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 이야기
살전1:1-10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는 우리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 아들 곧 장차 내릴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그들은 말합니다.]
• 인간성의 황무지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번 주중에도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 기관들이 이탈리아의 해킹팀이라는 회사로부터 휴대폰이나 인터넷을 도청 혹은 감청할 수 있는 장비를 다량으로 구입했다고 합니다. 사안이 드러나자 국정원 직원 한 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제자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손발을 묶고 얼굴에 비닐 봉지를 씌운 후 스프레이를 뿌리고 심지어는 인분까지 먹게 한 교수 이야기는 모두의 공분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영상 디자인 부문 최고의 권위자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다른 이를 비인간적으로 학대했습니다. 학대 당한 이는 그 교수가 줄 수도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수 년간 그런 폭력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하는 인간이 도대체 어디까지 전락할 수 있는 것일까요? 더욱 참담한 것은 그 교수가 기독교인라는 사실입니다. 학생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라고 격려하는가 하면, '너를 위해 기도한다'는 문자 메시지도 보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긋난 것일까요? 에덴 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면서 한 말을 떠올려보십시오. "네가 신처럼 되리라".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 말의 올무에 걸린 채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 힘은 '유사-전능함'을 그에게 부여합니다. 그 힘을 손에 잡은 이들은 그 힘을 어디에든 써보고 싶어합니다. 그 힘으로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일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할 때 그는 다른 이들을 비인간화하고 스스로 비인간이 됩니다. 문제는 그가 그러한 전락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참담하고 비참합니다. 이러한 인간성의 황무지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보다보면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126:6)는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번 힘을 내봅니다. 복음은 언제나 그런 현실 속에서 울려퍼졌고, 그 소리에 응답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는 새롭게 되곤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폭압에 시달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러했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바울 사도의 노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닌다고 말했습니다(갈6:17).
• 인사말에 담긴 속뜻
오늘 우리의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첫 대목입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로부터 북쪽으로 320km쯤 떨어진 그리스 제2의 도시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제2차 선교여행 중 이곳에 들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략 주후 50-51년 경으로 추정됩니다. 늘 그러하듯 사도 일행은 그곳에 있던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성경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 후,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몇몇이 승복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과 적지 않은 귀부인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의 유력자로서 유대인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기심을 느낀 유대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사주하여 시내에서 소요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머물고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바울은 이미 몸을 피했지만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은 그들에게 붙잡혀 관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불량배들은 바울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고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행17:6b-7)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these men who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이라는 말이 당시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위/아래로 질서있게 구획되어 있는 사회질서를 뒤집어 엎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황제보다 예수를 더 큰 권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존 체제의 입장에서는 불순분자들이고 요주의 인물들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런 상황 속에서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린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이들이 들어가 교인들의 믿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사목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발신자의 이름을 자신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적고 있습니다. 동역자들에 대한 깊은 존중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다루려는 사안이 개인의 소견이 아니라 공동체적 견해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편지의 수신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의 삶과 죽으심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산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은혜와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한일장신대의 차정식 교수는 바울의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두 상용어는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신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어라고 말합니다. 은혜(charis)는 헬라적 인사말을 대표하고 평화(eirene)는 히브리식 인사말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차정식,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포이에마, 2015년 4월 1일, p.280).
• 기억을 통한 연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그리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기도 수첩을 마련해서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할 이들의 이름과 사연을 적어놓고 있습니다만, 굳이 수첩을 살피지 않더라도 기도 중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대개는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혼돈과 두려움을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한분 한분 떠올리면서 조용히 노래를 읊조리기도 합니다.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주님 계시니 아쉬움 없네/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주님 안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와 나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고통에 대한 연민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든든한 끈입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꼭 어려운 사람들만 떠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고마운 이들도 떠오릅니다.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힘이 되는 사람들 말입니다. 바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릇된 가르침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이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견지하고 있는 든든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상기하며 그들을 칭찬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3)
저는 신앙생활이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명사는 영문법에서 동사와 명사의 기능을 함께 지닌 품사입니다. 우리말로는 동사의 명사형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과정은 이와 반대입니다. 명사인 신앙이 삶의 동사로 전역되어야 합니다. 흔히 우리가 믿음의 삼덕이라고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에 바울은 행위, 인내, 수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실은 덧붙인 게 아니라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수고를 동반하지 않은 사랑은 허위의식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소망을 품고 산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고 현실의 난관에 부딪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은 이렇듯 복음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자기 수고의 결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여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그곳에 이르렀을 때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라는 비난을 받고,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자'라는 의혹을 사고, 시련도 겪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켜낸 것을 보면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참 사람의 길을 발견한 자의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 이야기가 있는 신앙생활
바울 사도는 그들을 아낌없이 칭찬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6). 누구를 바라보느냐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바라보다'라는 단어는 '바라다'와 '보다'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대개는 바라는 것을 보게 마련이지만, 보는 것이 우리를 잡아당기기도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보듬어 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시선을 주님께로 이끈 사도들의 아름다운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그런 삶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그런 경계를 넘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마치 호수 한복판에서 일어난 물결이 동심원을 이루며 호숫가로 번져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선교란 어쩌면 사랑과 연민을 그 내용으로 하는 동심원의 확대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지향해야 할 믿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 아들 곧 장차 내릴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그들은 말합니다."(9-10)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아주 함축적인 언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영접함,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옴, 오직 하나님만을 섬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림. 우리는 이 구절을 내처 읽었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이런저런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기억이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 언어의 갈피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말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우상을 버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신들의 진노를 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버렸다는 것은 관습화된 삶의 방식을 과감하게 탈피했다는 말입니다.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아우구스투스 성인은 옛 삶에 속한 명예와 쾌락이 주님께로 돌아가려는 자기 옷자락을 꼭 붙들고는 "정녕 우리를 두고 가려는가?" 하고 묻더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버리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 사무실에는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는 글귀가 적힌 현판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쉬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꾸만 자기를 덜어내야 한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이 두 가지 공부는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철저하게 공부하고, 끊임없이 덜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더럽다'는 말을 '덜'과 '없다'로 해체하여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더러운 것은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첫 번째로 요구한 것은 '자기 부정'입니다. 자기에 대한 과도한 집중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죄의 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유영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다가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만들어가는 신앙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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