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

천국생활 2015. 6. 22. 07:38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요엘2:18-27


[그 때에 주님께서 땅이 당한 일로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께서 백성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주어서 아쉬움이 없도록 하겠다. 다시는 다른 나라가 너희를 조롱거리로 만들지 못하게 하겠다. 북쪽에서 온 메뚜기 군대를 멀리 쫓아 버리겠다. 메마르고 황량한 땅으로 몰아내겠다. 전위부대는 사해에 몰아넣고 후위부대는 지중해에 몰아넣겠다. 시체 썩는 냄새, 그 악취가 코를 찌를 것이다." 주님께서 큰 일을 하셨다! 땅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큰 일을 하셨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광야에 풀이 무성할 것이다. 나무마다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저마다 열매를 맺을 것이다. 시온에 사는 사람들아, 주 너희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를 내리셨다. 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셨으니, 옛날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셨다. 이제 타작 마당에는 곡식이 가득 쌓이고,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이다. "메뚜기와 누리가 썰어 먹고 황충과 풀무치가 삼켜 버린 그 여러 해의 손해를, 내가 너희에게 보상해 주겠다. 그 엄청난 메뚜기 군대를 너희에게 보내어 공격하게 한 것은 바로 나다.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 평안 없는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조금 잦아드는 것 같기는 하지만 중동호흡기증후군의 여파가 심상치 않은 나날입니다. 이 병은 외로움을 동반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환자 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호트 격리병상에서 투병하던 아내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이 간호사를 통해 임종편지를 낭독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38년을 함께 산 아내의 손을 잡아줄 수도, 함께 지내온 세월이 참 고마웠다고 말할 수도 없는 그분의 마음이 느꺼워져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속히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봄 가뭄이 심각했는데, 그제와 어제 내린 이제 조금 해갈이 되었나요? 강원도에는 별 비가 내리지 않았다더군요. 극심한 가뭄에 논밭의 작물들도, 농부의 가슴도 바짝 타올랐습니다. 오죽하면 기우제까지 지냈겠습니까? 우리 삶의 토대는 이렇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부실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삶의 근본을 자꾸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위태로운 삶 속에서 희망을 모색해보고 싶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어느 시대에 활동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본문 가운데 드러난 여러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귀환한 공동체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시는 무참할 정도로 무너졌고, 전답은 황폐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귀환 공동체를 환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들은 적대감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니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삶의 토대를 복구하는 고단한 나날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느헤미야는 성벽을 쌓다가 지친 사람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흙더미는 아직도 산더미 같은데, 짊어지고 나르다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 힘으로는 이 성벽 다 쌓지 못하리."(느4:10)

이런 상황만도 어려운데, 그들의 가련한 삶에 더 큰 타격을 입힌 것은 메뚜기 떼의 급습과 가뭄이었습니다. 이상 기후로 인해 발생한 메뚜기 떼가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지상에 녹색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요엘은 메뚜기 떼가 다가오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마치 어둠이 산등성이를 넘어오듯이 새까맣게 다가온다"(2:2b). 메뚜기 떼는 포도나무를 망쳐 놓고 무화과나무도 그루터기만 남겼습니다. 나무 껍질까지 다 벗겨져 줄기가 모두 하얗게 말랐습니다(1:7). 그로 인해 성전에 바치는 곡식 제물도 동나고, 부어드리는 제물도 떨어져 제사장들은 그저 탄식만 할 뿐이었습니다. 밭이 그처럼 황폐해지자 땅이 통곡했고, 땅이 울자 들짐승들도 부르짖었습니다. 전쟁을 겪은 이들에게 이런 광경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
요엘은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함께 울자고 외칩니다. 술을 즐기는 자들, 백성들, 농부들, 제사장 할 것 없이 모두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어 목놓아 울자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이 혹시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그 백성들에 대한 진노가 아닌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가장 어려운 시절에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엘에게 그런 자연재해는 우연히 닥쳐온 불운이 아니라 세계 심판의 징조였습니다. 요엘은 '주님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동안의 삶의 방식에 대한 엄정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은 구원의 날일 수도 있습니다.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전환시키는 것은 회개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백성들을 향해 진심으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사로잡힌 요엘은 이렇게 외칩니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2:12). '돌아오라'는 말은 '떠남' 혹은 '벗어남'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 떠남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멀어짐, 또 거기서 빚어지는 삶의 방식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실 모든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음성의 다양한 변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합니다. 우리 삶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로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의 삶의 특색은 '배려'와 '연민'이 아닐까요? 19세기 러시아 소설가인 레스코프(Nikolay Semyonovich Leskov, 1831-1895)가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는 참 감동적입니다.

