회복력입니다. 돌아가신 김흥호 목사님은 믿음을 밑힘, 즉 저력底力이라고 푸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 방관의 죄를 넘어
다음 대목을 보겠습니다. 지혜자는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그가 걸려서 쓰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라"(17) 이릅니다. 별꼴을 다보며 사는 게 인생인가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런저런 이들과 얽힌 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도 있고, 견해 차이가 커서 갈등이 빚어질 때도 있습니다. 힘의 우열이 확연한 관계 속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인들의 꿈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괴롭히는 상사에게 사표를 내던지며 시원하게 욕을 해주고 나오는 것이라지요?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갑자기 불행한 일을 만나면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살아보려고 애면글면 애쓰다가 악한 자들에게 속절없이 이용당하거나 무시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원수들이 받는 보응을 후련하게 느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사람이 불행에 빠진 것을 보면 은결든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지 않던가요?

그런데 어쩌자고 히브리의 지혜자는 원수들이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런 마음 자체가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를 초월하는 데서 발현됩니다. 불의한 자들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그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불의한 행실을 버리고 참 사람의 길로 접어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넘어짐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말아야 할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조차 하나님이 내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긋난 길로 가고 있는 이들 때문에 애태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불행을 바랄 때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십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셔서, 그 노여움을 너의 원수로부터 너에게로 돌이키실까 두렵다"(18)

주전 6세기의 예언자인 오바댜는 에돔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엄중하게 예고했습니다. 에돔의 죄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을 때 에돔은 자기들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침략자들의 폭력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 자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타국의 불행을 기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마음은 정직하게 말하면 병든 마음입니다. 오바댜는 에돔의 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옵1:12)

방관하거나 조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의 남부 성읍들을 약탈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한 대로 당할 것이다. 네가 준 것을 네가 도로 받을 것이다"(옵1:15). 세상은 점점 에돔을 닮아갑니다.

• 믿는다는 것
지혜자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그는 악을 행하는 자 때문에 분개하지도 말고, 악인을 시기하지도 말라고 가르칩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분노할 줄 모르는 신앙처럼 무력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옭죄고 있는 성전체제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종교를 겉꾸미는 일로 바꿔놓은 세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셨습니다. 강자들의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분노는 자기 파괴적이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을 파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 속에서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한 분노였습니다. 마틴 루터와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뜻이 곡해되고, 사람들을 해방의 길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예속의 길로 이끄는 교회에 분노했습니다. '거룩한 분노'(holy rage)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 때문에 분개하지 말라는 말은 분노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이들의 존재 때문에 속을 끓이다가 스스로 소진되지 말라는 말일 겁니다. 요즘 만난 이들 가운데 꽤 여러 분들이 정신적 침체와 우울감을 하소연하시더군요. 아무리 애써 보아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좌절감 때문일 겁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충언합니다. 한꺼번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주 잠깐 그분의 일을 하다 갈 뿐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 나오는 한 구절이 참 소중합니다. 주인은 자기 깜냥껏 충실하게 일한 종을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25:21)

세상의 구조와 관련된 큰 문제에만 마음 쓰느라 일상을 지옥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울하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소한 일에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속에 생길 때, 삶을 축제로 바꿀 수 있는 정신적 탄력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큰 일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시편에 나오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37:23-24)

불의를 불의로 드러내면서도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는지 늘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패배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 할 때에 다가오셔서 손을 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웨일즈 출신으로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로 활동한 로완 윌리엄스는 '나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라는 고백은 내가 내 삶을 어디에 단단히 붙들어 맬 것인지, 어디서 나의 근본, 본향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선언의 출발점입니다." -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김병준·민경찬 옮김, 비아, 2015년 7월 7일, p.25

믿는다는 고백은 하나님께 내 삶을 단단히 붙들어 맨 채 살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입니다. 믿는 이들은 자기 힘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렇기에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낫고,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림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의인의 등불은 가물거리고 악인의 등불은 휘황하다고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등불은 꺼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늘 새 일을 시작하고 계심을 신뢰하십시오. 로완 윌리엄스는 믿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설명해줍니다.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도 그들이 있는 그 세계에 들어가 살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아는 것을 나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마시는 샘에서 같은 샘물을 마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앞의 책, p.52)

'그들'은 우리보다 앞서 진리의 길을 걸었던 이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들이 마시는 샘에서 우리도 같은 샘물을 마셔야 합니다. 진리의 샘물, 사랑의 샘물, 평화의 샘물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그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던 이들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히11:33-34)

하나님은 병든 세상을 고치자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지만 말고 작은 등불 하나라도 밝혀 들어야 합니다. 지금 뙤약볕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그늘이라도 드리워주어야 합니다. 목마른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이라도 건네주어야 합니다. 이 작은 소명에 충실할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들 것이고, 하늘 빛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유입될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기뻐하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