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은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천국생활 2015. 7. 8. 16:05

은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행15:6-11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다. 많은 논쟁을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도 내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안디옥 교회의 상황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초대교회의 역사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섰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는 매우 인상적인 결과를 가지고 파송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지중해의 섬지역과 소아시아 지역 선교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욕망에 뿌리를 둔 옛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따라 사는 새로운 삶으로의 개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대략적인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미처 담지 못한 수많은 에피소드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생생한 경험들을 본 교회 신자들과 나눌 생각에 그들의 가슴은 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좀 복잡한 문제에 휩쓸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자문을 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 신도들 몇 사람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떠났습니다. 무려 50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가면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만나 이방인들이 회개한 일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도들은 매우 기쁘게 그 이야기를 청취했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다가 문득 바울과 바나바의 행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복음의 실로 엮어내는 바느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숨을 죽인 채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는 법입니다.

사절단은 예루살렘에서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사도들 말고도 장로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장로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대개 나이도 많고, 덕스러워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나중에 자신을 장로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벧전5:1) 사도들과 장로들은 일종의 협의체를 이루고 있었고,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그 중심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협의체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라고 문제 제기를 하였습니다.

• 공의회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식적인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일종의 공의회인 셈입니다. 주후 49년 경에 일어난 이 회의를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도회의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이 회의는 나중에 열릴 모든 공의회의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졌습니다. 갑론을박하는 과정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참여자들은 거리낌없이 자기들의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누구도 말을 독점할 수 없었습니다. 토론과 논쟁에서 드러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각자의 성격이라는 말도 있지만, 진리를 찾아가기 위한 건설적인 논쟁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논쟁을 참 좋아했습니다. 안티로기아(antilogia)는 법정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로고스와 로고스가 맞부딪치는 곳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신들조차 진리를 고지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다투는 자로 법정에 섭니다. 유대교의 랍비 전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아마 이런 전통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철야 기도를 하기보다는 논쟁을 택했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기 위해 기도하는 일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활용하는 일 또한 중요합니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환상이나 꿈 그리고 종류가 어떠하든, 갑작스러운 느낌이나 강한 충동 같은 것을 믿지 말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경험과 이성 그리고 성령의 평범한 도우심을 힘입고 명백한 성경적 법칙을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웨슬리 설교 전집3>, 기독교서회, 2006년 5월 30일, p.34)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경험과 이성 그리고 성경입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하면 전통이 되겠지요.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강조합니다. '내가 기도해봤더니~'라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지르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이들이 참 위험합니다. 토론이 무르익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그는 이탈리아대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을 인정해주신다는 것,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기들조차 온전히 지키기 어려운 율법의 멍에를 메우려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이렇게 맺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11)

베드로의 논증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고, 논리적으로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회중들은 반박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베드로의 증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이방 사람들 가운데 행하신 온갖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이야기는 힘이 센 법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한 결정적 증거입니다. '신학'(theology)은 '신(theos)에 관한 이야기(logos)'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구체적인 언어에 마음을 열곤 합니다.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신약보다 구약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 속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창세기나 출애굽기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 진리를 향한 개방성
이제 사람들의 마음은 거의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야고보가 일어나 베드로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칩니다. 이방인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는 일찍이 예언자들이 전했던 말씀과 꼭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고치고, 그 집을 바로 세우실 때, 남은 자들이 주를 찾을 것이고, 주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받은 모든 이방 사람이 주를 찾게 될 것이라는 아모스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증언이 경험과 이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면 야고보의 증언은 전통과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써 감리교 신학의 4대 원리라고 하는 '경험 이성 전통 성경'이 다 등장했습니다.

공의회는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할례나 율법 준수 요구 등의 일로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입니다. 우리는 비교적 사소한 입장 차이 때문에 교파가 갈라지고 교회가 갈라지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 때문에 갈라질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지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설교 '관용의 정신'에서 "비록 교리나 예배 방법의 차이가 우리들이 외적으로 일치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에서 하나가 되는 것까지 막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앞의 책, p.61)라고 물었습니다. 모두의 마음이 같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 말 끝에 단언하듯이 말합니다.

"서로간의 차이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행과 사랑에 있어서 서로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차이 때문에 다른 이들을 백안시하거나 적대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그런 차이를 차이로 받아들이되,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과 선의로 대할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여유와 지혜가 아닐까요?

• 공의회 이후
이제 결론은 내려졌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의 한 종파에 머물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규례를 따르는 일은 구원과 무관한 일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여전히 찜찜한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유대인 신자들을 고려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이방인 신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은 하지 말라고 권고하자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더러운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 음행을 피하라는 것,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는 아주 명백하게 결론을 내려주되, 유대인들의 마음도 고려하여 내린 조치입니다. 이것은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친절한 배려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인들에게 다른 이들을 각별히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10:31-33)

믿음의 삶은 늘 남을 배려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남에게 유익이 되도록 자기 삶을 제한할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의 길 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의 질문에 답하는 편지를 작성하여 유다와 실라로 하여금 안디옥에 전달하게 합니다. 이로써 안디옥 교회의 혼란은 진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도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교회 일치와 공교회성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안팎으로 질타를 받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런 공교회성을 잃어버리고 개교회 중심주의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겁니다. 공교회성이 사라졌기에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 태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자정 능력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는 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상급 기관들은 그들을 치리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사람들은 교회를 더욱 차갑게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신실한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아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때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성전임을 깨달아,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림의 사람답게,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바로 우리들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향기와 평화의 기운이 감돌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 이야기  (0) 2015.07.22
함께 기뻐한다는 것  (0) 2015.07.08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  (0) 2015.06.22
• 죽음의 그림자  (0) 2015.06.15
어우렁더우렁  (0) 2015.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