"그녀는 영혼이 선하여 어떤 인간에게도 고통을 줄 수 없었지요. 심지어 동물에게도 말이지요. 그녀는 고기도 생선도 먹지 않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것들에 연민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그 때문에 어머니를 타박하곤 했어요…그렇지만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죠. '나는 이 동물 새끼들을 손수 키웠고, 그래서 그것들은 내 아이들이나 다름없어요. 내 자식을 먹을 수 없잖아요!' 이웃집에 가서도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녀는 말하길, '난 이 동물들이 살아 있을 때 본 걸요. 그것들은 내 친척이지요. 내 친척들을 잡아먹을 수는 없어요.'"(문광훈, <가면들의 병기창>, 한길사, 2014년 9월 30일, p.749에서 재인용)

레스코프는 짜르 체제 하에서 점점 거칠어져 가는 사람들의 심성을 보며 깊은 절망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소박한 믿음과 고운 심성을 그 시대의 치료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닐까요? 요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2:13a) 하고 말합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말이 강력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에서 그 백성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그들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메시지 가운데 가장 인상깊게 다가오는 것은 "너희 몸에서 돌 같이 굳은 마음(stony heart)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겔36:26) 줄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은 세상의 아픔에 예민하지 않습니다. 은총 안에서 회복된 사람은 세상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인식하게 마련입니다.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타락한 영혼의 징표입니다.



•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
요엘이 철저한 회개를 요청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아파하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이 당한 일로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속을 끓이시는 분입니다. 일본 신학자인 기타모리 가조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폐허로 변한 일본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를 사로잡은 말씀은 예레미야의 한 대목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주의 말이다."(렘31:20)

기타모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죄에 대한 분노 사이에 놓인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유려한 언어로 표현하여 서구 신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자기 자식을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의 마음은 찢기워 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재앙을 예비했다가도 백성들이 참회하면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신뢰가 우리 삶의 든든한 토대입니다.

요엘은 메뚜기 군대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2:25). 이 말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아픔과 삶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거울로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초대입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를 교리화하여 타자들을 배제하는 논리로 사용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 위험합니다. 이번 메르스 사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 병의 뿌리는 자연을 마구 훼손해 온 인간의 삶의 방식이고, 그 확산은 부실한 대응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 병이 '동성애자들'과 '무슬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견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왜곡된 신학처럼 위험한 게 없습니다. 그것은 곧 바로 타자에 대한 배제의 논리가 되거나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땅이 당한 일로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회복을 약속해주십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주어서 아쉬움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풍요로움이나 사치스러운 삶의 약속이 아닙니다. 필요한 만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제 신학교 동기인 이진희 목사의 책을 읽다가 광야에서는 이슬조차도 은총이라는 구절만 만났습니다. 옳습니다. 가뭄을 일거에 해소하는 큰 비처럼 내리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이슬처럼 조용히 주어지는 은총에 눈을 뜬 사람은 아쉬움이 없도록 해주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를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북쪽에서 온 메뚜기 군대를 멀리 쫓아내심으로 더 이상 다른 나라가 그 백성을 조롱거리로 만들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엘은 그래서 땅과 들짐승과 시온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칩니다. 느헤미야의 말이 떠오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느8:10). 저는 이 말씀 속에 튼실한 삶의 비결이 있다고 믿습니다.



•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심
고통과 수치와 시련의 시간은 지나갈 것입니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 누가복음 15장의 그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2:26)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수치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이방 민족들에게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모욕당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을 정도의 가난도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런 수치를 없애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껏 먹고, 배부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존재를 안으로부터 허무는 수치의 감정은 자기답게 살지 못한다는 자책으로부터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계약을 맺을 때에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 앞에 드러내 보여주는 기표가 되라는 말이 아닐까요? 계약법전이나 정결법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세히 가르쳐줍니다. 그것을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입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사라지고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타락한 존재만 남게 됩니다. 수치스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다짐이지만, 우리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2:27)

진정한 회복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에게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시고,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수치의 늪으로부터 우리를 건지려 하십니다. 단지 우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연약한 이들, 좌초한 이들, 소멸하기 쉬운 것 속에 머물면서 그들 속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그들 곁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풍요와 거짓된 안전을 약속하는 우상들을 따라다니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옛사람은 말 달려 사냥하는 것을 즐기다 보면 마음이 미치게 되고,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의 행동을 그르친다(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제 질주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이웃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곁에 머물며 희망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일어서야 합니다. 이제 내일이면 하지입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 이웃들의 마음에 선선한 그늘을 마련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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