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김기석(20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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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눅 14:7-14
(2021/09/19, 창조절 제3주)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잃어버린 풍경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추석을 앞두고 조금은 설레는 주일 아침입니다. 어려운 상황입니다만 그래도 고향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도 기쁨이 넘치기를 빕니다. 저는 명절에 고향에 못 간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부모님께서 오래 전에 다 돌아가시고, 고향을 지키던 큰 형님조차 세상을 떠난 터라, 고향은 그저 추억 속에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새삼스럽게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추석을 전후한 시기의 그 분주한 명랑함이 그리웠기 때문일 겁니다. 아버지는 논에서 풋바심으로 조금 베어낸 햇벼를 절구통에 넣고 공이로 찧어 햅쌀을 만드셨습니다. 일정한 리듬의 절구질 소리가 한적한 시골의 아침을 깨우면 ‘아, 이제 명절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밤, 깨, 콩 따위의 송편소를 마련한 후 가족들이 상 주위에 빙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서로 자기가 만든 게 예쁘다고 다투는 모습도 선하게 떠오릅니다. 전 부치는 어머니 곁을 얼쩡거리다가 한 개씩 얻어먹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추석 직전 오일장의 흥청거림 또한 그립습니다. 바지게에 닭 두어 마리와 쌀 몇 말을 지고 장에 가시던 아버지 뒤를 줄레줄레 따라가며 장 풍경을 머리에 그리며 흥분 상태에 빠지곤 했습니다. 소나무 숲 아래 서서 장에 가는 농군들의 물건을 사들이던 재바른 장사치들의 눙치는 말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대목장에 상인들이 가져온 다양한 물건을 보면 저절로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불콰해진 얼굴로 장터를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신작로,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들판, 초가지붕 위에 매달린 하얗고 둥근 박, 장독대 위 아스라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던 감나무, 바람에 후두둑 떨어져 반짝반짝 빛나던 알밤. 지금도 이런 풍경은 여전하겠지만, 콩 한 쪽이라도 나눠먹고, 사소한 일에도 함께 웃고 울던 이웃 간의 정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이 우리는 많이도 거칠어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추석 때마다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 밥상’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시인은 우리가 한끼 밥을 차지하려고 또는 내 밥그릇을 지키려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고 말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기도 하며 삽니다. 그러나 그게 어긋난 삶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둥근 두레 밥상에 둘러앉고 싶어합니다. 어머니의 식탁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두레 밥상에서는 모두가 귀한 존재로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앉아 잃어버린 본래 모습을 되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 경계선 넘나들기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팔레스타인 땅을 주유하시던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밥상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김지하 시인은 ‘밥은 하늘’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어야 하고,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밥을 함께 먹는 이들이 식구입니다. 식구라는 말이 가족이라는 단어보다 정서적 울림이 더 큰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마다 식탁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점잖지 못한 천한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으셨습니다. 바리새파 하면 우리는 사사건건 예수님과 대립하던 집단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바리새파의 지도자의 초대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들의 나쁜 버릇 가운데 하나는 어떤 사람이 한 일을 그가 속한 부류 전체의 태도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어떤 지역 사람들, 어떤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은 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온의 찌지를 붙여놓고 배척합니다.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만나서 대화할 생각조차 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셨지만, 그들 집단 전체를 몹쓸 사람들로 매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초대에 응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파라테레오(paratereo)’는 나쁜 의도를 품고 바라볼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수종병水腫病(히드로피카스 hydropikos)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소가 장으로 흡수되어 일어나는 부종입니다.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를 의도적으로 초대한 것인지, 아니면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이 그를 그곳으로 이끈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은 차마 그의 고통을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침묵은 가끔 곤란함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됩니다. 주님은 더 이상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그를 고쳐주신 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주님의 두 번째 질문이 이어집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눅14:5) 굳이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진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속에 물이 차는 병인 수종병 환자와 연결하기 위함일 겁니다. 누가는 이 질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질문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낮아짐의 행복
누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셨습니다. 자리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배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앉거나 서는 자리에 민감합니다. 주인이나 높은 분 가까이에 앉을수록 자기가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눈치 싸움이 치열해집니다. 의전에 유난히 민감한 이들이 있습니다. 자리 배치가 자기 성에 차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종교인들이라 하여 다르지 않습니다. 그게 사회적 관습임을 모르지 않지만, 자리 배치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님 가운데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주인이 와서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끄럽고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애초에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앉으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가지 대조되는 동사 ‘올라앉다’와 ‘내려앉다’는 미래 수동형입니다. 이 비유는 처세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실 종말론적 구원의 잔치에서 벌어질 일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눅14:11).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을 존중할 줄 모릅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우리 사회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단어 갑질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배정된 자리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가 곧 사람의 품격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를 자기 능력으로 치환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갈등과 불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을 자꾸만 끌어내려야 합니다. 자기 비하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턱없는 우월감과는 자꾸 작별하는 게 좋습니다.
입장의 동일함이 연대의 최고 형태라는 말을 기억하시지요? 같은 자리에 선 사람은 누군가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사랑으로 대하고 연대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절대로 자기를 낮출 생각이 없는 이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젠체하는 마음, 거들먹거리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는 신앙의 신비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신의 그릇이 큰 사람일수록 소탈합니다. 가끔은 천진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맑은 웃음을 웃을 줄 압니다. 남들에 의해 낮추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낮은 자리를 택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대접받으려는 마음만 내려놓아도 삶의 무게가 덜어집니다.
