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 죽음의 그림자

천국생활 2015. 6. 15. 08:27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마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 죽음의 그림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불길한 검은 구름이 우리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메르스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중이 모인 곳에 가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아파도 차마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게 오늘의 실정입니다.

외국인들도 방문을 꺼립니다. 초기에 확산을 막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런 걸 두고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소비 심리 위축을 염려하여 한국은행은 기준 금리를 인하했다고 합니다.

책임있는 주체들은 어찌하든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는 1940년대의 가상 도시인 오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의사인 베르나르 리유는 어느 날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에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기분이 좀 나쁘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며칠 후 도시 전체에서 죽은 쥐가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그는 시청 공무원에게 전화를 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공무원은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야 뭐든 할 수 있다면 책임을 방기합니다. 전형적인 관료주의입니다. 베르나르는 오랑시 의사협회장인 리샤르에게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당장 페스트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가고 있는 데도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관료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의사협회장의 모습을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속상합니다. 그런 가운데 낙동강이 죽음의 강이 되었다는 보도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녹조가 순식간에 번졌습니다. 보를 만들어 물을 흐르지 못하게 만드니 물이 병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는 식수원으로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고 위험이 많은 고리 원전의 작동 중단을 권고하는 안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에너지 기본계획을 통해 핵발전소 2기를 더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핵발전소를 줄여가는 추세에 역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햇빛과 바람을 통해 청정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언제 파국으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핵에너지에 집착하는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국제사회와 약속했던 온실가스배출 감축안도

산업에 부담을 준다는 핑계로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낙인이 깊게 찍혀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 곤고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본래 조화롭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의 삶을 한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스런 삶의 방식으로 인해 그러한 조화는 무너졌고, 피조 세계는 지금 신음하고 있습니다.

 메르스라는 질병도 개발을 명분으로 동식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한 결과 가운데 하나라고 하더군요.

서식지를 빼앗긴 박쥐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곳에 내려와 낙타를 감염시켰고,

낙타는 또 사람에게 질병을 전달했다는 것이지요. 질병이 점차 세계화되는 추세입니다.

매해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문명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지금의 문명은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함으로 유지됩니다.

요롭고 편리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의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구 생태계는 더 이상 인간의 탐욕스러운 삶의 방식을 버텨낼 힘이 없습니다.

이럴 때면 삶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번영의 신학'을 통해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게 날로 매진한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숨가쁘게 달려보지만 행복은 늘 신기루처럼 저만치 멀어지고 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삶을 장악하고 있고,

함께 살라 하신 이웃들은 잠재적 경쟁자 혹은 적처럼 보입니다.

환대보다는 적대감이 넘칩니다.

옳고 그름을 정밀하게 판단하기보다는 진영 논리에 따라 네편 내편을 가르며 싸웁니다.

이유없이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를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렇게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산상수훈의 한 단락입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삶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잇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고, 가까운 시일 안에 그런 상황이 개선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구차한 인생들, 땅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리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삶의 곤경을 해결해 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다 해서

마음까지 빈곤해져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온통 땅의 현실에 사로잡혀 살다보면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은 곧바로 타자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적대감은 자기 속에 있는 행복의 가능성조차 제거합니다.

주님은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너무 한가롭고 낭만적인 교훈 같습니다. 찜질방에서도 자지 못하고 PC방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도 많은 현실입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소중합니다.

 

삶이 곤고할수록 가끔 시선을 더 큰 세계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이들은 희망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비인간이 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극한의 상황이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 때문에 다투고, 사소한 편익을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자기를 지켜준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 비인간화시키려는 이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용소와 같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육인 동시에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굶주림도 문제이지만 영의 굶주림은 더 큰 문제입니다.



• 아름다움에 눈 뜨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고 입히시지 않더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단락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맡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도 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향유하는 능력이 회복될 때 우리는 과도한 욕망의 지배에서, 소비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작고 사소한 것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빈곤하지 않습니다.

