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딸아 안심하고 가거라

천국생활 2021. 6. 29. 15:51

딸아, 안심하고 가거라

이범석(202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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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안심하고 가거라
막5:25~34
(2021/6/27, 성령강림 후 제 5주)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 급히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어느덧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 여름의 한복판으로 쑥 들어간 느낌이었습니다. 낮에는 얼마나 햇볕이 강렬하던지 길을 가면서도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파아란 물결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그리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바다 구경을 갔는데, 물이 차서, 바닷바람 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심심해, 심심해, 노래를 부르는 아이한테 물수제비를 보여줬습니다. 딸도 흉내는 내는데, 돌멩이가 연실 물에 가라앉고 마는 겁니다.
제가 자세를 가르쳐 주고, 어떤 돌멩이가 잘 뜨는지 알려줬습니다. 아이는 눈에 불을 켜고 둥글납작할 뿐 아니라 예쁘기까지 한 돌멩이를 찾아다녔습니다. 주머니에 꽤 모아서, 물수제비를 뜨겠다고 손에 쥐더니, 갑자기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마치 인생 최대의 난관에 빠진 표정이 되는 겁니다.
“아빠, 내가 여기저기 다니며 열심히 찾아 모았는데, 그걸 다시 바다에 던져 버리려니까, 아까워.” 심심해할 아이와 다시 바닷가에 서 있자니, 이젠 제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심각한 표정인 딸한테, 제가 “그 돌멩이가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네. 네 생각은 어떠니?” 했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수제비를 신나게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마음에 꽂히면, 정말 그것만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순수해서 그런 거겠지요. 우리 예수님도 비슷하세요. 오죽하면, 드라크마 동전 하나를 찾겠다고, 등불을 켜고 집안 전체를 비질하며 찾아다니지를 않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겠다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나서겠습니까. 모두가 포기한 순간에도, 고집스레 그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돌보고 계셨습니다. 해변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리던지, 예수님은 배를 띄우고, 그 배를 설교단 삼아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또 풍랑을 잠잠케 하고, 거라사의 군대 귀신을 내쫓으시는 등 여러 이적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또 치유하고 축귀하시는 놀라운 광경을 보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마침 주 활동지였던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서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손을 얹어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하시겠다고 그와 함께 길을 나서셨습니다.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도 밀고 당기며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길을 잘 가던 중, 예수님께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무리를 향해 돌아서서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라며 반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함께 가고 있었고, 서로 밀고 밀리며, 회당장의 집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너무 이상했기에, 제자들조차, ‘아니, 이 상황을 보세요, 손댄 사람이 수십 명은 족히 될 겁니다’, 라며 반문했던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누가 그랬는지 찾아내시겠다고 계속 둘러보고 또 물어보셨습니다. 지금 한 어린 소녀가 죽어 가고 있고, 그 아비가 와서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습니다. 한시바삐 길을 재촉해야 할 터였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초조하고 갈급한 눈길을 외면하는 듯, 그 사람을 찾아내려 하고 계십니다.
그때 한 남루한 여인이 사람들 앞으로 나왔습니다.

