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을 위한 처방
빌4:2-9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친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 유오디아와 순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비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안내를 받아 아름다운 삶을 향한 순례를 해보려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매우 열악하고 곤고한 처지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 대해 매우 거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3:2). 이로써 우리는 빌립보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들이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경멸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인데, 바울은 오히려 그 표현으로 기독교를 유대교의 아류로 되돌리려는 이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교회가 늘 고요할 수만은 없습니다.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어떤 일을 도모하다가 의견 충돌이 빚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4:2)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이 빌립보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도자급 여성들임은 분명합니다. 바울도 이들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진술합니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4:3). 어떤 일 때문에 갈등 속에 있기는 하지만 두 여인은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동역자들과 함께 멍에를 멘 사람이었습니다. 멍에를 멨다는 것은 공동체의 문제에 늘 책임적인 자세로 임했다는 말일 겁니다. 좋은 일꾼들입니다. 바울이 굳이 두 여인의 이름을 직접 거명한 것은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 때문이었을 겁니다. 바울은 두 여인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간접적이긴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대립관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암시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빌2:3). 잘 해보려는 열정이 지나친 이들이 만나면 갈등이 빚어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견해 차이가 서로에 대한 배제 사유가 되면 안 됩니다. 갈등이 빚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마음으로 용납하고 존중한다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대립이 오래 지속되면 서로를 용납하기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가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 있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자기를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2:8)이라고 요약했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수신인에게 이 여인들이 화해할 수 있도록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 기쁨과 관용
그런 후에 바울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가지 특징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쁨과 관용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오뉴월 먹장구름 낀 하늘처럼 찌푸린 얼굴로 지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이냐"고 물어보면 "도무지 기뻐할 일이 있어야지요?" 하고 대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감옥입니다. 그는 지금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4:17-18)
보이지 않는 것, 즉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김흥호 목사님은 믿음을 일러 '안에 핀 꽃'이라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비밀을 오롯이 드러내줍니다. 예수님은 자주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아버지가 바로 '안에 핀 꽃'입니다. 그 꽃은 시들지 않습니다. 향기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 것도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참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또 다른 특색은 관용입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4:5). 관용寬容의 사전적 의미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입니다. 관용을 한자어 그대로 풀면 '너그러운 얼굴'입니다. 너그러운 얼굴은 누군가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얼굴이겠지요. 기독교인의 얼굴은 그러해야 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관용적이지 못합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은 나치 시대에 독일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라비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는 최고의 외과의사이지만 프랑스에서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다른 의사들의 수술을 대행하며 살아갑니다. 환자가 마취상태에 들어가면 그가 나타나 수술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그를 통해 돈도 벌고 명망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술실에서 늘 만나곤 하는 간호사 외제니는 라비크를 싫어합니다. 그가 아무 것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슈타포에게 붙잡혀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자기 애인이 고문을 당하고 죽는 모습까지 지켜본 그에게 신성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외제니가 자기를 비난하자 라비크는 신앙이 때로는 광신으로 변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관용은 회의의 딸이지요. 외제니. 당신은 그런 신앙심이 있으면서도 나에 대해, 패배한 무신론자인 내가 당신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지 않소?"(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1>, 민음사, 2015년 2월 16일, p.72)
잘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냉혹하고 계산적이고, 불안정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공격적인 외제니의 믿음이 진실한 것일까요? 기독교인들은 품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소한 차이조차 견디지 못하는 신앙이란 얼마나 불안정한 것입니까? 오늘의 개신교인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편협함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말하면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기쁨과 관용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리를 '비은폐성'(Unverborgenheit)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진리는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나는 사건을 통해서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나는 징표로 기쁨과 관용을 들고 있습니다.
• 세 가지 처방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그 첫번째는 진실한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4:6). 염려한다는 말은 우리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다른 의지처를 찾는 것이 염려입니다. 염려는 우리 속에서 기쁨을 앗아갑니다. 염려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염려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올 수는 있습니다. 염려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가져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나요? 우리 경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의 보람이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기도의 보람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4:7)
기도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연결시켜줍니다. 하나님과 깊이 마음을 통하다 보면 지금껏 우리를 괴롭혔던 문제가 실상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신앙을 '먼 빛의 시선'으로 설명한 분도 있습니다만 기도는 우리를 깊이의 세계로 이끌어줍니다.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기도하는 이들은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바닥짐이 있는 사람처럼 늘 든든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위한 두 번째 처방은 '깊은 생각'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깊이 숙고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도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유연해야 하지만 자기 삶의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은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깊은 생각입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명예로운 것,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숙고할 때 우리 삶은 맑아집니다.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은 일지암에 머물고 있는 법인 스님의 책 제목입니다. 그는 사색의 시대는 가고 검색의 시대가 왔다고 말합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들의 눈은 컴퓨터 화면과 스마트폰에 쏠려 있고,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바쁩니다. 법인은 말합니다. "하늘, 구름, 별, 산, 꽃, 물소리, 바람소리, 흙을 멀리한 채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에 오감을 맡기고 있다. 이것들은 표정과 온기가 없다. 표정과 온기 없는 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은 지극히 건조하다. 소통과 교감이 일어날 수 없다."(법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불광출판사, 2015년 3월 20일, p.14)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의 문제입니다.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학살에 적극 동참했던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한 후에 그 끔찍한 범행의 뿌리에 '무사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며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아이히만은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유의 주체되기를 포기하고 뱀이 자기들의 행동을 이끌도록 허용했습니다. 무사유의 전형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기 위해 자꾸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위한 세 번째 처방은 '실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4:9) 배운 것, 받은 것, 듣고 본 것들이 중요합니다. 진짜 배움은 듣고 봄에서 일어납니다. 옛사람들은 공부의 기본으로 '소쇄응대瀟灑應對 진퇴지절進退之節'을 가르쳤습니다. 물을 뿌려 청소하고 말씀에 응답하고 사람을 공손하게 맞이하는 일, 나아가고 물러가는 일을 배우지 않는 공부는 사상누각이 되기 쉽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삶의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11:1).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이른 사람이 아니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 삶을 본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그 본을 따라 우리도 생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깊이 배우고 그런 삶을 몸으로 익혀야 합니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진리란 비은폐성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시지요?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참 기독교인입니다. 무더운 여름날입니다. 우리 삶이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보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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