전남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에 사는 유동종(84) 할아버지와 강연순(83) 할머니 집에 귀한 손님이 들었습니다. 두 분만 사는 단촐한 살림이 늘 쓸쓸하지만 두 분은 지금 외롭지 않습니다. 우편함 속에 기쁜 소식이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새가 그 안에 둥지를 틀고 작고 연약하고 이쁘고 위태롭고 애틋한 알 여섯 개를 낳아 놓았습니다. 노 부부는 그 새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다 해놓았습니다. 우편배달원에게 우편물을 다른 곳에 놓아달라는 메시지도 적어 놓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의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미새가 아주 대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새가 여간 영리해. 대문간에 내가 의자 놔뚜고 앙겄으문 절대 일로 안 옵디다. 두 마리가 저기서 찌웃짜웃 하고 있제. 그라문 내가 인자 들오니라 하고 비껴주고 그라제. 새가 어디 멀리 안 가. 알 지킬라고 가찬 디서 항시 망 보고 있제. 긍께 내가 여그 앙겄다가도 알 품으라고 얼릉 비껴주고 그래."(<전라도닷컴>, 2015년 6월 158호, p.34)

글쓴이는 굳이 '갑을'을 따지자면 우편함에 세든 새 부부가 '을'이고 집주인이 '값'인 셈이지만 집주인이 더 눈치를 보고 사는 셈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산골에 깃들어 사는 시인 박남준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부나 권력을 가진 그 누구도 아닌, 딱새 청딱다구리 버들치 귀뚜라미 잠자리 등등의 눈치를 보며 사는 삶의 아름다움이여."(p.35)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앞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고 여린 생명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비에 사로잡힌 시편 시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24:1)

진실한 믿음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함부로 대하거나 훼손할 수 있겠습니까?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로 저는 '아낌'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아끼다'라는 타동사는 '내어 놓거나 버리기를 아깝게 여기다', '소중히 여겨서 함부로 쓰지 아니하다'라는 뜻과 더불어 '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라는 뜻으로 활용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아낄 뿐만 아니라, 대하는 모든 사람을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삶입니다.

 

 

 



• 삶의 우선순위
우리 삶이 이렇게 무겁고 또 뒤죽박죽이 된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해도 되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과 말이 뒤바뀌고, 선과 후가 착종되면서 삶이 고단해졌습니다. 시인 김사인은 "얼빠진 집구석에서 태어나/허벅지 살만 불리다가 속절없이 저무는구나./내 새끼들도 십중팔구/행랑채나 지키다가 장작이나 패주다가 풍악이나 잡아주다가 행하 몇푼에 해해거리다 취생몽사하리라./괴로워 때로 주리가 틀리겠지만/길은 없으리라." 하고 노래합니다. 시 제목이 <한국사>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가버리는 인생이 씁쓸합니다. 시인은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는 역사의 풍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길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33)

주어진 일상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모셔들이십시오. 학교나 집에서 공부하고, 일터에서 일하고, 벗들과 어울려 놀고, 가족들과 지내는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삶이 가지런해지고 따뜻해질 것입니다. 작고 여리고 어여쁜 생명들의 아름다움에 눈 뜨고, 그것을 세심하게 돌보려 할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듭니다. 이런 돌봄에는 지금 비참하고 곤고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돌보는 마음은 우리 내면의 생태계를 건겅하게 만들어주는 명약입니다. 우리 마음이 건강해지면 우리가 잠시 세들어 살고 있는 자연 세계도 평안해질 것입니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세계 인구가 10억 명에 달한 때가 1810년이라 합니다. 그런데 불과 200년 사이에 인구는 그 일곱 배인 70억 명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으로부터 야기된 새로운 멸종이 멀지 않았다는 경고음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합니다. 생명 중심적 사고로의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공의 사다리 맨 밑단에 있는 이들조차 각자에게 주어진 생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살도록 세심하게 보살펴야 합니다. 배우지 못했어도, 물려받은 것이 없어도, 병약하게 태어났어도, 실패를 거듭해도 우리를 부둥켜안아주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한 절망이란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일을 하라고 부름받은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어하십니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그것을 아끼고 돌보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면이 풍요로운 이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법입니다. 이 아름다운 초대에 삶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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