* 믿음의 투신, 영혼과 관계의 회복
여인은 십이 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해왔습니다. 하혈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십이 년. 이건 시간의 양을 표시하는 숫자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으로 정말 무수하게 긴 세월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여러 의사를 만나느라 집안의 재산마저 탕진했으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당시 율법 상 피를 흘리는 여인은 부정합니다. 그녀 자신이 부정할 뿐 아니라, 그녀와 접촉한 사람, 물건까지 부정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여인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질병은, 그녀를 육체적, 영적, 사회적으로 버림받게 했습니다. 살아갈 모든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망한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해 줄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에 관한 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최후의 시도라 할 만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피가 흐르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이랑도 접촉하면 안 되었지만, 나사렛 사람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그분의 능력이 나에게 마술처럼 옮겨져, 나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압니다. 만지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들키면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만, 정말 정말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고쳐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움직여야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나설 수 없었던 여인은 수많은 사람 무리에 슬며시 끼어 따라가다가 기회를 노렸습니다. 마침내 손을 내밀고, 나사렛 사람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부정하다고 여겨졌던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자기 주위에 완강하게 둘러쳐진 사회적 단절의 울타리를 뚫고 대담하게 손을 내밀었고,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인은 흐르던 피가 멈추었단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병이 나은 걸 온몸으로 알았습니다. 예, 성공했습니다.
지금까진 다 잘 되었는데, 저 나사렛 사람 예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찾습니다. 바쁜 상황인지라 그냥 넘어갈 만도 한데, 계속 누구냐고 찾습니다. 여인은 가슴이 콩닥콩닥 두렵고 떨립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용기를 냅니다.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접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빨리 야이로의 딸이나 구하러 가시지, 시간을 지체하며 멈춰 서서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그 여인을 왜 앞으로 불러 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민감하게 감지하셨던 건 뭘까요?
예수님은 누군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대서, 권능이 발현되었고, 질병이 나았음을 감지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을 아셨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평안 이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 존재가 겪는 고통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맞닥뜨린 문제로 끔찍하게 괴로워할 때, 그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과 사회 경제적 관계도 온통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얽히고설킨 인생의 구렁텅이에서 그를 꺼내, 영혼을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선물을 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하늘에 존재를 비끄러매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나아가 이웃에게서 지탄받고 어두컴컴한 구석에 숨어야 했던 자리로부터 나와서, 사람들 앞에 서서 만나고 함께 부딪히며 살아갈 존재로 세우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끝끝내 찾으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한 영혼을 찾아내기 위해 손을 뻗는 분이십니다. 이 마음이 야이로의 딸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길에서 혈루증 앓았던 여인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고, 그 사이 야이로의 집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딸이 죽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여러 사람이 울며불며 곡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식의 한 장면을 살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아이는 잔다.” 죽은 걸 몰라서 그러신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완전히 끝난 존재는 없습니다. 다만 잠들었을 뿐입니다. 손을 잡고 깨워 일으키면 됩니다. 거대한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어서, 절망밖에는 그 어떤 선택지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는, 완전히 망쳐진 존재, 돌이킬 수 없는 존재, 끝나버린 존재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 잠든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자고 있지만, 다시 일어날 존재, 아니 당신께서 반드시 다시 일으키실 존재로, 그 여인을 찾으신 겁니다.

* 온전히 받아들여지다
예수님은 여인의 자초지종을 다 들으시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목소리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아마 이전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예수님은 다가가셔서 그녀에게 손을 내미시고, “딸아”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다정한 목소리입니까. 이 한 마디에 품어 안으시는 큰 사랑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녀를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신다고요.
이렇게 ‘딸아’라며, 한 사람을 그 존재 그대로 받아주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저분이라면, 나같이 부정한 인간도 받아 주실 거야, 이 마음이 믿음입니다. 어느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나를 성장시킨 사람은, 충고해준 사람이 아니라, 기다려준 사람이라고요. 나를 믿어주고 받아주는 이가 곁에 있을 때, 사람은 앞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대담하게 돌파하는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 믿음으로 육체가 건강해졌습니다. 나아가 주님은 복합적인 인간 존재 전체를 온전하게 이끄십니다.
“안심하고 가거라.”
안심, 또는 평안으로 번역된 희랍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과 같은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본래적 관계를 회복함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인식에서 육체의 부정한 질병은 죄로 인한 신의 징벌이요 저주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회복되었음을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십이 년의 세월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의 충만함으로 치환하셨습니다. 이제 회복된 존재로서 세상 사람들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사람이 극심한 고통에 맞닥뜨리면, 정신을 놓고 막막해하다가, 억울해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분노하다가, 극심한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어떡하든 고난의 이유를 찾아내려 합니다. 이유라도 알면 덜 답답할 것 같으니까요. 설사 나를 탓해야만 하더라도, 이유 없는 고통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내면과 관계 속에 깊이 남습니다. 설사 고통의 문제가 풀린 이후에도, 그 더럽고 끈적거리는 상흔은, 존재를 붙잡고 뒤흔듭니다. 이후 다시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면, ‘지난번에도 그랬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라며, 이전보다 더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는 수용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이 병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문제에 지배받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를 다른 이름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이제 그녀는 혈루병자가 아니라, 딸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와 이적의 때마다 ‘네가 구원받았다’라고 말씀하실 때, 다시는 육체적으로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얽어매고 지배하는 악한 굴레로부터 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었으니, 다시는 똑같은 두려움에 속박당하지 말라는 선포입니다. 훨훨 새 삶을 살라는 당부입니다. 
이제 딸은 문제의 굴레에 붙들려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녀는 온전히 해방되었습니다.