• 자비의 식탁
이어서 주님은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라는 게 그 이유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가까운 이들을 초대하여 친교의 식탁을 나누는 게 우리 행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식탁 친교를 통해 우리는 긴장도 풀고, 유대감도 다집니다. 주님은 이런 식탁 교제를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경계하시는 것은 식탁 교제가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만의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만의 축제’는 다른 이들이 틈입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주님의 식탁은 정일근 시인이 말하는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 하여 배제되지 않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하여 천대받지 않습니다. 누구나 환대받는 자리입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눅14:13)
사람들은 자기가 베푼 잔치에 유력자가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유력자로부터 초대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 자기가 꽤 그럴듯한 사람임을 세상 앞에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올무일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프로 야구선수였던 홍성흔 씨가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는 공짜 술을 좋아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소위 ‘형님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주석할 때가 많고, 모든 부적절한 일이 모두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승부조작에 대한 유혹을 받기도 하고, 성적인 일탈행위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식탁은 모두를 환대하는 자리입니다. 환대란 사람들에게 자리를 주는 것,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라지요? 믿는 이들의 식탁은 사회적 약자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서울역에서 노숙인 사역을 하는 목사님 두 분이 저를 찾아와, 그분들과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예배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교회 또한 작은 선물을 마련해 그분들을 맞이했습니다. 이윽고 예배를 드리는 날 한 분 두 분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의 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초대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숙생활을 하는 동안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준비한 분들이 각자의 이름이 적힌 초대장을 그분들에게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청객이 아니라 초대받은 사람으로 그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 배려심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예배의 감동 또한 컸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한 말씀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롬 12:15-16)
마음을 열고 사회적 약자들을 우리 삶의 자리에 기꺼이 맞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설 땅을 마련해주고, 인간다운 존엄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물론 뻔뻔하고 무도하게 과한 요청을 하는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해도 한 번 두 번 그런 실천을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님의 마음과 접속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는 것,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행복입니다. 추석에 이런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고갈되지 않는 사랑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김기석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백로와 추분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 가정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길 빕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이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때입니다. 도시의 소음 때문에 그 소리를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어릴 적에 벽 사이에서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고, 둘이서만 알자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귀뚜라미와 나와’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고요한 귀 기울임의 풍경이 떠올라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크고 새된 소리보다는 작고 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평안해집니다. 시냇물소리, 솔숲이나 대숲을 스쳐온 바람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다시 윤동주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나무’ 전문). 이것은 인과관계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시인에게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나무가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기 때문일 겁니다.
어렵고 난감했던 세월을 살면서도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현실을 외면했다고 탓하면 안 됩니다. 힘겨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아름다움을 한껏 끄집어내야 합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평안한 시절에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그는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폭격기의 굉음이 들려올 때에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들판의 치커리와 카모마일을 꺾어 질겅거리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은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빵 한 조각, 죽 한 모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라는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늘 남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p.187)
선의 희미한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삶이 저 높은 삶의 차원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많은 영세 상인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원룸의 보증금을 빼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세상을 등진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쇠로 된 감방에 갇힌 듯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이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인 공덕역을 지나는데, 환풍구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며칠 후 그곳 환풍구에 놓인 꽃 몇 송이를 보고서야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환풍구 공사를 하던 20대의 젊은이가 9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자리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조치를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 본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눈앞에서 추락하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까요?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의 몸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피에타는 자식을 잃고 애통하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 해 전 팽목항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떠올렸습니다. 피에타 하면 흔히 바티칸에 있는 작품이 떠오르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만큼 제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은 없습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 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아래로 무너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전후좌우에서 살피다 보면 왠지 호흡이 멎은 예수가 오히려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업고 있는 것 같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인류의 아픔을 온통 짊어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의 아픔 속에 화육하고 계십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마치 세상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런 말조차 부질없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설 땅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외로운 이들 곁에 다가서고 싶어 하십니다.
미국의 영성가이자 설교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책을 읽는 중에 꽤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명 쯤 되는 혼성그룹의 영성 모임을 이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들이 다룬 주제는 ‘구체화된 경건’이었습니다. 그날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팔복이었고 일체 말은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그 말씀을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제시된 말씀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난감해 했습니다.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토론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낯설어 합니다. 자의식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그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팔복을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십 번 이상 들었을 터였습니다. 멤버 중의 목사들은 슬그머니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에 속한 한 사제가 시체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됐기 때문입니다. 15분이 지나 모든 조가 중앙에 모였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는 시체 역할을 자청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섰습니다. 두 번째 여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시체 역할을 하는 이의 머리를 무릎에 뉘였습니다. 다른 두 여성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 위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마치 그 죽은 여인의 몸 위로 고딕식 건물이 세워진 것 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이의 몸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사랑과 슬픔 속에 잠겨 그렇게 멈춰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그들 속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번져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깊은 당혹감 속에 빠졌습니다. 그 슬픈 흐느낌은 누구도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 역할을 하던 분의 몸이 흐느낌으로 흔들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흐느낌은 점점 커졌고 다른 사람이 따라 울기 시작했고, 울림소리도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울음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울음은 죽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Barbara Brown Taylor, <An Altar in the World>, HarperOne, p.48-51 참조)
기쁨보다는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슬픔 혹은 비애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입니다. 슬픔의 강을 따라 흐르다보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슬픔의 강은 국경, 이데올로기, 종교, 문화, 남녀노소, 빈부귀천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슬픔을 배제하는 문화는 천박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슬픔은 극복되어야 할 삶의 부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세계에 접속됩니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참 사람됨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군요. 가족들이 마음 편히 모이기도 어려운 시대이긴 합니다만, 안전하고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평화.
2021년 9월 16일