* 베로니카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 사건 이후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곤 합니다. 혈루증 앓았던 여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잘 살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도성의 수많은 사람의 야유와 조소를 받으며,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간에 피땀을 흘리시며 쓰러지셨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뒤따른 여인 중 하나가 다가가서, 자신의 머릿수건을 풀어 예수님의 얼굴에 맺힌 피와 땀을 닦아 주었다고 합니다. 기적처럼 예수님의 얼굴이 그 수건에 남았고요. 십자가의 길 제6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입니다. 베로니카가 누군지에 대해 여러 전설이 있었습니다. 삭개오의 부인이라고도 하지만, 저는 열두 해 혈루증 앓았던 여인이라는 전설이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내서, 온 존재를 구하신 여인, 그의 이후의 삶으로 이보다 더 잘 맞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싶습니다. 그럼직하지 않나요.
그 여인의 삶을 상상해 봅니다. 제자들마저 배신하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는 나사렛 사람 예수의 처형 날, 가까이 곁에 서서 끝까지 함께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머릿수건마저 풀어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닦아주려 하지 않았을까요.
마을에 돌아와서도, 부정하다고 더럽다고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절망하는 이들을 슬며시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너른 품이 당신을 받아 주실 거라고 일깨워주고, 그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안으로 다시 끌어당기지 않았을까요.

주님께서는, 모두가 그냥 가자고 할 때, 멈춰 서서 한 여인을 불러내시고, 그녀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과 관계성도 구원하셨습니다. 딸로 품어 안으시고, 새 삶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다 끝났다고 주저앉은 한 영혼을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모두가 외면한 그를 당신의 품으로 품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내 딸아, 내 아들아, 이제 일어나 안심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믿음의 모험을 씩씩하게 계속 감행하며, 복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의 목소리와 손길을 기억하며, 일상으로 내려가, 베로니카처럼 자신의 수건으로 이웃의 땀과 피를 닦아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즐겁게 불편을 택하라

김기석

즐겁게 불편을 택하라



“내 당신의 곁에 가기만 해도

내 자신이 이미 아니리만큼 당신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너무도 어두우시와, 내 하찮은 밝음조차

당신의 가장자리에선 의미도 없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 시선>, 구기성 역, 을유문화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무탈하신지요? 워낙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기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느닷없는 중병 선고는 우리 삶의 기반을 사정없이 흔들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를 드리고, 별일 없이 잘 극복하실 거라고 격려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혼돈과 두려움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43:2) 이사야가 들려주는 이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 오신 교우들을 보며 ‘이제는 예배당이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정물인 공간이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빈 공간을 눈길로 더듬곤 했던 제 마음의 풍경이 공간의 외로움으로 느껴졌던 것이겠지요. 주일을 준비하며 묘한 설렘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길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왕자가 자기를 길들이면 일어날 일도 들려줍니다.



“난 보통 발소리하고 다른 발소리를 알게 될 거야. 보통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굴 속으로 숨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안 먹으니까 밀은 나한테는 소용이 없구, 밀밭을 보아도 내 머리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 그게 참 안타깝단 말이야. 그런데 너는 금발이잖니.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정말 기막힐 거란 말이야. 금빛깔이 도는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도 좋아질 거야."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은 서로를 길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우는 아니지만 한 분 두 분 교우들이 교회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면서 묘한 설렘이 일었습니다. 감상적이라고 웃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 공허함은 한 길을 가는 벗들의 우정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꽤 많은 이들이 온라인 예배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이야기합니다.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렇게 생긴 여유 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옷을 갖춰 입고, 먼 길을 나서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일이 아닐까요?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제물을 바치는 과정이 참 번거롭구나 싶지요? 제사를 바치는 사람은 성전에서 스스로 제물을 잡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받아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은 제사장들의 일이었지만,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저미고,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 것은 봉헌자의 몫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숨을 거둔다는 것처럼 긴장되고 꺼림칙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봉헌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운 밀가루를 바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요즘처럼 방앗간에서 빻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절구에 밀을 넣고 공이로 찧고 또 찧었을 겁니다. 그리고 체질을 통해 거친 것들을 골라내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소금을 치고 향을 얹어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을 통해 곱게 빻아지는 것은 봉헌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농사꾼으로 사셨습니다. 많진 않았지만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시느라 한가한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겨울철은 농한기이긴 하지만 필요한 가마니나 돗자리를 짜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여름은 참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토마토, 참외, 수박이 때맞춰 익어가고, 가지와 오이도 지천이었습니다. 토마토나 참외가 익어갈 무렵이 되면 어린 저는 날마다 밭에 나가 초록색 토마토 열매가 먹음직스러운 붉은 색을 띄는 것과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즐겁게 지켜봤습니다. 며칠 후면 저걸 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면서 토마토와 참외를 살피러 밭에 나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야 자초지종을 알고 얼마나 서운해 했는지 모릅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가시면서 어머니가 그 열매를 따다가 목사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어린 시절 저의 적이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몫을 가로챈 사람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제가 이렇게 목사로 평생을 살고 있으니 사람 일 정말 모를 노릇입니다.



주일을 맞이하기 전 어머니가 늘 하시는 일은 꼬깃꼬깃한 지폐를 다리미로 펴는 것이었습니다. 인두를 사용하실 때도 있었고, 다리미에 숯을 담아 사용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바로 그런 준비 과정 자체가 어머니의 예배였습니다. 분주함 속에서 허둥거리는 현대인들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신화적 세계에 속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배는 그렇게 바쳐졌던 것입니다.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왔네요. 이번 주까지는 많지 않은 인원만 예배당 입장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7월 첫 주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백신 접종을 하고 2주가 지난 분들은 20% 제한에 상관없이 예배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1미터 쯤 거리를 두고 앉아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니 더욱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예배당에서 울려퍼지는 찬양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요즘 교회학교 교사들은 여름성경학교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많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모일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을 마련하는 중입니다. 가끔 비가 내리긴 하지만 요즘 말갛게 개인 하늘과 간간이 떠있는 구름을 보노라면 저절로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아침해 명랑하게 솟아오른다’로 시작되는 여름성경학교 교가가 떠오릅니다. 요즘은 이 곡을 많이 부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 곡을 흥얼거리노라면 순수하고 순박했던 시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경의선 숲길을 걸었습니다. 양 옆으로 포플러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앙상하게 전지되어 좀 볼품이 없었습니다. 꼭 저렇게까지 잘라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흥이 났는지 ‘미루나무가 포플러지요?’라고 물으며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를 흥얼거렸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 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모든 것이 노골적이기만 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살짝 걸쳐놓고 갔다’는 노랫말이 참 정겹습니다. 왠지 이런 노래를 부르면 영혼이 깨끗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옆지기가 이런 노래도 부르더군요.



“포플러 이파리는 작은 손바닥 잘랑잘랑 소리난다 나뭇가지에 언덕 위에 가득 아 – 저 손들 나를 보고 흔드네 어서오라고”



비슷한 유년시대를 거쳤을 텐데 이 곡은 제 기억 속에 전혀 없습니다. 아내도 정말 오랜만에 이 곡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래도 그 가사를 다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의 정서의 원형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했군요. 삶이 무겁고 힘겨우니 가끔 일부러라도 시간을 마련하여 이런 가벼운 일상도 즐겨보시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빕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곧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